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우 / 전 인천대 교수

 

필자의 말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소통의 도구이자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미디어를 읽는다는 것은 거울에 비친 우리 자화상을 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사회를 성찰하고 뒤돌아보는 글이 되고자 합니다. 이 글은 매주 목요일에 게재됩니다.

 

"라떼는 말이야." 우유를 섞은 부드러운 커피인 라떼는 곧 말(horse)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다면 당신은 꼰대일 가능성이 높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인데, 나이 든 꼰대를 비꼬는 말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상투적인 구절로 시작되는 나이 든 꼰대들의 훈계에 질려버린 젊은이들이 소리 나는 대로 "라떼는 말이야"라고 쓰고, 꼰대를 지칭하는 그들만의 은어를 만들었다. 오죽이나 많이 들었으면, 그리고 오죽이나 많은 어른들이 젊은이와 대화할 때 판박이 같이 똑같은 구절로 시작을 했으면, 이런 신조어까지 나와서 기성세대를 비꼬는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그런데 사실, 지금 꼰대 소리를 듣는 기성세대들도 혈기방장 한 젊은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 어른들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 때는 어땠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도 없고 생각도 없다'는 식의 훈계를 하는 노인을 무시했던 젊음은 흘러 지나가고,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꼰대가 되어간다.

이런 세대 간 사회적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더 이상 새로운 일을 개척할 창의력도, 의지도 체력도 사라져 버린 노인이 붙들고 있을 것은 "과거"밖에 없다. 나이 들어가며 어쩔 수 없이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인데, 불행인 것은  자신이 꼰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라떼 타령을 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신체적 정신적 변화야 자연의 섭리이니 어쩔 수 없어도, 최소한 라떼 타령만 접어두면 꼰대 소리는 듣지 않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신조어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꼰대가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늙을수록 말이 많아지는 것은, 주위에 대화를 나눌 상대가 줄어들어 대화의 기회가 사라지고, 육체가 쇠락하여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과학적 분석도 있다. 정확한 원인이야 관련 학자들이 분석할 일이지만,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 문화가 세대 갈등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공고한 위계질서 사회인 한국에서는 나이가 질서를 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우선적으로 나이를 파악한다. 학번이나 띠를 물어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위계질서를 파악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한국 사람에게 "친구"는 같은 나이끼리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에게 친구는 같은 나이 같은 학번 사이에서만 가능하고, 나이가 다르면 선후배가 되는 것이지 친구가 될 수 없다. 철저하게 나이에 따라 친구 관계가 결정된다. 나이와 무관하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친구 관계를 맺는 외국인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이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질서를 정하는 문화가 공고하게 정착되어 있기에, 나이에 따른 세대 간 단절이 심화되고, 꼰대가 만들어진다. 심지어 같은 20대들 사이에서도 나이에 따라 꼰대로 칭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공고하게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인식과 태도가 바탕에 깔려있는 근본적 문제이기에 해결 방법이 난망하다. 이런 위계질서 문화를 유지시키고 강화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와 문화는 상호보완적 관계이니 한국어가 문제의 모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어가 나이에 따른 사회적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 살이라도 차이가 나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기에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는 언어를 통해 계속 전승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형제는 그저 브라더이다. 우리는 나이가 많은 형제는 형, 어린 형제는 동생이라고 명확하게 명시한다. 이렇게 한국어는 명칭에서부터 나이에 따른 위계가 명확하다. 존댓말과 하댓말도 매우 세분화되어 있어서, 나이와 계급의 미묘한 차이까지도 반영한 복잡하게 세분화된 단어와 뉘앙스를 사용하여 말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지금 같은 한국어가 유지되는 한,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 문화는 변하기 어렵다.

존댓말을 아예 없애버리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겠으나, 오랜 세월 사회적 약속으로 만들어진 언어가 그렇게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사회 구성원이 모두 누구에게나 똑같은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한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똑같이 서로를 존중하는 경어를 사용하도록 한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하댓말은 사라지고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요원한 일이겠지만.

그런 거창한 일을 떠나서, 어른들이 라떼를 찾는 일부터 당장 줄여나가는 것이 좋겠다. 라떼는 그저 커피를 의미하는 단어로만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미국 위스컨신대학교 언론학석사
미국 서던미시시피대학교 언론학박사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전)
인천광역시 국제교류재단 대표 (전)
한국광고학회 이사 (전)
스페인 말라가대학교 한국사무소장 (현)
저서: "광고, 상품, 쇼핑의 노예들" "글로벌 시장과 국제광고" "현대광고학" "수제맥주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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