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국경을 맞댄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의 여파

만주사변·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관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군)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면,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으로 대표되는 항일무장무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중국 충칭과 옌안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조선인들이 그곳 소식을 전해듣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가 그 지역의 정세는 바로 조선의 치안상황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국내 신문들에도 국경의 치안상황은 바로 보도되었고, 국경을 중심으로 한 만주 등지의 소식은 국내 민중의 입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193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국내에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었다.

변은진의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은 이 시기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비밀결사에서는 거의 ‘신화적’ 존재였다.(주1)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은 많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유독 김일성의 이름이 두드러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국경지대에서 직접 일본 군·경과 전투를 자주 벌여 이름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던 영향이 컸다. 특히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 소식이 알려진 이후 김일성이란 이름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일제 말기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청년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되었다.(주2) 

▲ ‘김일성비단’의 월경 함경북도 삼장면 습격 소식(동아일보, 1940. 5. 18.). ‘보천보 습격사건’(1937.6.4.) 외에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사이에 ’김일성부대‘가 국경을 넘어 들어와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인 사실들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지금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사실을 부정하거나 ‘가짜 김일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김일성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예민한 주제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다루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학계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동북항일연군의 활동과 관련해서 이견이 있는 부분들이 남아 있고 해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 해석을 두고 남북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은 남북이 공동 연구를 통해 논의를 진전시켜 가야 할 부분이다.

한국 사회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다면, 반대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 활동만을 이른바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보고 그 외의 국내외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폄하한 측면이 있었다.

아직도 북한의 공식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간되면서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도 사실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자신을 도와주었던 오동진, 양세봉, 손정도, 현익철 등 국민부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을 비롯해 임시정부, 여운형의 건국동맹이나 이재유 등의 국내 사회주의재건운동 등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총영을 이끌며 무장투쟁을 벌였던 맹장 송암 오동진. 오동진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조선국민회’를 함께 한 동지였고, 길림시절 양세봉, 손정도 등과 함께 김일성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오동진, 손정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과거 종파단체로 규정해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한인사회당이나 상해파·이르쿠츠크파 등 초기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도 그 역사성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그 후의 재건 활동에 대해서도 여전히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지만 당 창건의 합법칙성을 그것대로 인정하고 있다.

자신과 대립하며 ‘종파주의’로 낙인찍혔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지만 종파나 분파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아가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이었던 경성콩그룹의 인물들인 김삼룡과 이현상이 김일성이 이끈 조국광복회의 국내 책임자였던 박달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나 연계를 모색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서에서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던 연안계열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대해서도 일정한 평가를 하고 있다.(주3)

이처럼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항일민족운동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린 것이기는 하지만 ‘수령’이 남기고 간 항일운동에 대한 포용적 시각이나 열린 관점을 북한의 공식 역사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항일투쟁에 대해 새롭게 정리할 수 있는 유연한 상황이 마련된 것은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상황과도 맞물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김일성의 회고록은 “냉전해체 이후 위기 속에서 남긴 ‘마지막 유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주체사관’으로 인해 제약되었던 역사인식”을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세기와 더불어』)은 북한이 향후 변화하는데 있어서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주4)는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동북항일연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회고록과 북한의 공식 연구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다. 여전히 남북 간에 간극은 존재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규명이라는 차원에서는 상당한 접근이 이뤄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접근은 이제는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초기 만주 공산주의운동과 유격대 창건을 주도한 조선인들 

만주에서 일본군과 가장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 1910년 국권을 침탈당한 뒤 애국지사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진공작전을 펴 독립을 실현하고자 했다. 1919년 3.1운동 후 독립투쟁 열기가 고조되자 1920년 독립군들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 공격하는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했고, 그 과정에서 올해 100주년이 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져 일본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독립군에 참패한 일본군은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토벌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독립군은 잡지 못하였고, 그 대신 조선인 사회를 초토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한 경신참변(1920〜21)으로 만주의 조선인 사회가 초토화되었으며,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했던 독립군은 분파들의 군권 분쟁과 러시아 혁명 후 적군·백군의 내전 과정에서 한국독립군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러시아 적위군의 개입으로 자유시 참변(1921.6)이 벌어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일본군은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국경 수비대를 강화하고 동만주(북간도)와 남만주(서간도) 등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영사관경찰서와 분소를 세우는 한편, 동북 군벌 장쭤린(장작림)을 압박해 미쓰야협정(三矢協定, 1925.6)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군에 대한 통제를 공동으로 벌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군과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은 일본군과 중국군벌의 탄압이 강화되고 내부의 노선 갈등과 분파투쟁으로 분열이 심화되면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민족주의계열의 공백을 차고 들어온 것은 사회주의운동이었다. 반일투쟁이 그랬듯이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운동 또한 중국인보다 조선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조선인들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참여와 관심은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해방운동과 밀접한 연관 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 관내에서 이제 막 공산당이 활동을 시작하고 있던 1923년 9월 박윤서와 주청룡 등은 연길현에 있는 동흥중학교를 중심으로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지부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하는 등 동북지역에서 공산주의 사상의 전파는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산하 꼬르뷰로(고려국) 내 조선인 조직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는데, 러시아와 가까웠던 만주에서 공산주의운동이 조선 국내보다도 실질적으로 더 빨리 시작되었던 것이다.

