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원 / 종주대원

 

일자: 2020년 2월 9일
코스: 성판악탐방안내소~한라산 동봉 정상~삼각봉대피소~관음사탐방안내소 
거리: 19Km
시간: 8시간
인원: 12명

 

▲ 제주도 용두암.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제주도를 다녀갔다는 소식에 한라산 예약 취소자가 생기면서 게으른 1인도 한라산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도착한 분들과 나중에 오신 분들 모두 용두암에서 만났다. 

용머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반갑게 악수와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바닷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 이것이 진짜 제주의 바람이구나! 내일 한라산에 올라가면 먼저 도착한 이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 제주 용머리 해변에서 만난 제주행 참가자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용두암 근처 제주김만복옛집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인 절물휴양림으로 간다. 쭉쭉 뻗은 소나무와 구름 사이로 달이 간간히 보이는 절물의 밤풍경이 매력적이다. 

서문시장에서 사온 방어회, 오동진 후미대장이 사온 갑오징어, 한라산소주, 김양희 대원이 가져온 귀한 술들로 기력을 보충하는 시간이다. 술을 못 마시는 소수자(少數者)를 위하여 우유도 준비해 주신 심주이 총무의 배려에 감사하다. 

그런데 기력보충을 너무 많이 한 것인가? 옆자리 형님뻘인 한 대원은 잠자다 말고 앉아서 명상을 하신다. 아침에 물어보니 본인은 기억을 못 하신다. 참 멋지지만 나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음을 안다.

▲ 첫날 저녁 절물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이민우 대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산행준비를 한다. 장볼 때 빠트려서 어쩔 수 없이 파와 마늘을 넣지 않은 사골 떡만두국에 밥을 말아먹는 아침식사는 최고의 맛이다. 산을 타는 실력도 최고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실력도 최고라고, 백두대간 종주대에는 음식문화가 한 몫을 차지한다고 말하고 싶다. 

날이 밝기 전 부지런히 출발하여 아침 7시 성판악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예상과 달리 눈이 많이 쌓여있지는 않았고 등산로에는 눈이 없다. 선두에 선 전용정 대장의 발걸음이 빠르다. 그래도 경사가 완만해서 따라갈 만하다. 

잎을 다 떨군 갈참나무숲에 이름 모르는 상록활엽수들이 군데군데 보초를 서듯이 우두커니 서서 뒤로 밀려가고 있다.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여기는 아열대지만 정상 부근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 한라산 산행 들머리 성판악 탐방로.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오랜만에 산에 왔다. 작년 겨울 둘째아들과 함께 영실코스를 오른 이후 봄부터 가을까지는 논과 밭에서 사느라 여유가 없었다. 겨울 들어서도 뒷동산에 잠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한라산에 올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숨을 크게 쉬어본다. 아직까지 체력은 좋다. 다만 하산길에 무릎이 말썽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젊은 시절 씨름을 하다가 다친 오른쪽 무릎은 평생 조심해야 한다.

한 시간쯤 오르니 눈이 제법 쌓여있다. 김익흥 대원이 말씀하신다. “올 겨울 들어서 이렇게 쌓인 눈은 처음 보네.” 정말이다. 강원도 설악산에 다녀온 분이 아니면 눈 구경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이 없다. 참 이상한 겨울이다.

▲ 온세상이 하얀 설국의 숲속.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가다쉬다를 몇 번 하고 나니 언제부터였는지 나무에 눈꽃이 피어있다. 그냥 가벼운 눈꽃에서 점점 눈꽃이란 말로는 부족한, 형언하기 어려운 기막힌 풍경이 펼쳐진다. 오동진 후미대장이 사슴뿔 같다고 한다. 정말 사슴뿔 수만 개로 하늘을 장식한 모습이다. 

눈발이 날리는 뿌연 구름하늘을 배경으로 흰뿔 사슴의 군무(群舞)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파란 하늘과 태양이 우리를 비춘다. 파란하늘과 흰뿔의 대비로 무대의 박진감이 절정에 오르고 우리는 고개를 든 채 소리를 막 질러댄다. 야~~~~ 와~~~~

감동에 겨워 노래도 부른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달래대피소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먹는다. 에너지 소모가 많으니 특히 겨울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수시로 먹어주는 것이 좋다.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언뜻 보기에 비닐봉지에 찐빵이 가득하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찐빵이 아니고 계란이란다. 산에서 계란을 까먹으려면 손이 시릴 거라며 어젯밤 김익흥 대원이 다 까서 준비했단다. 이렇게 많은 양을 혼자서 까다니... 계란 맛도 꿀맛이고 쵸코빵도 꿀맛이다. 대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꿀맛이다.

조금씩 내리던 싸락눈이 제법 굵어지고 바람도 세졌다. 이민우 대원은 모자도 안 쓰고 가느다란 머리띠 하나만 했는데 땀을 죽죽 흘리신다. 어제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 전 조기축구에 나가 한 판 뛰고 오셨단다. 평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 부럽다. 다리통이 나의 허벅지보다 두껍다. 

박명한 대원은 장갑을 안 꼈는데도 손이 따뜻하다. 몸에 열이 많아서 그렇다는데 신기할 것도 없다. 열은 근육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만들어진 근육은 백두대간 근육일 것이다. 그러나 겨울산을 오르려면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이번 산행을 준비하면서 방수장갑을 새로 산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다.

