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위기 속에서도 최후의 빛을 발하다

1939년 겨울, 관동군은 길림의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 쇼토쿠 소장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만주군, 경찰대 등 7만5천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간도지구 토벌대, 길림지구 토벌대, 통화지구 토벌대 등 3개 부대로 나누어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개시했다. 치안숙정공작의 주요 내용은 “겨울에 눈이 내리는 시기를 이용하고 미리 목표비(目標匪)를 정하여, 쌓인 눈 위의 적의 발자국(위장 발자국을 간파하여)을 밟아 산채에서 취사하는 연기를 발견하면 이것을 복멸(覆滅)하고, 적의 모습을 발견하면 단숨에 섬멸하도록 하며, 나머지 잔당을 급히 추격하고 또 추격하여 적에게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지쳐빠지게 하며(일명 진드기 전법),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투항, 또는 귀순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주1)는 것이 요지였다. 주요 표적은 양징위, 차오야판, 김일성, 첸한쟝, 최현(각각 현상금 1만엔), 박득범, 팡치엔셩(현상금 5천엔), 웨이쩡민, 전광(현상금 3천엔) 등이었다. 비행기까지 동원한 감시, 집단부락 건설, 나가시마 공작대 등의 특수공작이 병행되었는데, 작전은 1941년 3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3천만엔의 예산을 들여 전개되었다. 

1939년 10월 초 양징위와 웨이쩡민의 주도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제1로군 남만성위의 주요 영도간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역량을 보존하고 괴멸적 타격을 피하기 위해 제1로군의 각 부대가 ‘완전히 자취를 없애고, 소부대를 편성하여 분산유격전을 전개할 것’(化整爲零)을 결정하였다. 웨이쩡민은 제3방면군과 함께 돈화, 안도, 영안남부 경박호지구로 진출하고,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백두산지구에서 압록강 상류로 진출하며, 양징위는 제1방면군과 직속부대를 이끌고 무송, 몽강, 금천, 통화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벌이기로 했다.(주2) 

그러나 웨이쩡민은 이 회의 후 위와 심장의 병이 악화되어 부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밀영에 남았다. 양징위 부대는 처음 700명 정도로 출발했으나 11월 말 몽강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에 포위되는 바람에 나뉘어졌으며, 12월 말 재결집했을 때 400명으로 줄어들었다. 통화성 경무청장 기시다니 류이치로를 대장으로 하는 통화성 경찰토벌대 2,200명이 양징위의 뒤를 쫓았는데, 양징위의 오른팔로 있다가 투항한 청빈이 토벌대의 선두병력을 지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1월 21일 몽강현 마가 동남방 밀림지구 전투에서 부상당해 체포된 경위려 제1단 참모 딩쇼우룽(丁守龍)이 변절했고, 2월 1일에는 전투 중 양징위의 신변을 경호하던 경위려 기관총배장(소대장) 쟝리펑(張李鳳)이 현금 1만엔과 권총 4자루를 가지고 일본군에 귀순했다.

부하들의 연속적인 배신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양징위는 1940년 2월 23일, 마지막 부하 2명을 잃고 혼자 포위된 상태에서 싸우다가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혹한 속에서 무얼 먹고 견디었는지를 알기 위해 그의 배를 갈랐다. 양징위의 위에서는 나무껍질과 풀뿌리, 그리고 솜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일본군 의사조차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일본군도 그를 ‘중국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애도했다.(주3) 양정우의 머리는 몽강현성과 통화에 내걸렸고, 일본군은 김일성과 최현만 잡으면 항일무장무대는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팡치엔청도 1940년 2월 15일 화전현 부근에서 체포되었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지휘 양징위 장군(사진=신화통신)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화전현 두도류하에 있는 전광의 밀영에서 남만성위 간부회의가 열렸다. 남만성위 서기 웨이쩡민이 주재한 회의에서 종래의 유격전만으로는 일만군의 토벌에 맞서기 어렵다고 보고 각계각층에서 당원을 확충하고 당조직을 재건 정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직재건 책임자로 결정된 김광학과 김재범마저 1940년 7월 체포되고 말았다. 

