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고 있고 정치적·사회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또 외래의 문화를 아무 비평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 풍토로 말미암아 문화적 위기를 맞고 있고 물질 위주의 생활관과 현실관으로 인해 정신문화의 타락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것은 오늘날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과제이며, 또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이런 마당에 한국 정신의 뿌리를 캐보는 일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폐쇄를 지향하거나 과장이나 확대해석을 하는 것은 경계를 요한다. 작으면 작은 대로,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그 가치가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하여 오늘의 매듭을 푸는 열쇠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본문 260쪽.

생각해보면 사춘기를 나름 조용하게 보내지 않았나 싶다. 물론 꽤 오래 전이라 그리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질풍노도’ 같은 단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무난하게 그 시절을 보낸 것은 맞는 것 같다.

정작 난 고3과 재수생 시절 더 날뛰었다. 내 생애 그렇게 재미있고, 또 그렇게 많이 사고를 친 시기는 다신 없으리라, 고 믿었다. 헤비메탈 음악에 빠져 학교 수업 대신 딥 퍼플과 메탈리카에게 인생을 배웠고, 숱한 클럽공연을 이어가며 그야말로 락앤롤 정키(Rock N’ Roll Junkie)로 청춘을 보냈다.

당시 함께 밴드를 했던 벗들은 당연하게도, 비록 얼굴을 자주 볼 순 없지만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벗들이라 자부하고, 당시 즐겨 듣던 음악에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크게 음악적(!) 진도가 나아가지도 않았다. 강조하지만, 못한 것이 아니라, 않았다! 정말 즐거운 시절이었고, 또 그리운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제 2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순식간에.

▲ 이이화,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 푸른 역사, 2000.6.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런데, 정말 ‘그런데’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당황스럽게도 마흔 줄에 접어들고도 몇 해가 더 지난 지금, 마치 제2의 사춘기마냥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 무엇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간 것처럼.

이리 저리 흔들리고, 영문도 모른 채 고독에 놀라고, 옛 기억을 붙잡고 궁상을 떨고, 그냥 울어버린다. 당연히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집중도, 애착도, 책임감도 크게 떨어졌다.

난처하고 답답했다. 빤한 주량에서 더 늘어날 것도 없지만, 그 횟수가 늘어가고, 취할 때가 더 많아졌다. 딱히 과거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스스로 더 무력해지고, 약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찾고 싶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잠시 멈춤’ 상태에 접어들면서, 나의 삶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복 역시 잠시 멈춰진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짐짓 모른 척 외면했던 내 안의 응어리가 결국은 터져버린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선배들이 이야기하곤 했던 이른 바 갱년기가 비교적 일찍 찾아온 것일까.

여전히 그 이유는 정확히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 맥이 풀어져버린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감정들이 어느 새 내 안에 바이러스처럼 침투했기 때문이었다. 혐오와 무기력 그리고 패배주의였다.

2018년은 무한한 상상이 가능했던, 희망의 시간이었다. 남북의 정상이 다시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상생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인했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라는 재앙을 만들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

1997년부터 북한학을 공부했고, 변변치 못한 재주를 가지고 지금까지 통일운동이라는, 주목받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어가야 할 길을 걸어온 나에게 2018년은 분명 오래된 희망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희망은 길지 않았다. 2019년 한반도는 다시 얼어붙었다. 더 억울한 것은 그것이 남북의 잘못에 앞서, 국제관계,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영향 탓이었다는 점이었다. 하노이의 아쉬운 북미정상의 만남 이후 남북은 다시 과거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하소연과 욕지거리가 입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지겨웠다. 이 따위 현실이. 그리고 그 순간을 이용해 제 뱃속을 채우는 인간들의 모습이, 분단을 이용해 다시 한 번 권력을 잡아보고자 꿈틀거리는 인간들이 혐오스러웠다. 다 보기 싫었고, 다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 하반기, 준비했던 북측과의 만남이 무산되고, 코로나19가 한반도를 덮쳤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도 죽겠는데, 북을 생각할 겨를 따위가 어디 있냐’고 거품을 물었다. 북 역시 문을 꼭 닫은 채, 우리의 손길을 애써 외면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보수진영의 눈치를 보느라, 다가오는 선거에서 혹시나 표가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며 제 밥통만을 안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2020년이 되고 선거가 다가올수록 혐오감은 커져만 갔다.

결국 (남북관계는) 미국의 손에 달렸다, 미국 대선 이후 상황을 봐야 한다, 문을 닫고 있는 북의 잘못이다, 모든 것은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상 다 소용없다는, 무참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이들이, 전문가라 행세하고 거들먹거렸다.

남북교류협력이나,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수많은 이들을 한 순간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천치’들이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로 매도하는 것도 이젠 지겹기만 했다. 우리 국민들은 남북관계가 잘 풀려나가는 것보다는 집값이 더 중요해 보였고, 종편 가요 쇼에서 어떤 트로트 가수가 우승할지가 더 궁금한 것 같았다.