▲ 정규원 대원과 함께 청주에서 참가한 하태한 대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정상이 저기 보인다.
나무가 없는 곳이다.
간혹 고사목만 하얗게 서있는 지대이다. 
바람이 세다.
어제 용두암에서 잠깐 만났던 바람일 것이다.
밤새 중산간마을을 돌아, 4.3을 지나, 수많은 세월 말하지 못한 사연, 까마귀 날개사이를 지나 이제야 도착한 바람은 거세게 몰아쳤다.
여기 한라산에 오는 모든 분들에게 불었다.
아니 바람은 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것이다. 한라에 뿌리를 박고 흔들리며 울고 있는 거대한 구름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한라에서 눈을 뜨고 울어야 한다.
보아야 할 것이 있고, 흘러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얀 아름다움 속에 상처의 뼈가 그려져 있다.

▲ 한라산 정상 동봉. 아쉽게도 운무에 쌓여 백록담을 보지 못했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계속 몰려오는 구름에 가려 백록담을 보지는 못했지만
두 눈에 가득 채워가는 풍경만으로도 벅차다.
한라산을 오른 대원들은 내일부터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풍경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든든한 보수주의자일 것이다.
또한 풍경은 관찰자와 만나 과감히 새로운 길을 떠나는 진보주의자일 것이다.
산 위에서 끝없이 만들어지는 구름처럼 진보와 보수는 밀고 당기며 내일을 만들어 갈 것이다.

▲ 김익흥 대원의 머리에 하얗게 상고대가 피었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관음사 코스는 바위산들이 절경이다. 자작나무는 땅으로 기어가고, 주목이며 구상나무 고사목이 한대지방의 영역임을 말해준다. 하태한 대원은 찬바람에 뒷목이 뻐근한가보다. 약간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스패치를 하니 발이 따뜻하다고 한다. 

조심조심 내려가 삼각봉대피소에 도착, 맛있는 점심식사 시간이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젓가락을 든다. 아침에 심주이 총무와 여성대원들이 직접 만들어서 싸준 유부초밥 도시락이다. 제법 많은 양인데 오늘은 배가 신축성이 좋은지 다 들어간다. 든든히 먹고 나니 하태한 대원도 기운이 나나보다.

▲ 마치 히말라야를 연상케 하는 한라산의 설경.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삼각봉대피소 가기 전 흔들다리 위에서.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대피소에서 점심식사 후 삼각봉 앞에서.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하산길은 빠르게 진행된다. 단, 다리에 힘을 주고 무릎 관절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슬로우 모션처럼 걷는다. 갑자기 앞쪽에서 함성소리가 난다. 이민우 대원과 오동진 후미대장이 눈썰매를 가져 왔다더니 드디어... 

우리는 스틱을 옆 사람에게 맡기고 교대로 눈썰매를 탄다. 썰매코스의 곡선이 다양하고 경사도 완만하다가 제법 가파른 곳도 있어서 마치 동계올림픽 썰매를 보는 기분이랄까? 우리는 웃고 떠들고 소리 지르며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하산을 했다.

▲ 동심으로 돌아간 심주이 총무.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이번 한라산 등반은 산행팀과 둘레길팀으로 나뉘어 활동했다. 산행팀은 모두 12명이고, 둘레길팀은 6명이다. 둘레길팀은 삼다수길 걷기, 해녀의 부엌 관람, 귤밭체험, 고등어낚시 등 다양한 제주의 맛을 만끽했다.

▲ 8시간 만에 전 대원이 하산했다. 날머리인 관음사에서.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둘레길팀이 미리 배치해놓은 차를 타고 바로 숙소로 돌아와 샤워와 휴식을 취한 후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건강한 맛 두부전골로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자 커다란 보름달이 둥실 뜨고 있다. 오동진 후미대장의 소개로 '평화쉼터'에 들러 다과대접을 받았다. 

평화쉼터는 ㈜연대와전진 신동훈 대표가 사재를 털어 만든 공간인데 시민단체 회원 누구나 와서 몸을 치유하며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음식공부도 많이 해서 건강에 이로운 음식으로 준비한다고 하니 몸이 안 좋은 분들이 많이 이용하면 좋겠다. 평화쉼터 옆에는 '세월호 제주기억관'을 카페로 운영하고 있는데 세월호 아이들의 생일을 맞아 매달 사진을 바꿔주며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문화공간이다.

한라산을 다녀왔습니다.
여기에 우연히 들려
산보다 더 크고 무거운 기억이
꽃처럼 안겨있는 모습을
매서운 산바람보다 더 커다란 울음이
잔잔히 미소처럼
마주 않아 있음을 보고 갑니다.

숙소로 돌아와 뒷풀이를 했다. 이계환 대원은 각 대원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술을 권했다. 전용정 대장은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변광무 대원은 특유의 입담으로 산행의 피로를 잊게 했다. 

심주이 총무가 총무를 맡게 된 사연과 1구간만 보충하면 완주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감동하고, 오동진 후미대장은 시속 5Km의 능력을 가졌는데 후미대장을 맡으면서 시속 2Km로 뒷사람을 챙겨야 하니 실력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후미대장의 비애’를 여러 사람이 증언했다. 그리고는 올해 환갑을 맞은 두 분 대장을 위해 케익에 촛불을 켜고 축하해주었다.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팀은 이제 4구간이 남았다. 산불예방기간이 끝나면 6월부터 시작해 7월이면 그 대장정을 마무리할 것이다. 그러나 8월쯤 중간보고회 행사를 가지고 나서 곧바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전 대장이 말씀하셨다. 

▲ 제주 세월호 기억관을 들러보았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이렇게 제주행 일정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담배와 술을 적당히 줄여 건강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달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면 술이 빠질 수 없으나 담배는 백해무익의 마피아에게 협조하는 것이니 아예 끊는 것이 좋고, 술은 너무 과하면 약물의 파괴적인 본성이 나오니 잘 조절하시기를 부탁한다.

마지막으로 차량운전으로 봉사해주신 변광무 대원, 김성국 대원, 정병창 대원께 감사인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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