▲ ‘마에다부대’ 충혼비 앞에서 찍은 일본군 공작대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항일연군에서 투항해 일본군 앞잡이가 된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이다.(사진=전갑생, 오마이뉴스, 2007.9.13.) 

김일성의 제2방면군에도 귀순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1940년 2월 20일 제2방면군 참모장 임수산이 부하 10여명과 경기관총 2자루를 가지고 투항한 뒤 공작대를 조직하여 나가시마 공작반과 함께 무송, 왕청, 연길 일대에서 김일성부대를 뒤쫓았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부대는 1940년 3월 25일 안도현 대마록구 서쪽의 고지에서 화룡현 경방대대 ‘마에다 중대’(주4)를 공격하여 사실상 전멸시켰다. 북한에서 말하는 ‘홍기하 전투’인데, 말 그대로 “항일연군 제1로군이 간고한 시기에 거둔 중대한 승리”였다. 

1940년 3월 11일 김일성부대는 홍기하 계곡에 위치한 대마록구에 있는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 산림경찰대를 공격한 뒤 대량의 총탄과 쌀을 탈취해 퇴각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저 악명 높은 토벌대 ‘마에다부대’ 145명이 김일성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김일성부대는 추격하는 적 때문에 휴식도 취할 수 없었고,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생쌀과 눈으로 배고픔을 면했다. 대원의 절반이 근육이 굳어지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병이 가벼운 사람은 스스로 걸었지만 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었다. 김일성부대는 매복공격으로 적을 섬멸하고 총 100자루, 기관총 6자루를 획득하였으나 정치부 주임 뤼바이치 등이 부상당했다.(주5)  

그런데 이때 궤멸당한 마에다부대 145명 중 “일본계가 9명, 일부 만주계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선계였다.”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부대 쪽에서는 “총을 버리고 손을 들어라. 명령에 따르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목이 쉬도록 외쳤지만 마에다부대의 조선인 경찰관은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는 마에다부대 전멸 1년 후 화룡현 삼도구에 현충비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한 선계(鮮系)대원은 마침내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부상당했음을 알자 천황폐하 만세를 봉창하고 의연하게 죽어갔다”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과 조선인 부대원들은 틀림없이 그 만세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은 더욱 깊어갔을 것이다.(주6)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북한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북한을 보는데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 홍기하 전투를 소개하고 있는 연변일보(2005.5.27.일자) 기사(사진=이창기, 오마이뉴스, 2005. 8. 30)


항일빨치산 트로이카(김일성, 최용건, 김책)의 첫 만남

김일성부대가 토벌대에 치욕을 안겨주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제1방면군은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1940년 3월 24일 3사 정치부 주임 유만희(조선인)가 13명의 부하와 함께 활동하던 중 배반 기회를 노리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4월 8일에는 제1방면군 총지휘관 차오야판이 10여명의 부하와 함께 숙영하던 중 농민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제1방면군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한편, 첸한쟝의 제3방면군은 고전하면서도 살아 있었다. 총지휘 첸한쟝의 부대는 돈화 방면에서 활동하던 중, 1940년 봄 우심정자에서 일만군의 대부대에 포위되어 70명을 잃고 자신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용운의 제15단도 많은 대원을 잃었으나 참모장 박득범 부대와 13단장 최현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왕청현 라자구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정치위원 안길이 이끄는 제14단이 액목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다.(주7)  

동북항일연군 제1방면군이 완전히 붕괴되고 제3방면군도 가까스로 지탱하는 동안에도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은 마에다부대를 섬멸하는 등 여전히 그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2방면군의 위용도 오래가지 못했다. 김일성부대에도 위기가 찾아왔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이었다. 홍기하 전투에서 부상당해 치료중이던 정치부주임 뤼바이치가 밀고로 1940년 6월 29일 안도 부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제2방면군 내부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던 임수산의 귀순과 류바이치의 체포로 김일성부대도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기 힘든 위기 상황이 닥쳐왔다. 