1926년 5월에는 국내 공산당의 해외 파견조직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북만주 영고탑에 조직되면서 만주지역 공산주의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위해 코민테른에 파견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로 온 조봉암이 초대 책임비서, 최원택이 조직부장, 윤자영이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당 외곽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자는 김동명이었다. 

▲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1927.10.)으로 체포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들. 조직부장 최원택(앞줄 오른쪽),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안기성(앞줄 중앙), 동만 선전부장 현칠종(앞줄 왼쪽), 위원 이주화(뒷줄 좌), 김지종(뒷줄 우)(사진=길림신문)

반면 중국공산당의 경우는 1927년 10월에야 ‘중국공산당 만주임시성위원회’가 봉천(심양)에 조직될 정도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비해 상당히 늦었다. 그해 가을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로 ‘중공당 동변도특별위원회’(동만특위)를 조직하고, 1928년 2월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에 중공당 용정촌 지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만주지역 공산주의운동은 조선인들이 주도했고, 특히 동만지역의 경우는 조선인들이 전체 주민의 80%를 넘을 정도로 다수였다. 그 때문에 중공 만주성위는 성립 초기부터 조선인 농민과의 연계 및 토지개혁, 조선공산당과의 조직적 연대 강화 등을 주요 전술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주5)
 

▲ 간도공산당 사건 재판 소식(동아일보, 1928.11.25.)

그런데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제6회 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해소)되면서 만주의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다양한 세력들이 공산당 재건운동을 진행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운동역량의 미숙 등으로 번번히 실패하면서 만주 공산주의자들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만주총국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 상급조직인 조선공산당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코민테른 6회 대회에서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모든 분파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들 속에서 새롭게 당을 건설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의 지도조직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은 ‘일국일당원칙’을 내세우며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중국혁명에 동참할 것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많은 논의를 했으나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부정할 경우 당조직 없이 활동하거나 조선 국내로 들어가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중국공산당 입당은 단지 일국일당 원칙의 고수라는 측면 외에도 다른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만주에도 미치면서 농민의 삶과 생활조건이 파산 상태로 되면서 계급적·민족적 대립이 더욱 격화된 상황이었다.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 농민으로 상징되는 모순관계가 심화하고 있었지만 장쉐량(장학량)으로 대변되는 중국 군벌 체제하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지도력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국내와 마찬가지로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만주에서도 서울상해파, 화요파, ML파 등 파벌 대립을 계속하였고, 대중적 열기를 조직적으로 지도하지 못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고 투쟁 경험이 있으며 동만지역의 경우처럼 조선인 대중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는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을 중국공산당에 끌어들여 투쟁 역량를 확대할 필요성이 있었다. 1931년 9.18만주사변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1927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만주 목전공작계획 결의안」을 통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조선인 농민과 연계 및 토지소유권 부여, 조선공산당 만주조직과의 연대 강화 등을 지시함으로써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을 목전에 두고 있고 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의 투쟁의지가 고조되고 있던 1930년부터 중공당 만주성위는 조중 양민족의 공동투쟁과 일국일당원칙을 내세워 조선공산당 만주지부 조직과 그 구성원들을 본격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공당은 ‘간도 5.30폭동’과 같은 대중봉기 전술을 구사해 조선인들의 충성도를 확인하고자 했고,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중공당에 가입하면서 중공당 만주성위의 세력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1930년 ‘간도 5.30폭동’을 전후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해체되었고,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개별적으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심사를 거쳐 입당하기 시작했다. 입당 과정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충성도를 보여주기 위한 급진적 투쟁으로 적지 않은 희생과 피해를 입었으나 중공당 만주조직은 크게 확대되었다.

