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

 

차라리 공산지역으로 추방해 달라

=소련으로 간 항일투사 유족의 호소=

 

여기에 나는 먼저 일제시대로 부터 해방후 군정시대를 걸쳐 한민당과 자유당 시대를 통한 삼십수년동안의 쓰라린 고애와 박해상을 천하에 밝힌다.

나는 당년 35세로서 김형두의 장자(독자)로 태어났다. 부 김형두(당? 6세)는 1920년에 일본명치대학법과 출신으로 그의 ?2세시에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그가 친일하였더라면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가족을 버리고 로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건너가 일로 항일전선에 나섰다.

(당시 나는 2세) 부 김형두는 막부에서 동방인민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 민의원 김준연씨와 함께 ML당을 조직하여 항일지하투쟁을 하다가 일본관헌들의 눈을 피해 다시 로령해삼위・만주・상해 등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김준연선생 증언) 기간 만주사변까지는 서신이 내왕되었는데, 그 후로는 지금까지 소식이 두절되어 그의 생사조차 부명하나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같이 활약한 사람들의 말로써 알았다.

이러한 부친을 가진 나는 항일투사의 유족의 영예는커녕 도리어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받었다. 악독한 일제관헌의 감시학대는 고사하고 해방이 되어 지금까지 16년간의 나의 수난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서울 모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려 하였으나, 부친의 항일투쟁이 해방된 조국에서는 소위 「사상적 불순」 운운하여 받어주지 아니하고 완전히 사회적 고아가 되었다.

6.25동란 당시에는 경남 통영에 있었는데 나는 이유도 없이 부친의 항일경력으로 보아 선당 부역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여 소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무참한 고문을 당하였다. 검사 구형에 있어 피고는 부친 김형두가 소련서 완전 적화되어 귀국한 후에 피고가 출생하였기에 선천적인 공산주의자라고 운운하여 3년 구형을 겨우 집행유예 언도를 받었다. 그 후 대한민국의 역군이 되고서 취직을 백방으로 구하였으나 모두 빨갱이라고 허사였다.

서상과 같이 애국자항일투사의 부친을 가진 나는 국가적 보호는커녕 일제로부터 자유당말기에 이르기까지 학대와 요시찰인으로 몰리어 공포부안과 생지옥의 연속적인 행정을 걸어왔다.
 
여기에 3.15 마산봉기를 기점으로 하여 탄생된 제2공화국에 나는 새로운 희망과 출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 정권에도 실망을 하고보니 즉 구정권보다 개선은커녕 더 심한 공포부안을 예상체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대담하게 나와 같은 역정과 비극적 운명을 가진 수많은 유족과 더불어 제2공화국에 다음 몇 가지를 최후로 제언한다.

※ 첫째 = 나와 같은 항일투쟁유족을 위하여 국가적인 원호특별법을 제정하라

※ 둘째 = 대한민국에 봉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사상적・사회적 자유를 달라

※ 세째 = 국제적십자를 통하여 부친 김형두의 생사를 확인하여 달라

※ 네째 = 이상과 같이 이것마저 안 되면은 국제연합에서 선언한(제13조) 거주지 선택 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공산지역으로 축방시켜 달라

 
[필자=김영규 마산시 오동동 153의 22]

▲ 민성/차라리 공산지역으로 추방해 달라 [민족일보 이미지]

民聲

 
차라리 共産地域으로 追放해 달라

=蘇聯으로 간 抗日鬪士遺族의 呼訴=

 

여기에 나는 먼저 日帝時代로 부터 解放後 軍政時代를 걸쳐 韓民黨과 自由黨 時代를 通한 三十數年동안의 쓰라린 告哀와 迫害相을 天下에 밝힌다.

〇... 自由와 平和를 爲하여 피흘린 先烈과 同志들에게 먼저 경건한 感謝와 追念을 眞心으로 드리는 바이다. 同時에 피와 얼로써 이룩된 이 땅의 自由와 平等平和가 幾個 政權食欲者에 依하여 유린될 危機에 處하여 있음을 慨嘆하는 바이다.

나는 當年 三十五歲로서 金烱斗의 長子(獨子)로 태어났다. 金烱斗(當 ?6歲)는 一九二〇年에 日本明治大學法科 出身으로 그의 ?2歲時에 日本辯護士試驗에 合格하였는데, 그때 그가 親日하였더라면은 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오로지 祖國의 獨立과 解放을 위하여 家族을 버리고 露領海蔘威(블라디보스톡)로 건너가 一路抗日戰線에 나섰다.

(當時 나는 二歲) 父 金烱斗는 幕府에서 東方人民大學을 마치고 歸國하여 現在 民議院 金俊淵氏와 함께 ML黨을 組織하여 抗日地下鬪爭을 하다가 日本官憲들의 눈을 避해 다시 露領海蔘威・滿洲・上海 等에서 抗日鬪爭을 繼續하였다.(金俊淵先生證言) 其間 滿洲事變까지는 書信이 來往되었는데, 그 後로는 지금까지 消息이 杜絶되어 그의 生死조차 不明하나 그는 決코 共産主義者가 아니라는 것은 같이 活躍한 사람들의 말로써 알았다.

이러한 父親을 가진 나는 抗日투사의 遺族의 榮譽는 커녕 도리어 「빨갱이」의 子息이라는 烙印을 받었다. 惡毒한 日帝官憲의 監視虐待는 고사하고 解放이 되어 지금까지 十六年間의 나의 受難相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서울 某大學을 卒業하고 就職할려하였으나, 父親의 抗日鬪爭이 解放된 조국에서는 所謂 「思想的不純」 云云하여 받어주지 아니하고 完全히 社會的 孤兒가 되었다.

六・二五動亂 當時에는 慶南統營에 있었는데 나는 理由도 없이 父親의 抗日經歷으로 보아 宣當 附逆行爲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여 所謂 國家保安法 違反이라는 罪目으로 拘禁되어 無慘한 拷問을 當하였다. 劍士 求刑에 있어 被告는 父親 金烱斗가 蘇聯서 完全 赤化되어 歸國한 後에 被告가 出生하였기에 先天的인 共産主義者라고 云云하여 三年求刑을 겨우 執行猶豫言渡를 받었다. 그 後 大韓民國의 役軍이 되고서 就職을 百方으로 求하였으나 모두 빨갱이라고 虛事였다.

敍上과 같이 愛國者抗日투사의 父親을 가진 나는 國家的 保護는커녕 日帝로부터 自由黨末期에 이르기까지 虐待와 要視察人으로 몰리어 恐怖不安과 生地獄의 連續的인 行程을 걸어왔다.

여기에 三・一五 馬山봉起를 基點으로 하여 誕生된 第二共和國에 나는 새로운 希望과 出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現政權에도 失望을 하고보니 即 舊政權보다 改善은 커녕 더 甚한 恐怖不安을 豫想體驗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大膽하게 나와같은 歷程과 悲劇的 運命을 가진 數많은 遺族과 더불어 第二共和國에 다음 몇가지를 最後로 提言한다.

※ 첫째 = 나와 같은 抗日투쟁遺族을 위하여 國家的인 援護特別法을 제정하라

※ 둘째 = 大韓民國에 奉仕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思想的・社會的 自由를 달라

※ 세째 = 國際赤十字를 通하여 父親 金烱斗의 生死를 確認하여 달라

※ 네째 = 以上과 같이 이것마저 안되면은 國際聯合에서 宣言한(第十三條) 居住地選擇自由의 原則에 立脚하여 共産地域으로 逐放시켜달라


[筆者=金英圭 馬山市 午東洞 153의 22]

<민족일보> 1961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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