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체불명의 슬픔을 표본하다 
 - 이경임

 나비 한 마리가 내게로 날아온다
 어지럽다, 멀미가 난다,
 울컥 토할 것만 같다
 나비가 창틀에 앉는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나비의 한쪽 날개를 잡는다
 나비의 다른 쪽 날개가
 허공에서 파르르 떤다
 나비의 몸에서 꽃가루들이 흩날린다
 나비의 두 날개를 포개어 잡는다
 위태롭던 한 마리의 정적이 고요해진다

 고요해진 슬픔의 뇌수에
 나는 포르말린을 주사한다
 한 마리의 슬픔을
 투명한 시간의 벽에 꽂는다

 오! 팽창하는 표본실의 삶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아다녔다. 꿈을 깨니 인간이었다. ‘어느 게 진짜 나인가?’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화들짝 깨달았다. ‘나는 나비도 되고 인간도 되는구나!’ 

 우리는 더 이상 ‘나비 꿈’을 꾸지 않는다. 이상 시인은 ‘겨드랑이가 가렵다’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날개를 잃어버렸다. 꼬물꼬물 애벌레로 살아간다.  

 나비가 날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나비 한 마리가 내게로 날아온다/어지럽다, 멀미가 난다,/울컥 토할 것만 같다’

 우리는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다. 

 ‘나비가 창틀에 앉는다/나는 숨을 죽이고/나비의 한쪽 날개를 잡는다/나비의 다른 쪽 날개가/허공에서 파르르 떤다/-/나비의 두 날개를 포개어 잡는다/-//고요해진 슬픔의 뇌수에/나는 포르말린을 주사한다’ 

결국엔 나비를 박제화 시키고 애벌레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한 마리의 슬픔을/투명한 시간의 벽에 꽂는다//오! 팽창하는 표본실의 삶’ 

 ‘정체불명의 슬픔을 표본하고’ 사는 애벌레의 삶. 말초적 쾌락 덩어리. 권태와 우울의 헛된 몸짓들. 

 우리는 빨리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막상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어떨까? 

 간절히 바라던 그 일상은 우리 눈에 어떻게 비칠까?

 프랑스 68혁명의 중심에 섰던 철학자 라울 바네겜은 ‘일상생활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권태’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인간을 ‘수동적인 소비자’로 추락시키는 체제다. 따라서 소비가 삶의 최고의 목표가 된 인간은 결국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혁명을 통해 일상생활의 열정과 창조적인 삶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쟁취해야하는 새로운 삶의 지침을 제시했다.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을 것은 권태뿐이다!”

 지금도 68혁명의 정신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TV를 켜면 감염병 전문가들이 나와 현 상황을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희망을 보여준다. 

 일상생활의 권태에 지쳐있던 화가 고갱은 어느 날 가출을 감행한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원시의 섬 타히티에 가서야 비로소 깊은 안식을 찾는다. 

 자본주의는 이익이 되는 곳이라면 지옥의 끝이라도 간다. 고갱의 영혼의 고향 타히티의 봉인까지 풀어버렸다. 

 태곳적부터 평화롭게 잠자던 바이러스들이 인간 세상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타히티를 봉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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