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이유 
 - 릴케                                        

 아! 우리는 세월을 헤아려 여기저기에
 단락을 만들고, 중지하고, 또 시작하고
 그리고 두 사이에서 어물거리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친한 관계에 있고, 태어나고, 자라고
 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그저 존재하면 되는 겁니다.
 다만, 단순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말이요.

 마치도 대지가 사계절의 돌아감에 동의하면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공간 속에 푹 파묻혀서
 하늘의 별들이 편안하게 위치하는
 그 숱한 인력의 그물 속에 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이......


 코로나 19로 시간이 많다보니 ‘고독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새벽에 요가를 하고 늦은 아침을 먹고 산에 오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쉰다. 깜박 잠이 들 때까지. 삼라만상이 환(幻)에 든다. 내 모든 이름들이 사라지고 나는 카오스. 정신이 번쩍 들며 하늘과 땅이 새로이 태어난다. 

 나는 이 순간이 좋다. 내 이름들이 사라지는 찰나, 진정한 나다. 말갛게 다시 태어나는 나. 다시 내 이름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은 누추해진다. 하지만 나는 부활한 자. 기존의 세상과 새로운 세상의 경계에 아스라이 서 있다.   

 언제라도 다른 무언가로 변신할 수 있는 나. 

 ‘요즘 사람들’은 ‘SNS를 끼고 살고 먹방을 보며 먹고 공부방을 보며 공부하는, 각자의 방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한다.
 
 늘 트위트를 해야 한단다. 트위트는 ‘새가 재잘거린다’는 뜻이란다. 새들은 쉼 없이 재잘거려 스스로를 무리 속에서 이탈하지 않게 한단다. 

 이제 인간이 새로 퇴화했나 보다. 무리 속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늘 재잘거리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새가 아니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며 생각하는 존재로 변신했다. 

 그래서 인간은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에서 고요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 인류가 꿈꾸는 이상사회다. 

 늘 무리 속에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은 위험하다. 민주사회의 적이다. 그들이 많으면 사회는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이행하게 된다.  

 예전에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개인을 압살했는데,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을 자발적으로 무리 속에 있게 기술의 이름으로 길들였다. 길들여진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 오로지 일하고 소비하는 것만이 삶의 지고의 목적이 되었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말한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왜 존재할까? 릴케는 답한다.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모두가 친한 관계에 있고, 태어나고, 자라고/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우리는 결국 그저 존재하면 되는 겁니다./다만, 단순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말이요.’

 그런데 우리는 ‘아! 우리는 세월을 헤아려 여기저기에/단락을 만들고, 중지하고, 또 시작하고/그리고 두 사이에서 어물거리고 있소.’

 우리는 삼라만상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세상은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데, 인간이 자신의 기준으로 분류하고 나눈다. 기준의 바깥에 있는 것들은 ‘악의 축’으로 간주해 압살하려 한다.  

 우리는 자신의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마치도 대지가 사계절의 돌아감에 동의하면서/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공간 속에 푹 파묻혀서/하늘의 별들이 편안하게 위치하는/그 숱한 인력의 그물 속에 쉬는 것 밖에는/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이......’

 우주의 삶에 동참해야 한다. 삼라만상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의 충만을 느낄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19’는 이렇게 만들어 가야 한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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