만주성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공산당원이 중공당에 가입하기 전 만주지역 중공당원은 100여명에 불과했으나 조공당원이 가입하면서 2,000여 명으로 증가했고, 지방조직 또한 12개에서 55개로 확대되었는데 당원의 85%가 조선인이었다.

9.18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부터 1933년까지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에 입당한 조선인들의 주도 아래 연길·화룡·왕청·훈춘의 연변 4개현에서 항일유격대가 창설되었다. 이후 연변지역에서는 소비에트와 인민정부, 항일유격대가 당·정·군의 형식으로 정립하며 동만주 중국 공산당의 무장투쟁을 주도했다.

동만주뿐만 아니라 서간도로 불리던 남만주에서도 조선인 이홍광이 이끄는 적위대를 기반으로 유격대를 창건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가, 이듬해 3월에는 2군 독립사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와 함께 북만주와 길림동부(길동)지역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반일무장조직들도 통합하여 1936년 초부터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조직되어 활동하게 되었다.(주6)

▲ <지도> 중국공산당의 만주조직과 유격대 창건 상황(1931-35)(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335쪽)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민생단 사건의 비극

아무리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도 만주는 엄연히 중국 땅이었다. 오랫동안 역사적 관계를 맺어 왔고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해도 만주는 중국이 통치하고 있었던 동만주를 제외하고는 중국 한족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은 일제가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뒤를 따라 들어와 중국의 주권에 간섭하고 결국에는 침략, 영토를 장악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이 일찍부터 일본과 맞서 독립투쟁을 벌여왔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상황에서 공동의 적인 일본에 대항하여 힘을 합쳐 싸워야 할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지주·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국국민당이나 군벌정권, 그리고 그와 연계된 구국군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었지만, 피지배계급의 해방과 반제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의 입장은 확실히 조선인민, 조선인공산주의자와의 연대가 중요하였다.

어쨌든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대거 입당함으로써 조선인과 중국인의 공동투쟁이 조직적인 차원에서 가능해졌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공동투쟁이 아니라 조선인혁명가들이 중국공산당의 조직원이 되어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가장 일차적인 목표는 중국혁명, 즉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고 반동군벌과 반동지주·자본가를 타도하는 반제반봉건혁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중국 땅에서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활동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해방, 조국의 독립이라는 과제를 포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들과 중국인의 공동투쟁, 연대와 합작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국제주의가 관철되는 공산당이라고 해도 민족적인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흔히 북간도로 불리는 동만주의 경우, 주민구성도 그렇고 공산당원과 간부, 유격대와 근거지(소비에트)의 주요 간부들이 대부분 조선인이었고, 또한 이들의 머릿속에는 조선의 독립과 해방이 주된 과제로 자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간도지방 공산당원 중에는 과거 독립군 등 민족주의운동을 하다가 사상적 진화를 거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공산당의 여러 파벌들 가운데서도 서울상해파나 ML파의 경우는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중국혁명을 목표로 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한족 간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의 과거행적이나 사상적 토대가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물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들이 드러내놓고 중국혁명을 부정하거나 조선혁명을 일차적인 과제로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중국혁명과 동시에 조선혁명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갖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활동 과정에서 은연중에 이러한 사고의 편린들이 드러날 수도 있고, 조선인과 한족간부들 사이의 민족적 갈등도 생겨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문제들이 평소에는 다소 갈등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과 유격대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그 위기를 불러온 ‘반혁명’ 요인, ‘반동’적 요소로 낙인찍히면 심각한 사태가 생겨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민생단 사건’이라는 비극이었던 것이다.

민생단 사건이란 1932년 10월경부터 1936년 3월경까지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만주 지역의 항일유격대와 공산당·대중조직, 유격근거지(소비에트·인민권력) 내에 침투한 일제의 앞잡이인 민생단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을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 처형된 사람들은 동만지역 당과 유격대의 최고위급 지도간부에서부터 중간간부와 일반당원, 유격대원, 대중단체 간부와 조직원, 유격근거지의 일반 인민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동만 유격근거지에서 전개된 이러한 비이성적인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으로 최소한 500명에서 많게 2000여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사망했는데, 당시 근거지 주민의 수가 2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며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주7)

민생단 사건으로 동만지역의 항일유격대는 거의 거덜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명균, 김성도, 김일환, 마준, 박길, 박동근, 박두남, 송일(이송일), 양성룡, 이상묵, 이용국, 주진 등 조선인으로 유격대의 최고위급 군사 지휘관과 정치위원급 인물들이 민생단 투쟁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희생되었다. 

