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머리말

영화 ‘기생충’에서 지하(문광이 가족)는 반지하(기택 가족)를 죽이려 하고 반지하는 지상의 박 사장 가족을 몰살한다. 영화에서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와의 전쟁에서와 같은 양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반지하의 기택 가족만 딸을 제외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영화의 담론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반지하의 기택 가족만 살아남게 했을까? 기생충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함께 그 이유를 알아본다.

이 글에서는 기생충, 균, 바이러스란 말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들 모두 숙주와 공생 혹은 기생을 함으로서만 생존가능하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공생과 기생의 관계는 미생물의 세계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 국제 관계와 사회의 질서 구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4.15총선을 눈앞에 두고 ‘위성 정당’ 혹은 ‘기생 정당’의 문제를 놓고 이를 기생충 논리에 비유하여 한 번 진단해 보기로 한다. 특히 최근 정의당이 취하는 태도가 얼마나 기생충의 그것과 같은지 진단해 보기로 한다.   

공생과 기생의 관계 

바이러스는 제 자신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숙주에 기생해서만 생존을 유지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숙주와 공생하면서 기생하는 것이 바이러스의 속성이다. 그런데 공생과 기생의 관계가 확연히 나뉘는 분명한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불분명한 것이 문제이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할미새와 코뿔소의 관계만을 두고 보아도 그렇다. 할미새는 코뿔소 몸에 붙어 있는 진드기를 잡아 먹어주어 코뿔소가 기생충에 감염될 위험을 막아준다. 그런데 할미새가 진드기를 먹잇감으로 좋아 하는 이유는 진드기 안에 있는 피 때문이다. 

그러면 그 피는 어디서 온 것인가, 바로 코뿔소 몸 안에서 온 것이다. 그러면 할미새가 진드기를 좋아 잡아먹는 이유란 다름 아닌 진드기가 먹은 코뿔소의 피 때문이다. 그렇다면 할미새는 코뿔소의 피를 진드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빨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드기는 빨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할미새와 코뿔소는 과연 공생 관계라 할 수 있는가? 진드기와 할미새의 관계는 코뿔소란 집(박 사장)의 지하와 반지하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할미새는 진드기를 잡아먹으면서 진드기가 만들어 놓은 상처를 다시 헤집고 들어가 피를 얻고, 그 상처에 다시 진드기가 꼬이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할미새가 코뿔소의 진드기를 제거해 주기는커녕 자신의 먹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코뿔소를 미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장준호, 기생충, 서울:휴마니타스, 20쪽)

이런 관계는 국제 질서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강대국가들이 약소국가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즉, 안보를 이유로 도와주는 것 같지만 결국 방위비 분담 같은 명목으로 오히려 착취해 간다. 그래서 국제 관계에서도 공생과 기생의 관계는 모호하다 할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적어도 한 종류 이상의 기생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기생충들에는 기생충에 기생하는 기생충들이 또 있다. 그래서 왈도 에머스는 “감히 기생충에 대적하는 신은 없다”고 단언했다. 신도 박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시에 관하여 On Poetry’에서 “벼룩 위에 더 작은 벼룩이 피를 빨고, 이 작은 벼룩을 더 작은 벼룩이 물고 있다네!”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무한대라고 했다. 현대 과학은 이런 구조를 ‘프랙털 fractal’이라고 한다. 마치 고사리 잎을 보면 크고 작은 것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는 모양을 프랙털이라고 한다. 자기 반복을, 다시 말해서 자기 곱하기를 하는 ‘제곱’을 하기 때문에 지하에 반지하에, 반에 반 지하에...,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중충 구조를 만들면서 존재한다.

이러한 공생과 기생의 애매한 관계 구조는 아프리카 사바나에 서식하는 아카시아 나무와 거기에 서식하는 개미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카시아는 스스로 속이 빈 가지를 만들어 거기에 개미가 들어와 살도록 서식처를 만들어 자기의 수액을 개미에게 나누어 준다. 물론 이 수액은 아카시아의 피와 같이 생명유지에 긴요한 요소이다. 개미는 그 대가로 아카시아에 붙어 있는 각종 해충이나 동물들을 쫓아낸다. 

그러나 아카시아의 외부의 기린 같은 초식 동물인 적들이 사라지게 되면 개미는 아카시아에게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즉, 환경 파괴로 아카시아를 먹고 살던 초식 동물들이 사라지면서 아카시아는 스스로 속을 비게 해 수액을 분비할 필요성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 개미는 줄어든 수액을 아카시아로부터 빨아 먹기 위해 아카시아에 상처를 깊이 내서 수액을 섭취해 아카시아를 죽게 한다. 결국 아카시아와 개미는 공생 관계가 아니고 서로가 각각 자기 도생을 하게 되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아카시아는 고사 직전에 처하게 된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관계, 과연 공생인가 기생인가? 정의당은 불과 6석을 가지고 19대 국회에서 120석 이상의 민주당에 기생하면서 국회의 판을 흔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예상치 못했던 미래통합당이란 공동의 적이 만든 위성 정당인 미래한국당이란 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도 ‘더불어 시민당’이란 위성 정당(?)을 만들었다. 

이에 정의당은 이는 선거법 개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극열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절대로 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 정당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한다. 백번 옳은 말이고 정의롭다 할 수 있다. 당명에 충실하고 있어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연일 민주당과 미통당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선거에서 민주당원들을 향해 30:20 비례로 정의당을 지원하라고 한다. 아카시아가 자기 생존을 위해 수액을 분비할 수 없게 되자 개미가 아카시아 나무 깊숙이 파고들어 가면서 공생 관계가 파괴되면서 공생 관계가 무너지는 형국이 지금 총선을 앞두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다.

