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머리말

3월 7일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의 한 당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신천지와 코로나19의 위협이 대구·경북에서만 심각한 이유는 한국당(미래통합당)을 광신하는 지역민들의 엄청난 무능도 큰 몫”이라고 말했다. 김어준 씨도 유사한 발언을 해 ‘대구지역 비하이며 명예훼손’이라는 취지의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부산시 당원이나 김어준을 향해 ‘싸가지 없다’는 말을 이때 안 쓰면 언제 쓸 것인가?

천재지변에 가까울 정도로 변해 가는 코로나 위기 상황 앞에 우리는 이 위기 그 자체보다는 이 위기에 대한 우리의 정확한 입장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코로나가 발생하는 지역이 문제시 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구-경북’이란 특정 지역과 함께 종교단체 ‘신천지’가 함께 묶여 언급되는 것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그 어느 나라에도 코로나가 발생하는 지역과 특정 종교집단이 함께 거론되는 경우는 없다. 양자의 관계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아무리 우연이라도 세 번 이상 반복되면 필연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경북과 코로나의 관계를 필연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구-경북을 정치적 목적으로 코로나와 연관시키려는 것도 안 시키려는 것도 질타 당해 마땅할 것이다.

이 기고문은 대구-시민과 저질적인 정치인들을 구별하여 지역감정, 나아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학연과 연고주의 등 겟토화 되어 가는 것이 사태의 본질이란 시각에서 글을 쓴다. 글 쓴 사람 역시 대구-경북 지역 사람으로서 코로나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를 보낸다.

겟토화와 코로나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보다 더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 100여 개 국가들이 한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하기까지에 이르게 하였다. 내우외환을 겪고 있다. 한류로 잘 나가던 나라에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나라 코로나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비교할 때에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단순 ‘질병’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역사’의 문제로 점점 그 의의가 느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18일까지만 해도 대통령이 나서서 자신감을 가지고 코로나는 곧 끝날 것이라 했지만 ‘대구-경북’지역과 ‘신천지’가 사태를 급변시키고 말았다. 중국의 우한만 하더라도 거기에 ‘신천지’ 같은 종교 단체가 연계되지는 않았었다. 이 이상한 연계는 지금 코로나가 단순 질병의 문제가 아닌 역사의 문제로까지 비약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대구-경북과 신천지 간에 어떤 필연적인 고리라도 있단 말인가? 신천지 본부가 대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도 수가 다른 지역보다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집단적인 발병 현상이 대구-경북에 집중되고 있는가?

신천지에서 집단 발병이 나타나는 이유는 한 마디로 ‘겟토ghetto'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겟토’란 원래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을 의미하였으나, 차츰 특정 사회 집단의 거주지역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소수민족이 사는 빈민굴이나 슬럼가 혹은 ‘고립집단’을 의미하게 되었다. 드디어 ‘겟토화ghettoism'란 고립된 지역 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다.

먼저 ‘신천지’의 겟토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유대인들이 겟토화 되는 이유를 보면 신천지의 겟토화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유대인들이 겟토화 된 것은 그들의 우월주의, 다시 말해서 선민사상選民思想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우수성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유일신관은 타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주의를 낳게 하였고, 이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세부터 나치에 이르기까지 겟토화 되었다. 그래서 이런 겟토화는 종말관과 함께 말세에 자기들만 구원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선민주의는 다른 나라와 민족의 배척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겟토화를 스스로 자초하게 되었다.

신천지와 유대인들 간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한 번 보자. ‘신천지,’ 이들이 꿈꾸는 신천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상을 다 파괴해 버리고 자기들 나름의 새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코로나와 함께 바로 그들이 그리던 신천지가 온 것이다. 이들은 병균을 안고 신분을 숨기고 사방을 다니면서 그들의 복음?과 병균을 함께 전파해 정상 사회를 파멸로 몰고 가려 해, 바로 그들이 그리던 신천지가 왔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코로나에 의해 정상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곧 그들에겐 신천지의 도래나 마찬가지이다. 이만희는 기자회견을 하고 나가면서 ‘엄지척’을 했다. 신천지가 왔다는 신호탄을 쏴 올린 것이다. 바로 유대인들이 주류 기독교에 억압당하면서 주류 사회의 파괴, 그것이 그들이 메시아가 오는 종말로 생각한 것이나 무엇 하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수는 평생 이들 잘못된 주장과 싸우지 않았던가? 바울도 로마서 등에서 마찬가지로.

신천지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와 기독교의 선민사상을 결합하여 성경 요한계시록의 말세에 14만 4천 명만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몰입한다. 이러한 선민사상이 이들을 겟토화 시켰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선민사상이 역설적이게도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인들의 지탄을 받게 하였고, 드디어 자기들 자신들이 코로나와 함께 파멸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정치권력과 결탁된 신천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 코로나가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코로나는 우리에게 단순 질병이 아닌 역사인 것이다. 역사의 엄연한 심판 말이다.

