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있으면 풀어야 한다. 풀지 못한 것은 응어리다. 응어리는 멍에를 지게 되고 그 멍에는 고스란히 고통으로 고착되기 일쑤다. 그 푸는 방법 역시 인간들의 몫임에도, 얽히고설킨 사연에 해결하는 기술(技術) 역시 단순치가 않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멍에는 분단이다. ‘나’라는 개인을 넘어 ‘우리’라는 모두에게 짐이자 과제이다. 관련된 사안 하나하나에 나라 안이 요동치고 온 세계가 들썩댄다. 과연 분단이 풀릴 것인가에 대한 해답 역시 쉽게 예단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통일의 성패가, 민족 장래의 명암을 가를 수 있고 온 지구의 안녕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란 점이다.

통일 담론도 이념,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다. 민족적 당위론을 내세우는가 하면 인도주의적 접근으로 호소하는 이도 있다. 경제논리에 무게를 두는 부류와 함께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까지도 아끼지 않는다. 통일에 접근하는 기술이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흔히들 통일을 위해 우리 스스로 부강해야 하고 상대적 힘의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전략적 경제지원과 함께 지도자의 통일의지도 빼놓지 않는다. 특히 통일로 올 수 있는 후유증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적지 않다. 모두가 소중한 고민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통일의 기술이다. ‘어떻게’에 대한 접근은 기관이나 학계에서 수없이 언급되었다. 체제나 경제, 문화와 관련된 로드맵이 그 주종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상대적 차이에서 오는 간극(間隙)이다. 당연히 내세우는 통일의 기술도 부딪히게 된다.

호환성(互換性) 없는 통일 기술은 당연히 사장(死藏)될 수밖에 없다. 일방 주장이나 구호, 수용할 수 없는 억지나 주문 등이 호환성을 어렵게 하는 통일 기술들이다. 당연히 현상적 통일 놀음이 도마에 오르게 된다. 그저 이념이나 권력, 체제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의 한계를 보완할 통일 기술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을 내포한 왜’라는 데 있다. ‘왜 통일해야 하는가’라는 명분이 그 핵심이다. 우리는 오래 전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만남 장소에 붙은 ‘우리는 한민족 단군의 자손’이라는 현수막 구호를 기억한다. 그것이 남북대화의 출발점이었다. 독일 통일의 명분 역시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구호였다는 것도 익히 아는 바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위기 때마다 등장한 가치가 단군이다. 고려 공민왕이 요동정벌의 명분을 단군조선에서 찾은 것이나, 조선왕조의 ‘조선’이란 국호 역시 이러한 정신의 계승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선조 단군존숭의 전통이 우리 민족 정체성 확인의 발로라는 것도 이미 확인된 사안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력도 이 가치를 벗어나 헤아리기 힘들다. 정신의 망각으로 망한 나라를 정신의 지킴으로 되찾자는 구호의 중심에 단군이 있었다. 그 단군정신의 종교적 구현이 대종교였으며, 일제에 총체적 저항으로 맞선 부류가 그 집단이었다. 근대에 들어 단군구국론(檀君救國論)을 재확인시킨 대표적 사건이다.

상투적이고 심정적인 이 가치가 시간을 넘어 생동하는 이유는 왜일까.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원천기술이기 때문이다. 그 기술 속에는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근거가 있으며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할 당위가 있다. 우리가 혼돈을 맞을 때마다 늘 그 끈을 잡고 돌아가려 노력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귀일(歸一)이었다. 통일이 정치적 하나됨이라면 귀일은 철학적 하나됨이다.

그래서인지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는 남북관계에서도 통일을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우리 고유사상에 기반을 둔 그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께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일은 귀일이라야 함을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대종교계 독립운동가들이 귀일당(歸一黨)이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응어리진 멍에는 풀어야 한다. 통일도 귀일을 따르면 ‘풀이’가 된다. 풀이란 우리 민족 고유의 신교(神敎) 유습이다. 막힌 것을 녹여내고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증오를 날려버리는 일이다. 더러움을 버리고 깨끗함을 취하며 죄를 씻어 착함으로 돌아가는 작업이다. 재앙을 돌려서 상서로움에 닿으며 악한 정신을 피하고 착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착함의 실천을 통해 악심(惡心)과 악사(惡事)를 풀어버리는 일, 이것을 우리 선인들은 ‘살풀이[逐煞]’, ‘뜬것풀이[驅邪]’라고 했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 ‘화풀이[撥憫]’, ‘분풀이[報寃]’, ‘한풀이[解恨]’라고 함을 볼 때, 그 의미가 쫓아냄·떨쳐버림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 역시 단절을 떨쳐버리고 질시·반목을 몰아내는 일이다. 그것이 귀일에 의한 통일이다.

‘어떻게’의 통일도 가벼이 할 수 없다. 그러나 ‘왜’ 통일해야 하는가는 더더욱 소중하다. 전자가 통일의 실용기술이라면, 후자는 통일의 원천기술이다. 실용기술이 현상에 대한 대증적(對症的) 반응을 할 때, 원천기술은 우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자각을 일깨워 준다. 우리를 모르는 통일이 물리적 결합에 불과한 것과 같이, 철학 없는 통일은 진정한 귀일과는 거리가 멀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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