▲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을 ‘토벌’하러 나선 만주국 ‘토벌대’(1939년)(사진=길림신문)

1940년 8월 10일 돈화현과 안도현의 경계를 따라 뻗어내린 할바령의 끝부분 소할바령에서 열린 유격대 간부회의에서 “귀중한 혁명역량을 보존육성하기 위해 대부대활동을 중지하고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은 대부대 활동을 중지하고 소부대로 분산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관동군 헌병대는 제2방면군의 실세에 대해 6월에는 200명, 7월 200명, 8월 160명, 9월 120명으로 보았고, 8월에는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다”라고 했으며, 9월에는 “몇 개 단으로 분산하여 잠복”했다고 파악하였다.(주8) 

김일성은 원래 소부대로 전환하여 겨울을 밀영에서 지낼 계획이었지만 주위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조건에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소련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부대의 소련 이동은 1로군 지도부가 괴멸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2방면군장이었던 김일성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졌다. 김일성부대도 이동이 늦었다면 훨씬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적절한 결단으로 빠른 시기에 소련으로 이동함으로써 많은 병사를 보존할 수 있었다.(주9) 

북한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항일무장투쟁에는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고, 그들 중 다수는 만주 땅에서 피를 뿌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항일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살아서 북한 땅에 돌아온 인물들은 소수였지만 그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해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 중에서 김일성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최용건(崔庸健, 1900〜1976)과 김책(金策, 1903〜1951)이다. 이 두 사람은 경력이나 활동 면에서 김일성에 뒤지지 않았고, 북한 정권에서도 김일성 다음 지위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김일성, 최용건, 김책은 항일빨치산의 트로이카라 할 수 있다. 

1900년생인 최용건(일명 崔石泉)은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의 고참 중국공산당원으로 광동코뮌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파견되어 소련과 중국 국경에 가까운 북만주 요하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이학복, 김진우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제7군의 기초를 만들었다.(주10) 민생단과 같은 노골적인 민족 박해는 없었지만 한족 출신 간부들의 계속되는 견제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시달려야 했던 최용건은 운남 강무당 동기였던 저우바오중에게 도움을 청했고,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도움으로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7군을 떠나 제2로군 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0년 말경 소련으로 넘어간 뒤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일명 ‘88독립저격여단’)가 결성될 때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책이었던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주11)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당시 초대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내각부총리를 거쳐 1958년부터 1972년까지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사회주의 헌법 개정으로 국가수반이 국가주석으로 바뀌면서 부주석이 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지켰다.(주12)

최용건보다 세 살이 적고 김일성보다 아홉 살이 많은 김책(본명 金洪啓)은 조선공산당 화요계 출신으로 1927년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9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출옥 후 북만주 주하(지금의 상지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제3군에서 활동했는데, 자오상즈(趙尙志), 리자오린(李兆麟, 일명 張壽錢), 펑증윈(馮仲雲) 등의 중국인 지도자와 이계동, 이복림, 허형식, 박길송 등의 조선인 간부들이 그의 동지들이었다. 김책은 유격대 지휘관보다는 정치위원, 당 서기 등 정치사상 및 조직 지도간부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3로군 내에서 자오상즈가 코민테른 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하면서 리자오린(이조린) 등과 갈등하는 등 내분이 발생했을 때에도 북만성위 서기로서 “공정하고 신중한 사리판단과 처신”을 해 중국공산당 내에서 높은 신망을 얻었다. 구국군과의 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고 제4군을 창설하여 길동지역과 북만지역 항일유격대 활동의 기초를 닦았던 고참 공산당원 리옌루(李延錄)는 김책과 연합작전을 자주 치르며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후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선인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주13) 

▲ 북만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인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인터넷 자료)

김책에 대해서 이처럼 후한 평가를 했지만 리옌루는 최용건에 대해서는 회고록에서 단 한번만 언급할 정도로 박한 평가를 내렸다. 최용건이 조직한 요하반일유격대가 리옌루의 4군에 한 개 단으로 편입되어 활동하다가 후에 독립한 7군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용건, 이학복 등 조선인 간부들과 갈등이 있었다. 1895년생이었던 리옌루는 자신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자오상즈를 3군 군장에 추대하고 3로군 자신은 4군을 창설해 이끌면서 제3로군 총지휘에도 자오상즈를 밀었을 정도로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인물이지만, 조선인공산주의자의 한국 독립투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고, 이는 결국 자신의 4군에서 활동하던 최용건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런 리옌루가 김책을 높게 평가한 것은 김책이 사업 능력뿐만 아니라 인품이나 처신에서도 매우 훌륭했음을 말해준다. 필자가 북만지역 역사기행 때 상지시(옛 주하로 김책의 초기 활동 무대였던 곳)에서 만난 향토사학자도 김책의 활동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한 바 있었다.
 