그러면 유대인만 겟토화 돼 가는 것인가? 아니다. 선민사상과 교만은 그 어느 국가 사회단체라도 겟토화 시킨다. 미국이 9.11 이후 회개하고 반성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온 나라에 성조기가 휘날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나섰다. 그래서 미국은 9.11 이후 겟토화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교만과 고립주의는 지금 트럼프에 의하여 가속화 돼 가고 있다. 교만, 우월주의는 고립을 자초하게 되고. 고립은 곧 겟토화의 관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하필이면 대구-경북이 신천지와 엮어진다. ‘대구-경북,’ 정치적으로는 소위 TK지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에서는 절대로 ‘TK’라 하지 않는다. 이 말의 파급력이 대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쓰지 않는 한 사태의 본질은 빗겨가고 말 것이다. 지난 번 지방선거가 끝나고 대구-경북 지역만 유일하게 새누리당이 석권을 하였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구시장도 경북도지사도 그리고 도의원과 시의원들이 거의 전 새누리당이 다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한반도에서 철조망을 쳐야 될 유일한 딴 세상으로 보았다. ‘봉쇄’란 말은 이미 지난 번 지방선거에서 나왔던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그땐 왜 문제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차제에 ‘신천지’와 함께 ‘대구-경북’이 피하려 하나 피할 수 없게 하나의 티켓으로 묶여지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코로나가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신천지와 대구-경북에 거의 국한돼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경북’의 우월주의와 고립주의를 한 번 보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등 역대 4명이나 되는 대통령을 낸 지역,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긍지, 다시 말해서 근대화의 주역이 자기들이라는 자신감이 그 어느 곳보다 강한 곳이다. 여기서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이 박정희이고, 박정희라는 인물이 대구-경북이란 곳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자만심은 여기서 강조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손만대에 걸쳐 이 지역에서만 대통령이 나와야 하고 자기들이 주역이 돼 대한민국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긍지, 그 어느 하나 잘못된 것, 그리고 타당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감정’이야 말로 고립화를 가져오고 겟토화를 재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수순을 밟을진대 국가마저도 고립주의와 겟토화를 재촉한다. 나라로는 영국과 미국도 예외 없이 국가적인 겟토화를 재촉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연과 학연은 고립화를 가져오고 고립화는 겟토화의 첫 단추이다

그러면 혹자들은 다른 지역에 같은 지역감정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구-경북뿐만 아니라 호남도 지역감정이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감정과 호남 지역감정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인종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자와 후자는 똑 같은 편견과 배타성을 갖는 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아 보이지만, 전자는 후자에 없는 ‘권력power'을 편견에 더해 가지고 있다. 백인과 흑인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지만, 백인의 경우는 ’편견+권력‘이란 점에서 흑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상징이나 하듯이 이만희 교주의 왼손 손목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계가 차 있었다. 역사에는 이렇게 우연인 것 같으나 필연인 것이 너무 많다. 자신이 경북출신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힘을 받고 있다는 상징,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나 하려는 듯이. 우연일까 필연일까.

코로나를 단순히 질병이란 차원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역사가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신학적’이기도 하다. 맥아더가 제2차 대전은 신학적인 전쟁이었다고 할 때에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치라는 악과 싸우는 전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점에서 신학적이라 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코로나는 분명한 신학적 의의, 나아가 역사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코로나를 우리 한국에서만은 단순히 질병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래야 이 역경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피해를 입고 나서라도 재충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겟토화’ 이것이 원인이라면, 하루 속히 정부는 코로나는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니고 겟토화에 의한 지역감정, 그리고 오만과 고립화의 결과,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스스로 자각하고 알리지 않을 진데 후회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국론분열로 곡해되거나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지역감정에 의해 당선된 정치인들이 유능할 리 만무하고 책임감이 있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무책임할 뿐 아니라 무기력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 4월 15일 총선에 던지는 코로나의 의미는 심대하다. 중차대한 역사적 결단 앞에, 아니 엄연한 현실 앞에 우리 모두 서 있다. 당장 대구 경북에서도 호남 국회의원이 나와야 하고, 호남에서도 영남 국회의원이 나와야 한다. 여당 지역에서 야당이 나와야 한고 야당 지역에서 여당이 나와야 한다.