위의 두 가지 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이기주의’이다. 코뿔소와 할미새의 관계나, 아카시아와 개미의 관계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숙주와 거기에 기생하는 것이 모두 자기 이익 추구를 극대화 하게 되면 결국 공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공생과 기생의 가장 좋은 예로 악어와 악어새의 경우를 이상적인 관계로 손꼽고 있지만, 악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악어새가 귀찮을 때에는 가라고 고개를 흔든다. 이 말은 서로 이익이 될 때에만 공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2019와 정의당2020을 비교해 본다는 것이 정의당에겐 기분 좋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 몇 가지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양자가 일란성 쌍둥이 같이 보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선 지금 아카시아도 개미도 모두 죽어가고 있다. 모두 자기 이익 추구 때문이다. 우리말 ‘나쁜 놈’이라 할 때에 ‘나쁜’이 ‘나뿐’으로 우리 귀에 들려진다. 공생과 기생이 ‘나뿐’이라 할 때에 깨어지고 만다.

20대 국회에서 민주당과 정의당은 공생과 기생 관계를 잘 유지하였다. 그러자 ‘조국 정국’에서 정의당이 먼저 조국 장관을 겨냥해 화살 시위를 당겼다. 정의당이 불과 6석으로 국회 판을 흔드는 맛에 취해 제 분수를 잃은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당 민주당에 기생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간단한 사실을 망각한 처사였다. 

자연의 세계는 공정하다. 아카시아도 기린과 같이 초식 동물이 사라지자 즉,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수액을 분비해 개미를 구태여 살려 먹일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러자 개미는 제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죽자 살자 아카시아의 내부를 더 손상해서라도 수액을 공급받으려 하다 보니 숙주도 거기에 기생하던 것도 다 죽게 되었다.

4.15총선에서 민주당과 정의당이 지금과 같은 태도와 입장을 취한다면 공멸하고 말 것이다. 현장 선거에서 양당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할 진데 공멸할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지금 촛불 민심은 코로나19보다 4.15총선 패배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 

정의당 지지율이 지금 4%를 겨우 유지하고 있으며 정의당을 지지하던 민주당원들이 속속 이탈하고 있다. 양당은 서로 공생하는 길만이 촛불민심이다. 심상정 대표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마디에 국민들은 간을 숨죽어 가며 듣고 있다. 

정의당은 ‘정의’라는 말부터 가려야 한다. 동양의 고전 ‘주역’에 보면 오직 없는 말이 있는 데 그것이 ‘정의’나 ‘선악’과 같은 말들이다. ‘정의’에 대해 ‘불의’가 있게 되고 ‘선’에 대해 ‘악’이란 이분법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이나 우주 질서마저도 이런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회찬 의원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는가? 누가 그를 죽였는가? 답은 ‘정의당’ 자체가 노회찬을 죽였다고 보아야 한다. 노회찬이 받았다는 돈은 말 그대로 새 발의 피와 같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정의’라는 원칙에 어긋나고 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회찬은 자기가 속한 당의 이름에 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저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그리고 미통당을 보라. 수백 배의 돈을 착복하고도 누구 하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자기들의 정체성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부패가 정체성일진데 부패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는 자기의 가치 때문에, 아니 정체성 때문에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는 물론 정의正義를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대의大義라고 한다. 민주당이 비례 정당을 만드는 것이 정의당이 말한 대로 정의롭지 못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정의 앞에서만 목숨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다. 

전봉준이 마지막 한 말을 상기하자. 역사의 ‘대의,’ 동학은 실패했지만 그 대의가 패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동학은 수많은 농민들을 희생시킨 정의롭지 못한 선택일 수 있지만, 전봉준은 정의보다는 대의를 선택했던 것이다. 영화 ‘기생충’ 역시 대의를 선택한 반지하의 기택 가족만 살아남는다는 교훈을 우리한테 던지고 있지 않는가.

정의당 심상정 대표에게 간곡히 권한다. 물론 정의로워야 하지만 대의 앞에 정의를 양보하시라고. 코로나바이러스는 자기 이익을 위해 숙주인 인간의 몸에서 자양분을 섭취해 ‘나뿐이면’ 된다고 숙주의 온 몸에 한없이 퍼져 나가는 것 같지만 숙주인 인간의 몸이 죽을 땐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죽고 만다. 

코로나바이러스19는 이 사실을 모르고 한 없이 인간 몸을 공격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결국 스스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미 중국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이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다. 아카시아를 죽이면 개미도 죽고, 코뿔소가 죽으면 할미새도 죽는다.

민주당이 죽으면 정의당도 죽는다. ‘정의’라는 옥쇄를 가슴에 품고 하늘위로 날려고 하는가? 4.15총선에서 여당인 민주당도 죽고 정의당도 죽는 날 촛불은 영원히 꺼지고 말 것이다. 이 공포가 코로나 공포보다 더 두렵게 느껴지고 있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모두 우리 촛불 시민들이 이런 이중 공포 속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아래 그림을 잠깐 들여다보기 바란다.

              ‘민주당’   ‘정의당’
              ‘코뿔소’   ‘할미새’
           ‘아카시아’   ‘개미’

“너를 죽인다가 나를 죽인다”                                          

위의 두 사람을 코뿔소와 할미새, 아카시아와 개미, 아니 민주당과 정의당의 관계라 해도 좋다. 눈앞에 있는 밥그릇을 독차지하겠다고 상대방을 죽이려 밧줄을 놓게 되면, 곧 그것은 죽은 상대방의 밧줄 역시 저절로 놓여, 서로 다 죽고 말 것이다. 이 그림은 논리학자들이 ‘역설’이란 논리 교육을 시키기 위해 좀 극단적인 사례를 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지금 정치에도 자연환경에도 그대로 적중한다. 

“너를 죽인다가 나를 죽인다”란 역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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