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경찰이 대거 몰려와서 마을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전에도 두 번의 침탈이 있었지만 대체로 낌새챌 수 있었다. 경찰 쪽에서 침탈 정보를 흘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공사차량 출입도 없었다. 이날도 평소처럼 부대 앞으로 가서 집회를 하고 각자 집으로, 활동지로 이동했었다. 한동안 침탈이 없었으므로 하루가 그냥 넘어가나 보다 할 때였다. 경찰이 수도 없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상황실에 접수되었다. 상황실장은 마을 내의 여러 곳에 알렸고, 각 지역에도 급히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지원 세력이 오기는커녕 마을 사람들이 제대로 모이기도 전에 경찰이 이미 마을회관부터 올라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또 상황실이 있는 진밭교도 경찰력을 투입하여 아래 위로 막아서 고립을 시켰다. 이때의 경찰 병력이 모두 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진밭교에만 4천 명이 투입되었다. 마을회관 부근에 결집된 경찰들이 마을 사람들을 에워싸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소성리 이장과 대책위원장은 일단 무슨 법적 근거로 사람들의 통행을 차단하는 것이고,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이냐고 따졌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장도 대책위원장도 그들의 완력에 의해 고립될 뿐이었다.

  이장과 대책위원장은 항의의 방법을 바꾸었다. 코로나19 이후로 공사 차량도 기지에 들어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이다. 그런데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 들어와도 되느냐고 경찰 측에 항의했다. 이 중에 확진자라도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냐고 따졌다. 더욱이 이 마을 사람들의 대다수는 감염병에 취약한 노인들이었다. 사드 반대도 중요하지만 코로나19를 막는 것도 이장에게는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하지만 역시 경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장과 대책위원장은 열이 받아서 보건소와 군청에 전화했다. 외부 사람 수천 명이 아무런 방역 조치 없이 몰려들었다고 빨리 차단해 달라고 하였다. 군청에서는 경찰은 경찰청 소관이라고 자기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방역이 왜 경찰청 소관이냐고 계속 따지자 보건소에 연락해 보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보건소에서 마지못해 소독 차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책위원장은 차에 올라타서 보건소에 직접 갈 테니 경찰에 비켜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찰과 함께 온 견인차에 차를 연결하더니 차를 들어 올려서 이동시켰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람이 탄 채 견인차로 차를 들어 올리다니.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10미터 정도 이동되면서 들어 올려진 채로 멀리 내다보니 보건소의 소독 차가 왔는데 경찰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방역 지침까지 무시할 정도로 지금 하는 일이 시급을 다투는 일인가?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대책위원장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이 상황이 종료되면 너희들 중 책임자는 처벌 받을 각오하라. 방역 행위를 방해한 죄로 고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날 투입된 경찰들은 특별히 포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점잖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마치 로봇이나 기계처럼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만 아무 말 없이 가차 없이 수행하였다. 수적으로 워낙 열세가 되다 보니 몸싸움이란 것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섰다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있다니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이었다. 

  주민들과 상황실 활동가들을 옆으로 밀어붙여서 차단하고는 뭔가 커다란 트레일러에 실려 들어갔다. 주민들 말로는 그때 전자장치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한참 지난 뒤 부대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오늘의 작전은 노후 장비 교체라고 하였다. 그러니 낡은 장비를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엊그제 한미일 미사일 훈련을 했다는 정보가 상황실에 들어왔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의 MD에 편입되는 것이라고 주민들과 상황실 활동가들은 판단하였다.

  트레일러가 들어가고 나오면서 상황은 종료된 듯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철수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쪽으로 몰아붙여서 고립시킨 주민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진밭교 상황실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감금 상태로 있었다. 소리 소리 지르며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평소에 잘 보이던 소통 담당 경찰관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지휘관인 듯한 사람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경찰도 평소 보던 의경들이 아니고 신체가 건장한 무술 경관들 같은 경찰들만 있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결국 고립된 상태에서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수록 열불이 났다. 벌써 햇수로 5년째 싸우고 있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무슨 법을 근거로 주민들을 감금하는지 따져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주민들은 다음날 아침부터 성주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농성을 하면서 서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코로나19로 거리두기를 하는 상황에서 수천 명 아니 만 명이나 되는 경찰을 마을에 투입시키고,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감금하였으며, 상황이 종료된 후까지 집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은 분명히 불법적인 행위이고 도대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를 밝혀야 했다.