김책은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당·정·군의 모든 분야에 두루 관여하면서 김일성을 보좌하였고 최용건과 함께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때문에 김책에 대해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총리와 성격이나 역할이 비슷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주14) 김책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초대 산업상과 부수상을 지냈으며 6.25 전쟁에서 전선사령관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51년 병사해 역사의 장에서 일찍 퇴장했다. 

항일무장투쟁의 트로이카라 할 김일성, 김책, 최용건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이동한 뒤 1941년 1월 2차 하바롭스크회의에서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바롭스크 야영에서 만났을 때 최용건은 “지난날의 생활에서 자기를 제일 괴롭힌 것이 고독감이었다”면서 “고독감이 심할 때면 백두산에서 싸우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에 의하면, 길동 북부에서 싸우던 최용건은 김일성에게 네 차례나 연락원을 보내 만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서 실패했고, 김책도 1930년대부터 김일성을 만나고 싶어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김일성도 이들을 만나기 위해 북만지역까지 갔었지만(2차 북만원정) 못 만났다. 

동북지역 각지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서로의 활동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함께 만나 조선의 해방과 혁명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으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들이 하바롭스크에서 비로소 만났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이다. 성공회대학교의 김명호 교수는 “김책과 최용건은 동북시절 같은 항일연군이긴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김일성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소련에서 김일성을 만나자 문중의 종손처럼 애지중지했던 것 같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 탁견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썼다.(주15) 이들의 관계와 만남에 대한 매우 감각적인 표현인 셈이다. 

동북항일연군 교도려(‘88독립저격여단’) 결성

1942년 7월 16일 왕쉰린(王新林)과 저우바오중 등 야영 지도부는 A․B 야영을 합쳐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東北抗日聯軍敎導旅)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교도려는 사실상 조선, 중국, 소련의 연합부대로 조직되었는데, ‘국제홍군특별독립88여단’(보통 ‘88여단’)으로 불리며 형식적으로는 소련군 산하에 편제되었다. 저우바오중은 “교도려의 목적은 전동북의 항일구국혁명 군사정치간부를 양성하는 것”이며, 그 임무는 “직접 전쟁을 하게 될 새로운 환경에서 동북의 유격운동을 적극 발동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중공당 조직과 정치노선은 변경하지 않고 앞으로 독립 활동성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립활동성을 강화한다”라고 기록하였다. 7월 22일 소련극동정보부장 왕쉰린(주16)이 항일연군 지도자들을 방문, 교도려 편제를 논의하였다. 같은 날 저우바오중, 김일성, 쟝슈첸(리자오린) 등은 소련극동군 사령관 아파나센코 대장을 방문했다.

1942년 8월 1일 교도려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는데, 동북항일연군 551명과 요하에서 귀순한 만주국군 71명, 그리고 소련군과 소련의 중국인, 조선인 등을 합쳐 모두 1,50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교도려에는 4개의 영과 무선련, 박격포련이 있었다. 1942년 9월 13일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국이 결성되어 겨울 중공당항일연군교도려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당권은 주로 저우바오중이 지휘한 제2로군 출신이나 그와 친밀한 제1로군 계통 사람들이 장악했다. 특별지부 책임자(서기)는 최석천(최용건), 부서기는 김일성이었다. 위원에는 김경석, 김책, 안길, 왕밍구이(王明貴), 펑시라오(彭施魯), 왕후이밍, 지청, 후보위원에는 심태산, 왕이즈(王一知)가 지명되었다. 교도려위원회는 서기에 최석천(최용건), 위원에 저우바오중, 쟝슈첸, 펑징윈, 김책, 김일성, 안길, 왕후이밍, 지청, 쑹밍, 왕밍구이, 펑시라오, 김광협, 왕이즈 심태산, 강신태(강건) 등이었다.(주17) 

