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봄눈 

 - 유희윤

 “금방 가야 할 걸
뭐하러 내려왔니?”

 엄마는

 시골에 홀로 계신
외할머니의 봄눈입니다.

 눈물 글썽한 봄눈입니다. 


 내가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읍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저녁 무렵에 외할머니가 오셨다. 백발의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으신 외할머니. 옛 사진처럼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무슨 얘기를 밤이 깊도록 하셨다. 나는 자장가처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갈까봐 서둘러 가문끼리 결혼을 시키셨다고 한다. 

 시골에서는 외가가 ‘명문가’라 엄마는 ‘명문가’에 시집을 가셨는데, 부잣집이었지만 남편이 바보였다고 한다. 엄마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친척집으로 도망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며 엄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지내다 산판일로 외지를 떠돌던 아버지를 만났다고 한다. 

 가부장의 체제, 문화 아래서 폭압적인 일제강점기기를 외할머니와 엄마는 ‘모녀의 인연’으로 견뎌내셨을 것이다. 
    
 ‘“금방 가야 할 걸/뭐하러 내려왔니?”//엄마는//시골에 홀로 계신/외할머니의 봄눈입니다.//눈물 글썽한 봄눈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우는 말한다. “길들여질 때 관계가 생겨나고 우리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사실 삼라만상은 인연의 그물망이 아닌가? 그래서 만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지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산다. 그래서 삼라만상은 늘 눈부시게 빛난다. 

 원시인들은 전쟁을 하다 포로를 잡으면 그를 양자로 삼는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줘도 그를 한평생 책임진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은 얼마나 끔찍한가! 모든 관계를 이익의 교환으로 보는 문명인의 사유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나는 엄마를 따라 외가로 갔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깊은 푸른 물에는 온갖 물고기와 자라들이 헤엄쳐 다녔다. 

 배에서 내려 산 하나를 넘어 가자 어렴풋이 외가가 보였다. 엄마는 혼잣말을 중얼거리셨다. “어매가 죽었을 리가 없어. 어매가 죽었을 리가 없어.”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외가는 굵은 새끼줄로 치렁치렁 상가가 되어있었다. 엄마는 쓰러져 주저앉으며 “어매... 어매... .”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길고 긴 ‘인연’은 끝이 났다. 엄마는 힘들 때마다 외할머니를 생각하셨을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가셨을 것이다.

 오래 전 고향에 갔을 때, 엄마는 마당에서 먼 하늘을 보고 계셨다. “엄마 뭐해?” “그냥...... .” 살아생전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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