  “지방선거 이기고, 국회의원 선거 이기면 뭐하나?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데이.”

  말을 마치며 할매가 다시 한 번 한 말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할머니가 오히려 국회의원 선거에서 크게 이기니 기고만장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자 혼란스러워졌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대승했으니 그 힘으로 적폐를 청산해야 할 터인데 그게 아니라 적폐를 온존하는 데 그 힘이 쓰인다면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2020년 6월의 소성리는 민주세력이 대승을 거두고 수구적폐세력이 위기에 처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강압이 주민들의 의사를 짓밟는 곳이었고, 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할매들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한 까닭은 또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텔레비전을 봐도 라디오를 봐도 인터넷을 봐도 소성리에서 간밤에 일어난 일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아주 조금 다룬 곳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소식에 묻혀 있었다. 간밤에 내가 헛것을 보았나고 의심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온통 이런 무법천지를 외면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경찰서라도 가서 죽을 힘 다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좌절하기보다 더욱 투쟁의 의지를 굳게 하는 할매들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 [삽화-백소(白笑)]

  점심을 다 먹은 뒤 할매들은 다시 경찰서로 갔다. 오전에 왔던 대구 사람들, 김천 사람들도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원래부터 이들은 자주 오는 대신 한두 시간만 있다가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저녁까지 남아서 집회를 해야 하는 임무는 장선우와 신돌석씨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물론 상황실에 있는 원불교 교무가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니 해가 강하게 내리쬐면서 더워졌다. 그늘을 찾아서 더위를 식혔다. 마치 피서를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드나드는 차도 거의 없었다. 전기공사한다고 들어간 차와 묘지 이장을 위해 측량을 하러 들어간 차도 나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있다가 슬슬 졸음이 왔다. 이러다가 점심만 얻어먹고 밥값도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작년에도 신돌석씨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책임을 지고 두 번 왔었다. 5월 말과 크리스마스날이었다. 두 번 다 차를 대절해서 갈 정도로 인원이 어느 정도 되었다. 그리고 지역에서 거둔 돈을 가지고 가서 후원금 전달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랑 두 명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선우는 공동행동 소속이니 신돌석씨 혼자 온 셈이었다. 시민사회진영에서도 사드가 점차 잊히는 듯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차를 대절해서 10명 내외가 내려오면 사드반대공동행동에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의미가 물론 가장 크지만 그 못지 않게 지역 단체 사람들끼리 우의를 돈독히 하고 동지애를 더욱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오며 가며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고, 돌아가며 발언할 기회도 가졌다. 지역으로 돌아와서는 뒤풀이까지 하였다. 작년 5월 말에 벚꽃이 다 져서 올해는 벚꽃 필 무렵에 오자고 했었다. 주민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내심 멀리 바람 쐬러 가니 즐겨 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도 어쨌든 많이 오면 좋아들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코로나19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때 내려올 때는 5월보다는 좀 줄었다. 아무래도 성탄절이라는 특성 때문에 일단 교회와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못 오고, 5월에 왔던 어떤 사람은 마누라가 화를 내서 포기하였다. 장선우가 크리스마스가 우리가 책임져야 할 날이라고 할 때 신돌석씨는 그날 누가 가겠냐고 하면서 갈 사람 없을 거라고 했었다. 신돌석씨도 아내한테 미안해서 망설이다 말을 꺼냈는데 아내는 오히려 혼자 집에서 푹 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기는 했는데 붙잡지 않는 것이 왠지 서운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었다. 그밖에도 몇 명이 더 가서 그런대로 수를 채울 수 있었다.

  재작년인 2018년 가을에는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소성리 가는 날로 집중하였던 적이 있었다. 버스만 10대 정도 대절해서 을지로에서 출발하였다. 서울 경기만이 아니라 대구 경북을 비롯하여 광주, 부산 등에서도 집결하였다. 마을회관 앞 집회 장소가 좁아서 여러 단위가 나누어서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진밭교로 올라가서 거기에 무대를 설치하고 집회를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참여할 정도로 큰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진밭교 앞의 집회가 끝나자 다시 부대 앞으로 올라갔다. 그때의 기세는 정말 사드를 뽑아내고 평화를 심는다는 말이 확 와 닿을 정도였다. 