▲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지휘부 사진 촬영. 앞줄 좌로부터:바탈린(N.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제2열 좌부터 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제3열 좌로부터 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 제4열 좌로부터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김일, 조선), 최용진(崔勇進,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소련으로 넘어간 뒤, 군부뿐만 아니라 당계통에서도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과거의 활동경력을 바탕으로 조선인 활동가들이 집결한 상황에서 지도 인물로 부상했다. 최용건과 김책은 나이나 경력면에서 김일성에 뒤지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주력부대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보천보 전투 등 국내 진공전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인 대원들은 김일성을 조선인 지도자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해방 후 북한을 주도하게 되는 항일빨치산파의 구심점을 형성하였다.(주18)  

교도려의 여장에 저우바오중, 정치부여장에 쟝슈첸, 부여장 시린스키 소좌, 참모장 양린(사마르첸코) 소좌, 부참모장 최석천(최용건) 등으로 사령부가 구성되었다. 제1교도영은 제1로군을 기초로 하여 편성되었으며, 영장은 김일성, 정치부영장은 안길, 부영장은 마리체프였다. 제2교도영은 제2로군 제2지대를 기초로 하여 편성되었으며, 영장은 왕후이밍, 정치부영장은 강신태(강건), 부영장은 아다모프였다. 제3교도영은 제3로군을 기초로 하여 편성하기로 하고 아직 만주에서 싸우느라 도착하지 않은 허형식(주19), 정치부영장은 역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김책(주20), 부영장은 사포지니크로 결정했다. 제4교도영은 제2로군 제5지대와 제1로군의 일부를 기초로 하여 편성되었는데, 영장은 서시잉, 정치부영장은 지청, 부영장은 지레노프였다.(주21) 그리고 무신전신련의 영장은 오스뜨로고프였다. 이처럼 교도려는 여나 영의 수준에서도 부책임자로 소련군인이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중·소 연합군으로 볼 수 있었는데, 명칭도 ‘국제홍군특별여단’이었다.

동북항일연군교도려는 독립성을 유지하였고, 중공당 조직의 지도가 관철되었지만, 형식적으로는 소련 극동군의 한 단위부대에 항일연군이 흡수된 형태를 취하였다. 소련극동군 산하 ‘국제홍군특별독립88여단’(보통 ‘88여단’)이란 명칭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항일연군교도려, 소련에서는 ‘88여단’, 북한에서는 ‘국제연합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형식적 체계와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이들은 소련군복을 착용하였고, 소련군 계급장을 달았다. 저우바오중중과 쟝슈첸(리자오린)이 소좌, 최석천(최용건)·김일성·안길·왕후이밍·강신태·김책·펑징윈·서시잉·지청 등은 대위, 연장과 정치지도원은 상위, 배장과 다수는 중위, 소수는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이것은 제2차 하바롭스크회의에서 소련군측이 내놓았던 제안이 형식상으로 실현된 셈이지만 실질적인 내용면에서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였으므로 저우바오중, 김일성 등은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주22) 

<그림> 동북항일연군교도려(소련극동군 제88독립저격여단) 조직도

▲ (출처: 김충석, 소련극동국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30(2016.6,7-60), 37쪽

조선공작단 결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의 귀국

1945년 5월,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독일이 마침내 항복했고, 일본의 패색도 짙어지고 있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얄타협정을 기초로 유럽전선에서 극동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본격적으로 대일전을 준비하였다.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독일이 패망한 때로부터 2~3개월 후에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기로 합의한 바 있었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소련극동군 총사령부가 치타 북서쪽 25킬로미터 지점에 설치되었다. 항일연군 대원들은 대일전에 소련과 함께 참전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소련군의 병력과 장비이동을 흥분된 마음으로 전해 들었다. 4월 5일 몰로토프 외상은 소·일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일본에 통고했다. 

