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공동선언 20주년을 맞은 올해, 느닷없이 김정은 위원장의 신병을 둘러싼 온갖 억측과 소문이 무성하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모습인데, 지난주만 하더라도 김 위원장은 ‘매우 위중’에서 ‘식물인간’으로 갔다가, 급기야 ‘사망’한 바 있다. 물론 이제 다시 그가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오보에 대해 사과할 언론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이젠 별 기대도 없다.

하필 6·15 20주년을 맞은 올해, 게다가 여당이 총선에서 예상외로(주제넘게) 압승을 거두고 난 직후에, 이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소설’이 다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온갖 세상의 음모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 사태를 굳이 거대한 어둠의 집단이 만들어낸 국제적 음모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시 한 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리고 남북관계가, 참 별 볼일 없구나, 한심하게 느꼈을 뿐이다.

너도 나도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이야기한다. 각자도생의 살벌한 ‘성벽국가’를 이야기하고,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이나, 보호무역주의, 배타주의 등 어두운 미래를 말한다. 한 편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G20의 공동대응을 사례로 들며 더욱 강력한 국제공조와 인류공동체를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제사회의 공동대응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국제’ 공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이 우리는 조금 얼떨떨한 상황에 와 있는 것 같다. 이른 바 ‘K-방역모델’이라 불리는 우리의 코로나19 대응 방역 모델이 전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되자, 곧 이어 영웅 만들기와 자화자찬이 난무한다. 그 사이 숨져간 230명이 넘는 이들에 대한 애도와 성찰, 반성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의료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그야말로 ‘갈아가며’ 가까스로 코로나 펜데믹을 막고 있는 지금, 애도와 반성의 자리에 떡하니 들어앉은 온갖 찬사와 국뽕 메들리는 내 열손가락을 실종케 한다. 서로에 대한 격려와 찬사,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자칫 너무 지나쳐,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이들의 절망과 죽음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제일 두렵다.

세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희박하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고통이 덜하도록, 최대한 많은 이들이 덜 고통스럽도록 노력하는 것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결국 공생과 연대의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거기서 하나하나 끈들이 떨어져 나간다면, 결국 공멸이다.

애써 외면했던, 아니 존재마저 잊고 있었던 폐쇄병동 환자,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비정규직 문화예술 노동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인빈곤층, 노숙인들은 코로나에 특히 취약하고, 이어지는 경제적 재난에 가장 먼저 노출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코로나는 그동안 우리가 평소 이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총선에서 참패한 야당은 마치 그 화풀이라도 하듯, 자신들이 한 말도 뒤집어가며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국민들 앞에서, 적자 국채 발행 불가 등등의 이유를 들이대며 반대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삶의 마지막 희망마저 놓아버리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과연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정당은, 관료조직은, 국가는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그때 가서 국가 재정이 적자가 아니라고 자랑질 할 텐가? 당연히 자신들의 삶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는 이들이, 당장의 삶이 위태로운 국민들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있다.

언제나 변함없이, 참 일관적으로 재미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재시동을 걸어야 할 판에, 우리 언론들은 외신 핑계 줄기차게 대며 상대 지도자의 건강 이상을 간절히 기원하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리고 국민의 지지와 세금으로 먹고 사는 정치인과 관료들은 오히려 약자에 대한 책임보다는, 코로나로 인해 생각지 못하게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특수’를 기대하며, 역시나 돈벌이나 밥그릇 챙기기에 골몰한다.

너무 비약하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가 비단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지금 국민들은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는데, 마치 그들은 열외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나스 마사모토 지음 / 이경옥 옮김,『우리는 바다로』, 보림, 2018.9. 원제 : ぼくらは海へ(1980).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 이야기를 해보자. 무려 40년 전 발간된 책이지만, 전혀 어색하거나 촌스럽지 않다. 주인공 아이들의 이름을 우리식으로 바꿔놓아도 눈치 챌 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개발이 멈춰진 해안가 지역에 살고 있는 6학년 초등학생들, 저마다의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쳇바퀴 돌 듯 집과 학교, 학원을 오가는 생활은 똑같다. 그마저 돈이 없는 아이는 학원 패거리에서 소외되지만.