그 정반대 측면의 혐오감도 커져만 갔다. 소위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들, 통일운동에 오랫동안 깊게 관여해 온 이들, 북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서도 무참한 언사가 나왔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의 폭력이었다. 그들은 대북제재의 틀 속에서 조그만 틈이라도 찾아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즉 금강산 개별관광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웃었다. 또 개성공단에서 마스크를 생산해 남북이 함께 사용하자는, 나아가 세계 다른 국가에게도 전달하자는 주장을 비웃었다.

비웃음의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북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것, 그리고 북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 생각만 한다는 이유였다. 미국의 눈치만 보면서 편법으로 문제를 풀려 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들은 비웃다 못해 분노하기까지 했다. 난 그런 그들의 분노에 다시 분노했다.

오로지 100% 가능성이 있는 것만 주장해서 실행해야 한다면, 이 땅에는 김구도, 김대중도, 문익환도, 장준하도, 윤이상도, 노무현도 그리고 이이화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목숨을 바쳐 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이들은 전부 다 바보천치이고, 한반도 통일을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 역시 헛짓거리를 한 것이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지금까지 걸어온 것 아닌가? 그런데 자기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고, 자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그들의 선의를 비웃고 경멸하는 이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 잘난 통일운동 바닥에서, 아니면 그 잘난 운동권 바닥이나, 노동계 바닥이나, 그 무슨 ‘나와바리’에서 자신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고 싶다는 욕망의 배설과 뭐가 다른가.

물론 나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이들은 전체에서 보자면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헛똑똑이들은 이미 차고 넘치는 이 땅이다. 굳이 더 늘어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보기에 설익고 현실성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면, 진솔한 토론과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대안을 함께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열정과 선의를 우습게 여기며, 냉소와 비관으로 대꾸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이런저런 상황들이, 원체 약해빠진 나를 더욱 더 바보 같이 만들고 말았다. 다 지겨웠고, 다 싫었다. 죄다 잘난 놈들 천지인데, 굳이 나까지 떠들 필요가 뭐 있을까 싶었다. 그냥 닥치고 살자. 저 잘난 놈들이 이 땅을 죄다 말아먹을 때까지. 그냥 그렇게 트럼프를 찬양하고, 미국을 숭배하다 죽으라고 하고 싶었다. 결국 난 혐오와 무기력과 패배주의에 굴복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다 벼락처럼 이이화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첨엔 그저 멍했다가, 나중엔, 또 한 분의 스승이 가셨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런데 별안간 중학교 2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수업 시간 중 우리 근현대사도 자주 이야기하곤 하셨다. 그리고 4·3, 4·19, 5·18 등을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각인시켜주신 분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분이었다.

그 분이 이이화 선생님을 이야기하신 적이 있었다. 나중에라도 이 분의 책을 꼭 찾아 읽어보라는 말씀이었다. 자세한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이이화’라는 이름 석 자는 머릿속에 늘 담겨져 있었다.

다시 선생님의 책을 꺼냈다. 벌써 20년이 지나버린 책이다. 책이 나왔을 때 6·15정상회담이 열렸고, 난 꾀병을 부려 외진으로 나간 국군창동병원에서 남북 정상의 만남을 TV로 볼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책을 읽으며 이이화 선생님의 삶을 돌아봤다.

그가 일생동안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진정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가 남긴 것들을 통해 무엇을 다시금 만들어내야 할까.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자연스레 지금의 나를 돌아봤다. 아주 살짝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 많이 한심했다. 내가 하찮은 존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함부로 좌절해도 될 자격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저 한심할 따름이었다.

여전히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4·15총선 결과에 의아해 하면서도 이것이 향후 남북관계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 내가 거기에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겠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분명 그 이전과 다를 것이다. 이제 달라지는 시대에 걸맞은 남북관계를 구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이화 선생님은 지나간 것을 제대로 알고, 거기에서 교훈을 찾아 다가올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준비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 애써 덜지도 더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들이고, 대신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하찮음의 문제가 아닌 자존심의 문제라는 것, 새삼 다시 깨닫는다. 선생님이 멍청한 내게 남기신 귀한 선물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전혀 하찮은 인간이 아니었다. 20여 년 전 수많은 팬들(!)과 함께 무대를 뒤집었던 락커였고, 지금도 통일운동계에서 적어도 노래로는 ‘Top 20’ 안에는 들 것이라 자신한다(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벗들이 함께 해주고 있고, 사랑해주는 이들도 늘 곁에 있다. 또 아무래도 심각한 척 하는 것보단, 술자리에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어가며 벗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더 편한 녀석이다. 폼 잡는 건 매우 피곤한 일이다.

하루 빨리 심신을 회복하여, 다시금 마냥 대책 없이 들이받는 녀석으로 돌아가야겠다. 한심한 녀석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신 이이화 선생님의 영면을 다시 한 번 기원한다. 선생님의 많은 책들과 가르침은 늘 우리에게 시원한 죽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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