1945년 6월 2일 극동군 사령관 푸르카예프는 항일연군 최고지도자 저우바오중에게 소련의 대일작전 의도를 전달하면서 협력을 요청하였다. 비밀엄수를 전제로 소부대 파견 및 작전시 길을 안내할 요원을 요청하였다. 저우바오중 등 지도부는 비밀리에 요원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7월 하순 극동군사령부의 고위지휘관이 야영지를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전체 대원들에게 전황이 알려져 있었다. 340명의 대원들이 소련군에 파견되었다. 제1극동방면군에 160명, 제2극동방면군에 80명, 자바이칼 방면군에 100명 등이었는데, 주로 소련국적의 대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주23) 

김일성은 주로 제1극동방면군과 소련군의 대일작전에 대한 항일연군의 협력을 논의했고, 종전 막바지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군부 및 당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1945년 7월 말, 중공당항일연군교도려위원회는 중공동북당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조선인 대원들만으로 조선공작단을 조직하였다. 저우바오중의 회고에서는 조선공작단, 조선공작위원회, 조선공작단위원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290여 사람을 조선으로 돌아가도록 파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공작단은 서기에 최석천(최용건), 위원에 김일성, 김책, 안길, 서철, 박덕산, 최현 등을 선출하였다.(주24)

조선공작단 결성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선혁명에 대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부활한 것을 의미했고, 조선인 지도자로 김일성이 부상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교도려 시절과 공작단에서의 지위로 본다면 최용건이 김일성보다 상위에 있었지만 이미 김일성은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최용건은 중공당 중앙에서 파견한 동북국 서기 펑전(彭眞)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주에 남았다가 뒤에 귀국한 반면, 김일성은 공작단을 이끌고 귀국하여 바로 건국과 건당, 건군 작업을 총지휘하기 때문이다. 공작단이 북한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중공당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소련의 영향력이 절대적이 되었다.(주25)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일행은 9월 5일 야영을 출발하여 9월 19일 원산에 상륙하였는데 김책, 안길, 최현, 김일 등이 동행하였다. 이때 원산위원회에서 활동하던 태성수, 정률 등이 부두에 나가 이들을 맞았다. 김일성 일행은 9월 21일 평양으로 향했으며 도중에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오던 치스차코프의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김일성은 9월 22일 평양에 도착했으나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활동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 동양척식회사 평양지사 자리에 사무실을 내고 국내 사업에 착수하였다. 김일성은 ‘김영환’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활동했다.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항일유격대 대원들은 곧바로 지방에 파견되어 당과 국가, 군의 조직사업에 투입된다. 조선공작단의 항일유격대원들은 각각 지방에 파견되어 아래서부터 조직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김책은 함흥, 안길은 청진, 김일은 신의주, 최현은 강계, 서철은 원산 등지로 파견되었다.(주26)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세력은 이러한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그 어떤 집단이나 세력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북한 지역의 상황은 공산주의 세력의 힘이 대단히 미약했다. 1945년 11월 현재 진짜 당원이 300여명 내지 제대로 된 당원이 500여명밖에 안된다고 말할 정도로 조직화된 집단이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1, 2백여 명에 이르는 항일유격대 세력의 조직적인 활동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주27) 해방 후 짧은 기간에 젊은 나이의 김일성이 북한에서 대중적 지도자로 부각하고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동지였던 저우바오중과 김일성 가족의 기념촬영. 주보중, 왕일지, 김정숙, 김일성. 앞줄 왼쪽이 주보중의 딸 주위(周偉), 그 옆이 김정일.

김일성이 대중지도자로 부각된 것은 기본적으로 항일투쟁 시기의 경력과 대중적 명망, 그리고 소련군의 지원이 가장 중요했지만 항일유격대가 귀국 전 결성한 조선공작단의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활동도 큰 힘이 되었다. 김일성을 지도자로 한 이들 항일유격대 세력은 다른 어떤 세력에 비해 결속력이 강했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세력이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최용건과 김책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들은 경력 면에서 김일성에 뒤지지 않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김일성을 지도자로 밀었다. 그 결과 항일유격대 세력은 나이, 학벌, 당 활동 경력, 국내 조직 연계 등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 등 쟁쟁한 인물과 파벌, 세력들을 물리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항일연군 대원들 중 만주에서 싸우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련 영내의 야영지에서 교육과 훈련, 정찰 및 소부대 조직 활동을 전개하면서 해방 전까지 지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북한으로 귀환한 대원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치되어 행동하였고, 결국 북한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끝까지 살아서 북한으로 들어온 사람 숫자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와다 하루끼의 계산에 따르면 133명이 확인되고 있다.(주28) 항일유격대세력의 중심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은 초기 주로 군대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무력을 장악했으며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된 뒤에는 당에도 대거 진출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거치면서 연안파, 소련파 대부분이 숙청된 뒤에는 항일유격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였고 이를 통해 ‘김일성 유일체제’가 성립되었다. 