  부대 앞에서 집회를 한 뒤 준비된 현수막을 들고 진밭교 쪽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선두가 진밭교에 닿을 때까지 후미가 출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참여 인원이 많았다. 김천에서 성주로 들어오는 길이나 마을회관에서 부대 앞까지 올라오는 길 양쪽에 걸려 있는 수많은 플랭카드들의 주인들이 모두 다 모인 듯하였다. 이럴 때 경찰이 도발이라도 해주지 않나 하는 우스갯소리도 하였다. 하지만 경찰도 그런 것을 아는지 기본적인 경비 인력 이외에는 없었다. 그 사람들이 다 어디 갔을까? 사드 반대의 의지를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5시쯤 되자 원불교 교무가 집회하러 올라가자고 하였다. 점심 때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장선우, 신돌석씨와 교무 셋이서 해아 할 판이었다. 

  “신형이 밥값 못하나 걱정했는데 이제 밥값은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장선우가 쓸쓸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지 농담을 건넸다. 걸어갈까 하다가 원불교 교무의 차를 타고 올라가기로 하였다. 이전 집중 집회 때 서울에서 내려온 어르신들이 호기롭게 걸어가시다가 힘들어 하셨던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처음 왔을 때는 걸어서 올라가다가 도중에서 교무의 차를 타고 갔었다. 그리고 집중 집회 때는 행진이었으므로 걸어서 올라갔다가 걸어서 내려왔다. 거리도 거리지만 경사가 져 있어서 사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걸어서 못 갈 정도로 먼 길은 아니었다. 다만 셋이서 걸어가자니 더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차로 갔다. 물론 현수막, 앰프 등도 가지고 가야 했기 때문에 걸어서 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부대 앞은 여전하였다. 가끔 병사가 보일 때도 있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 있고, 그 뒤에 정문이 있고, 한쪽에 위병소가 있는데 거기에도 근무병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없는지 아니면 집회하는 시간이니까 자리를 비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출입구가 이곳 한 곳밖에 없다고 하는데 공사 차량 등이 올 때 어떻게 열어주는지도 궁금하였다. 당연히 열어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지금 상태로 보면 철조망을 다 치우고 문을 열어주려면 꽤 많은 사람이 나와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사드 가고 평화 오라’라고 적힌 현수막을 신돌석씨와 장선우가 한쪽씩을 잡고 부대 쪽에서 볼 수 있게 섰다. 원불교 교무가 스피커와 마이크를 연결한 뒤 집회 시작을 알렸다. 먼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언제 불러도 가슴 뭉클하게 하는 노래이다. 새로운 국가로 하자는 주장도 한때 있었는데 수구세력의 역공이 저어되어서인지 그런 주장은 일단 널리 퍼지지는 않고 있다. 그 대신 현재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가 친일 행각을 벌였고, 더욱이 친나찌라는 전력 때문에 곡을 바꾸자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리랑에 맞추어서 애국가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이후에 발언을 했다. 먼저 원불교 교무가 사드 배치의 부당성을 국내외 정세를 토대로 이야기하였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지만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서 설명하였다. 그는 특정 정교의 성직자인데도 자기 종교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원불교 성지 침탈에 대한 말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만 사드가 전쟁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강대국들 사이의 다툼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한쪽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장선우가 평소의 생각대로 사드는 박근혜 정권이 남긴 적폐라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의 침탈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장선우는 소성리 사람도 아니고 여기 상주하는 활동가도 아니지만, 그날 마을회관 입구가 막히자 산길로 돌아서 진밭교까지 들어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행 과정에 대해서 외부 사람치고는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2020년의 소성리는 계엄령 상태라고 규정하였다. 민주정부라고 주장을 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탈법적인 행위를 하는 문재인 정부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돌석씨에게 마이크가 왔다. 신돌석씨는 사드 배치가 부당하다는 것은 정부도 알고 군도 알고 경찰도 알 거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이것을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냉정히 생각해 보자고 하였다. 소성리 주민 절대 다수가 사드 배치를 반대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데도 밀어붙이는 정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의 싸움에서 섣불리 미국 편을 들어 화를 자초하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우리는 사드 배치를 온몸을 바쳐 반대한다고 하였다