이들은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거나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해 일본군으로 넘어가 변절했거나 또는 유격근거지를 탈출한 뒤 다른 곳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다 처형되었다. 동만 지역에서 초창기 당과 유격대 건설에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이 대부분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과 대중조직이 와해되고 인민들이 유격 근거지를 이탈하는 등 동만 지역은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주8)

▲ 민생단 관련 북한 사진 자료(사진=인터넷)

이 과정에서 당시 동만지역 4개 유격대(왕청·훈춘·연길·화룡)의 중 하나였던 왕청유격대 정치위원으로 있었던 김일성도 한때 민생단으로 몰려 정치위원에서 해임되고 감금되어 처형될 뻔하였다. 김일성이 민생단으로 몰릴 수 있는 요인은 충분히 있었다. 민족주의단체인 국민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였고 그와 함께 국민부 좌파로 활동했던 최창걸, 차광수, 이종걸 등은 1930년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입당하지 않고 독자세력을 유지하였다. 

김일성은 1931년 말에서 1932년 초 사이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지만 처음 중국 구국군 우이청(吳義成)부대 소속의 우사령(주9)의 별동대로 활동하면서 양세봉의 조선혁명군과의 연합을 모색하는 등 민족주의적 지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주10) 

 그러나 한편, 김일성의 경우 구국군과의 관계가 좋았고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길림의 명문 육문중학교를 다녀 중국인 간부 중에 동창생이나 일찍부터 관계를 맺어 아는 이들이 많았던 점 등 유리한 면도 있었다. 또한 김일성은 화요파나 ML파, 서울상해파 등의 조선공산당 파벌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고, 유격대 활동 과정에서 관계를 맺은 중국인 간부 왕룬청(王潤成)과 길동지역 당·군 책임자 저우바오중(周保中) 등의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었고, 그가 그 광풍에서 살아남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민생단 사건의 최고 책임자였던 중공당 동만특위 책임자였던 동쟝롱(童長榮), 쭝지윤(鐘子雲), 웨이쩡민(魏拯民) 아래서 민생단 사건을 주도했던 조선인 간부들인 김성도, 이상묵, 김권일, 이송일 등은 김일성을 제거하려 했지만 김일성은 살아남았고 반대로 이들은 모두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고 말았다.(주11)

▲ 민생단 사건을 다룬 소설 『밤은 노래한다』(사진=알라딘)

 

민생단 사건의 상흔이 북한체제에 남긴 그림자

민생단 사건은 동만지역 항일투쟁 역량을 거의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동만지역의 거의 모든 혁명가들과 대중단체 활동가, 인민들이 민생단으로 몰릴까 전전긍긍하였고, 노련한 경험을 갖고 있던 동만지역 지도간부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조직이 파괴되었다. 

동북지역(만주)을 남만과 북만, 동만, 그리고 길동으로 구분할 때 가장 강력한 투쟁역량을 확보하고 있었던 동만지역을 기반으로 한 동북인민혁명군 2군 독립사를 조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당조직을 개편할 때도 동만성위는 독자적으로 조직하기 어려워 남만성위에 포함되었고 유격대 내의 소위원회를 꾸리는데 그쳤다.

그러나 민생단 사건 이후 중국공산당은 심각한 오류를 인정하고 노선 전환을 통해 조중 연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고, 이러한 방향 전환에 기초하여 조중인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민생단 사건의 후유증을 극복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생단 사건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 

민생단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90여년에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현재의 북한과 중국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김일성은 그 후 북한으로 돌아와 북한 정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민생단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거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김일성과 함께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북한으로 돌아와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 김일성이 민생단 사건 관련자들의 기록을 불태우는 북한의 기록화(사진=인터넷)

그런데 김일성과 그의 대원들은 북한을 이끄는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 민생단 사건의 상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동만지역에서 활동했던 거의 모든 유격대 출신의 사람들이 민생단을 언급하였을 만큼 이 사건의 상처는 깊었다.(주12)

 그들의 상처는 그냥 아물지 않고 북한이라는 체제의 성격과 운영 방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김일성(북한 정권)의 민족 자주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결코 이 민생단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일성을 정점으로 항일빨치산 출신들은 이북의 지도세력을 형성했다. 해방 후 이북으로 살아 돌아온 유격대원들의 숫자는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민생단 사건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은 이북의 정치문화의 기본방향을 규정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민생단 사건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조선혁명의 독자성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하여 훗날 이북에서 주체사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체사상이나 주체노선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여러 경험, 특히 민생단 사건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가 왜 그토록 민족 자주성이란 문제에 집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주13)