▲ 해방 후 북한 군부를 장악한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 평양에서 최초로 생산된 따발총을 들고 기념 촬영했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박덕산), 강건태(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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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224쪽

2)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25쪽

3) 이재화, 한국근현대사 민족해방운동사, 381쪽

4) 마에다 중대 지휘관 마에다 다케이치(前田武市)는 조선경찰로 있다가 지도관으로 만주에 파견되어 화룡현경찰서장과 삼도구 경찰서장을 지냈고, 1939년 4월부터 ‘김일성토비대’에 참가했으며 10월 우나미 경방대대가 조직되자 그 중대장이 되었다. 늘 “김일성의 머리는 내가 베어들겠다”고 떠들며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홍기하 전투에서 유격대에 사살되었다.(와다 하루끼, 229쪽)

5)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30~231쪽 

6)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32쪽

7)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33쪽

8)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44쪽

9)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45~248쪽

10) 유순호, 만주 항일 속으로, 선인, 2015, 264〜266쪽

11) 백정윤, ‘주보중 일기’를 통해 본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조선인 대원들의 활동(1936〜1941), 한국근현대사연구 68, 2014. 3. 234〜237쪽

12) 와다 하루끼, 186〜205쪽 참조

13)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05〜217쪽 참조

14) 이원섭, 「[비화발굴]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 이민여사의 ‘60년만의 증언’」, 신동아 486호(2000년 3월호), 492〜506쪽

15)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⑥ 중공의 신임 얻은 조선인들-중공, 동북지역 국민당 제압하려 평양의 김일성을 만나다”, 한겨레, 2014. 3. 17.

16) 왕신림(王新林)은 만주 빨치산들과 접촉하던 소련 극동군 책임자의 암호명인데, 이 암호명은 후임자에게도 그대로 승계되었다. 중국측 기록에는 초대 왕신림은 극동군 내무부장 와실리(瓦西里, Vasily) 소장, 2대 왕신림은 극동군 정보부장 소르킨(索尔金, Sorkin)소장으로 나온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초대 왕신림은 극동군 정보부장 류쉔꼬 장령, 2대는 극동군 정보부장 소르낀 장령으로 나온다. 왕신림(王新林)은 소련 이름 와실리(瓦西里, Vasily)를 음사(音寫)한 것이라 한다. 북한측 주장에 의하면, ‘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1940.12〜1941.3.)가 끝날 무렵에 류쉔꼬가 소르낀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17)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487쪽

18) 기광서,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 현실 28, 1998.6, 257〜275쪽 참조

19) 북만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허형식은 교도려 결성 이틀 후인 1942년 8월 3일 경안현 청봉령에서 전사하였다.  

20) 김책은 허형식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다 1943년 10월에야 비로소 철수를 개시하여 1944년 1월에야 교도려에 합류한다. 이 사이 허형식, 김책과 활동하던 박길송도 1943년 1월 4일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된다. 그 사이 허형식을 대신해 왕밍구이(왕명귀)가 영장을 맡고 있었다.(와다 하루끼, 위의 책, 270쪽)

21) 서시잉은 1943년 하바로프스크로 불려간 뒤 행방불명되었고, 지청은 체포되어 일본 간첩 혐의로 10년형을 받았다. 서시잉의 후임으로 강신태(강건)가 영장으로 임명되었다.

22)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68쪽

23)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83~284쪽

24) 신주백, 위의 책, 490~491쪽 

25) 기광서, 앞의 글, 275〜289쪽

26) 박병엽 증언/ 유영구․ 정창현 엮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52〜55쪽

27) 저우바오중은 조선공작단에 속한 조선인이 290여명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모두 함께 귀국한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과 함께 원산을 통해 귀국한 유격대원들은 최소한 60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소련에서 합류한 소련계 한인 대원, 유격대원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이 보다 좀더 많았을 것이다.(신주백, 위의 책, 490쪽) 일부 대원들은 동북지역의 해방을 위해 파견되었고, 여성대원들은 이들보다 늦게 귀국하였다.  

28) 와다 하루끼, 앞의 책, 294~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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