▲ [삽화-백소(白笑)]

  다시 구호를 외쳤다. 
  원불교 교무가 먼저 외쳤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사드 뽑고 평화 심자.
  장선우가 외쳤다.
  한반도 평화 위협하는 적폐 사드를 철거하라
  신돌석씨도 외쳤다.
  기지 불법공사 뒷받침하려는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

  구호를 돌아가면서 외친 뒤 노래를 불렀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였다. 여기 올 때마다 불렀기 때문에 친숙한 노래이지만 가사를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원불교 교무가 가사가 적힌 커다란 피켓을 앞에 놓았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우리의 땀 우리의 힘으로
  ......
  세계 평화의 길이 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신돌석씨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땀, 우리의 힘으로’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결국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민초들의 땀, 민중들의 힘으로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계 평화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군사독재, 수구독재들의 막강한 물리력으로 우리의 자주를 짓밟던 외세가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약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이전까지 있어 왔다. 그리고 신돌석씨가 역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의 과정은 그런 믿음을 가질 수도 있게 하였다.

  하지만 소성리를 생각하면 그런 믿음이 흔들린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알아서 적폐를 청산하고 자주통일의 길로 앞장서 나간다는 생각은 신돌석씨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전 정부들과 다를 바 없이, 어떤 면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외세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억압한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최소한 고뇌하는 몸부림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신돌석씨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수구세력의 약화에 취해서 점점 소성리를 잊어버리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당장 재작년보다 작년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그런 것 같았다.

  원불교 교무가 마무리 발언을 했다. 보이지 않는 우리 군인들을 향한 내용이었다. 여러분들은 대한민국 국군 중에서도 최정예병사인 특공부대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왜 미군기지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우리나라를 지킨다고 군대에 온 여러분들이 왜 주민들이 반대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 사드 배치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이 평화로운 소성리 땅을 중국의 공격 표적으로 만들어 놓는 어리석은 짓이다. 여러분들이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하나 하나 행동할 때마다 이런 점을 명심해 달라.

  신돌석씨는 이 발언을 들으면서 언젠가 노조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났다. 80년대 말에 전경에 차출돼서 근무했던 사람인데 시위를 막다 보니까 시위하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 노래 등에 익숙해졌고, 처음에는 자기가 고통스러우니까 시위하는 사람들이 밉더니 어느새 자기가 그 사람들을 동조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여기를 지키는 군인들이라도, 침탈하러 온 경찰들이라도 끊임없이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았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옳은 일을 위해 힘이 되리라.

  집회를 끝내고 다시 원불교 교무의 차를 타고 내려왔다. 잠시 진밭교에서 상황실에서 현수막 스피커 등을 내려 놓고 김천구미역으로 갔다. 장선우가 7시48분 차로 예약해 놓았다. 김천구미역에서 원불교 교무와 작별을 하였다. 우리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그는 사드반대투쟁이 일상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신시가지 티가 나는 곳에서 순대국집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장선우의 말로는 여기가 개발되기 전부터 이 집은 있었다고 한다. 

  올라갈 때는 승객이 절반 정도밖에 없었다. 장선우가 창 측으로 두 자리를 예약해 놓았다. 이 열차는 올라갈 때와는 달리 한 쪽 방향으로만 객석이 놓여 있었다. 1시간 좀 넘게 가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혼자 앉으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니터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최순실이 대법원에서 징역 18년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국민 대다수는 적폐가 청산되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순실이 결정했다는 말이 떠돌던 사드 배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던 할매의 말, ‘사드 가고 평화 오라’의 가사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역사를 좀더 긴 호흡으로 보면 지금의 시련도 분명히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노래의 가사대로 ‘세계 평화의 길’로 갈 것이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신돌석씨는 그 길에서 오늘도 조금의 기여라도 했다는 자부심을 억지로라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밤을 가로질러 달리는 열차의 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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