한홍구는 “민생단 사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도자와 추종자 간의 특수한 인간관계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이북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의 원천이 되었지만, 뒷날 세습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수령 중심의 사회주의를 낳음으로써 민생단 사건의 광기가 남긴 길고도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북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민족적 갈등의 가능성을 벗어났지만, 정권 자체가 처한 열악한 환경은 극심한 혼돈 속에서 민생단 사건의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간 간도의 근거지 지도부가 처한 환경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포위된 근거지 특유의 농성심리 속에서 이북은 민생단 사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도자와 대중의 특수한 인간관계가 가족국가라는 기이한 형태를 낳는 퇴행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백두산을 찾아 모닥불을 쬐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사진=일본 NHK방송 캡쳐)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은 여전히 북한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

2011년 이후 북한 사회를 이끌고 있는 김정은 시대는 과거 김일성·김정일 시대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고, 북한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은 항일빨치산 시기의 유격대 경험과 그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 북한은 아직도 체제의 유지와 운영의 기본 골격을 항일투쟁의 혁명전통, 특히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심단결해야 한다’는 사상에서 찾고 있는데, 그러한 혁명전통의 어두운 그림자의 한 부분이 바로 이 민생단의 상흔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과거 “간도의 궁벽한 산골에서 일어난 민생단 사건은 아직까지도 이북 사회에 끈질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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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자세한 내용은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선인, 2013), 5장 3절을 참조할 수 있다.

2) 변은진,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한국인물연구 21(한국인물사연구회), 2014.3,
 
3) 예대열, 『세기와 더불어』에 서술된 북한 민족해방운동사 인식의 변화상과 함의, 한국근현대사학회 55, 2010, 252〜262쪽 참조

4) 예대열, 위의 글, 238쪽

5)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45〜246쪽 참조

6) 장세윤, 위의 책, 246〜247쪽 참조

7) 민생단 사건에 대한 연구로는 한홍구, 「민생단 사건의 비교사적 연구」, 『한국문화』, 2000; 한홍구, 「만주의 한국민족해방운동과 중국공산당-민생단사건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7(2001); 한홍구, 「남의 땅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어려움」, 『역사비평』, 1999.11;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김성호, 「민생단사건과 만주 조선인 빨치산들」, 역사비평, 2000. 5; 권립·김성호, 「연변지역 조선민족 항일혁명투쟁의 특수성 연구(1)-연변지역사회의 특수성과 조선인문제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제100집(2002.12), ; 김성호, 「연변지역 조선민족 항일혁명투쟁의 특수성 연구(2)-1930년대 ‘민생단사건’의 일부 문제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제100집(2002.12); 김성호, 『1930년대 연변 민생단사건 연구』, 백산자료원, 1999; 김성호, 『민생단사건 연구』, 인하대 박사학위논문, 1998.8; 이덕일, 「민생단 사건이 동북항일연군 2군에 미친 영향」, 『한국사연구』, 91. 1995. 12; HongKoo Han, “Wounded Nationalism: The Minsaengdan Incident and Klm Il Sung in Eastwrn Manchuria.” 1999년, 미국 워싱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홍구, 「만보산 사건과 중국인의 조선인식」, 『한국사연구』 156(2012. 3) 등이 있다. 또 민생단을 소재로 한 소설로 『밤은 노래한다』(김연수, 문학과지성사, 2008)가 있다.
 
8)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397〜404쪽; 한홍구, 민생단 사건의 비교사적 연구, 『한국문화』 25권(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2000), 217〜230쪽 참조

9)  중국 조선족 작가 유순호에 따르면 동북군 제13혼성여단 산하 제9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장이었던 우명진(于明辰 또는 于學堂)이라고 한다.(주성하,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안도유격대의 진실”, 동아일보, 2017.7.28.)

10)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3』;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91〜94쪽 참조

11)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01〜123쪽; 유순호, 『김일성평전(상)』, 지원출판사, 2017, 373〜664쪽 참조

12)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와 북한의 당·정·군에서 활약한 항일빨치산 출신은 100여명 내외이다. 이 가운데 김일성과 그의 부인이 된 김정숙을 비롯하여 최현, 오백룡, 오진우, 유경수, 김일, 김경석, 임춘추, 박성철, 최춘국, 이봉수, 이오송, 주도일, 박영순, 백학림, 최광, 이을설 등이 민생단 사건의 체험을 겪고 북한 정권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13) ” 한홍구, 「민생단 사건의 비교사적 연구」,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문화』, 2000, 228쪽

14) 한홍구, 위의 글,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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