저 마다의 이유로 상처 받은 아이들을 공감해주거나 위로를 건네는 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원 역시 마찬가지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고 사고하길 강요할 뿐이다. 겉보기엔 성적이 우수한 ‘범생’이지만 가식으로 가득 찬 부모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그 무언가를 안고 있는 구니토시, 오직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홀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엄마의 뜻대로만 살아온 자신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 사토시, 아버지의 반복되는 전근으로 한 곳에 깊이 정을 주지 못하고 친구와의 관계도 늘 가볍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사무, 돈이 없는 대신, 일류학원에 못 가는 대신 온갖 잡일과 심부름을 해주는 것으로 패거리에 간신히 낄 수 있는 시로, 그리고 자신은 무조건 조직의 리더가 되어야 하고, 그 집단은 안정과 질서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야스히코까지, 각자 다른 환경과 성격을 지닌 아이들이 우연히 공사가 멈춘 해안가 매립지에서 배를 만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아이들은 배를 무사히 만들어 어딘지 모르는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날 수 있을까.

책은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아울러 청소년을 위한 작품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성인들이 먼저 읽어봐야 할 성싶다. 아이들이 내면의 성장통을 겪으며 방황하다 결국 어떠한 과정을 거쳐 더욱 성숙해져, 기존 시스템에 편입되는 빤한 스토리에서 벗어나, 애초 뒤틀리고 부조리한 기성세대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아이들의 느닷없는 일탈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치 기성 사회를 축소시켜 놓은 것만 같은 아이들의 패거리에서 제일 약한 고리가 떨어져 나가자 어떤 일들이 각자에게 벌어지는지 실감하게 그려내고 있다. 빤한 결말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의외에 결말에 당혹해할지도 모르겠다.

결말 부분, 두 아이의 일탈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성세대의 거짓과 위선에 질려버린 아이들의 저항일 것이다. 기존의 편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 위험하고 그 끝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감행하는 일탈. 아이들은 과연 어떠한 것을 찾았을까.

어느 새 적지 않은 나이를 먹다보니, 스스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이렇게 빨리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남은 삶은 얼마나 더 빨리 갈 것인가.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세월의 속도만큼 성장하고, 또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남겨질 이들을 위한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난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

이런 생각이 이어진다면,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나,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따위의 표현들이 사악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때가 묻으면 묻을수록, 젊음에 대한 포용과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사라진다. 오히려 이유 없는 반감과 회의, 거부감이 터지도록 차오른다.

‘유리 멘탈’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다. 멘탈이 매우 매우 저렴한 게 사실이니까. 쉽게 상처받고 쉽게 무너진다. 이젠 덤덤하고 담담하다. 당연히 크게 부끄럽지도 않다. 다 알아서 생긴 대로 사는 거다.

때문에 최대한 덜 가식적으로 살고 싶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솔직하게, 그리고 나답게, 또 그리고 가급적 착하게 살고 싶다.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 어이쿠야, 생각해보니 그게 원래 내 모습이었구나. 난 늘 자그마한 뗏목을 타고 저 바다로 나가, 갖은 개고생을 하다 구사일생으로 해안가에 닿고는 했구나. 그런 네 녀석이 언제부터 건방지게 호화 요트를 꿈꾸고 크루즈를 상상했단 말이냐. 괜히 코로나나 걸리게.

고로 고로, 생뚱맞게도 난 40년 전 일본 작가의 조금은 색다른 성장소설을 읽으며, 뜻하지 않게, 다시 한 번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급적 우리 사회에, 그리고 남북관계에 있어, 가장 약한 고리가 무엇인지 늘 살펴보고, 그곳이 더 단단해 질 수 있도록, 아주 가급적, 노력하며 살자고. 그러다 도저히 안 되면 그냥 배타고 떠나자고. 그러자, 그렇게 살자. 가능할 때까지.

너무나 큰 환희와 감동을 주었던 4·27판문점 선언의 2주년을 기념하며.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제 사토시와 구니토시가 매립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꿈처럼 아름다운 남쪽 섬에 상륙해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모험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 애들이랑 같이 모험을 떠날 수 있었는데.’하고 가슴 아파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본문 296~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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