지역감점만 겟토화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다. 지연 이상으로 무서운 학연 그리고 연고주의는 모두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이런 마음의 질병이 있은 다음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코로나 같은 신체의 질병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코로나가 질병이상으로 역사적인 의의가 큰 것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에서 크게 반성하고 그 근본 원인을 살펴볼 텐데 잃은 것보다는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일진데 코로나가 지나간 다음에 다시 같은 질병은 반복될 것이다. 질 나쁜 지역감정을 조장해 이 순간에도 코로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저 모리배 정치인들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진실된 대구-경북이 다시 깨어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병마가 하루속히 지나가 밝은 얼굴 모습으로 상면할 날이 하루속히 오기 바란다.

코로나가 4.15 총선에 맞물려 있다는 이 현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고 역사인 이유이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중국이 그런가, 이란이 그런가, 이태리가 그런가. 코로나는 총선과 나아가 통일이란 중차대한 담론 앞에 우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지역감정이 재현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고,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이번 총선과 다가오는 대선에서 대구뿐만 아니라 그 어디서도 지역감정에 의한 선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하늘의 경고가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갖는 코로나의 의의가 아닐까? 그래서 코로나는 우리에겐 단순한 질병이 아니고 역사라고 한다. 대구-경북은 이 환란을 의미있게 깊게 생각하고 극복해야 한다. 또 다시 지역감정에 의해 선거를 한다는 것은 이 어려운 시련의 순간을 너무 값없이 여기고 마는 것이 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신천지를 심판하고 지역감정을 심판하라는 하늘의 명령은 대구-경북뿐만 아니라 우리 천손 민족 모두에게 내리는 것일 것이다. 대구-경북이 그 아픈 십자가를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지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와 두 개의 상반된 편지

코로나가 창궐하는 며칠 사이에 상반 된 두 개의 편지가 공개되었다. 하나의 발신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의 발신자는 김정은 위원장이다. 1000일에 가까운 수형 생활을 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반기는 사람들도 있고 실망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국회와 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을 당했고, 선거에 의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엄연한 이 질서와 과정이 있는 데도 헌법을 수호하고 법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이 질서와 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문재인 타도를 외치면서 지역감정을 고조시키는 듯한 언사를 구사한 것은 먼저 박근혜 전 대통령 자신의 인생 실패이고, 다시 한 번 자격 미달인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말았다.

쏘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고 했다. 이 정도에 준하는 발언이 나올 줄을 알았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한 역사적 안목과 안식을 가지고 발언을 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왜 자기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경북에서 다른 지역에서 나온 환자 수보다 수십 배 되는 환자가 나오는 지, 그리고 이만희의 시계에 대해 일말의 발언이 있어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찰을 하지 않을 진데, 그것은 천일의 옥중 생활의 의의를 스스로 훼손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지역감정을 부추겨서라도 정치적 야욕을 저버릴 수 없다는 강한 기별의 말,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실패는 물론 삶 자체를 구제 불능으로 이끌어가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한 분이 어찌 되었던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내린 질서와 과정에 대해선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보수가 단결해 미래통합당이 정권을 다시 잡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다음부터 의회와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어떻게 정립하고 통치를 할 것인가? 무조건 권력부터 잡고 억압과 강압으로 통치하면 될 것이란 말인가? 자기 아버지가 하듯이. 참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편지는 어느 모로 보나 실망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자기 집단 안에서는 환영을 받을지 몰라도 국민 전체의 공감대를 갖기에는 역부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코로나의 원인이 겟토화라 할 때에 이를 더 가속화시키는 편지의 내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 하나의 서신이 있었다. 그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서신이다. 전 세계의 웃음과 조롱거리가 된 코리아,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에, 티그리스 강가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 놓고 적들이 강제로 노래 부르게 한, 그 수모를 겪는 이상의 수모를 겪고 있는 이 마당에 오로지 김정은 위원장만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 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강가에 수금을 걸고 노래 부르던 그 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을 잊고 오만과 교만에 빠졌다. 바벨론을 찬양하는 무리들이 엄연히 당을 만들어 총선에 나서고 있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김정은 위원장의 편지는 지구상 어느 나라도 한국인들을 출입금지 시키고 있는 마당에 멍든 상처를 감싸주는 듯한 위로가 되었다. ‘종북 빨갱이’이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더 목 놓아 울 것이다. 일본, 우리가 어려울 때를 골라가며 더 어렵게 하는 존재가 과연 우방인가? 만약에 이번 코로나가 비록 전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방탄 소년들의 노래가 마치 티그리스 강가의 무대와 같을 지라도 남북이 진정으로 서로 돕고 이해하는 우애를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면, 우리 한반도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적으로도 코로나는 우리 민족이 백두산 ‘천손민족’이란 사실을 알리고도 남음이 없게 할 것이다. 전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처에 경탄한다는 쓸데없는 사대주의 발언이나 하지 말고, 두 개의 서신 앞에 냉정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 그것이 코리아에겐 기회였구나. 그때에, 코로나는 우리에겐 단순 질병이 아닌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 대고난의 시기에 그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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