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새해가 됐어요. 올해 소원은 뭐에요?”
“소원은 무슨...다 늙어서...소원이라면 딱 하나야. 평양 가는 거지.”

경자년 새해가 이틀이 흐른 지난 27일, 서울 ‘평화의 우리집’을 찾은 기자의 물음에, 일본군성노예제 생존자인 길원옥 할머니가 답했다. 꿈에서라도 가고 싶은 ‘평양’이어서일까. 잠이 덜 깬 할머니는 눈을 가물거리면서도 ‘평양으로 가는 것’을 올해 소원으로 꼽았다.

“평양? 평양에 어떻게 가? 할머니 잘 걷지도 못하는데?”
“오똫게든 가게만 해준다면야, 지금 당장이라도 가지.”

“에이, 평양에 누가 있다고 가신데? 가도 아무도 없는걸?”
“고저..고향이거든. 고향이니까 가야지.”

1940년, 13살에 평양에서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간 지 80년이 흘렀지만, 길원옥 할머니의 느린듯한 말투에는 이북 사투리가 그대로 묻어있다. 그리고 고향, 평양에 가는 일은 80년째 소원이다.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할머니가 못 잊은 주소이다.

왜 그토록 고향, 평양이 그리울까. 길원옥 할머니는 1928년 10월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이사해, 평양이 고향이다. 그리고 딱 12년을 살았다. 우리 나이로 13살이 되던 1940년 겨울, 아버지가 도둑의 물건을 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되자, 그 벌금을 벌려고 중국 만주 하얼빈으로 갔지만, 일터가 아닌 ‘위안소’였다.

1945년 18세에 해방이 되어 인천으로 귀국한 할머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남루해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가려 했지만, 평양행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남쪽에 남은 할머니는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에도 사연을 보냈지만, 가족을 찾지 못했다. 수차례 남북이산가족상봉행사가 열렸지만,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 길원옥 할머니의 올해 소원은 평양 방문이다. 길 할머니의 올해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사진출처-윤미향 정의연 이사자 페이스북]

길원옥 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여느 이산가족과 다르다. 일본에 의해 끌려가 강제로 평양을 떠나야 했고,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으로 고향을 가지 못한 역사의 피해자이다. 그래서 그에게 올바른 과거사 문제해결은 자신의 고향에서 사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 운동이 바로 한반도 평화통일 운동인 셈이다.

길 할머니는 2017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여성 평화·통일 활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길원옥여성평화상’을 만들어 후배 여성 활동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하고 있다. 마이크만 잡으면 “전쟁 없는 나라, 평화의 나라”를 외친다. “남북통일 돼서 튼튼한 나라가 되어서 남한테 넘보이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해부터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북측은 남측을 향해 ‘당사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귓등으로 넘긴 남측에 보란 듯이 북측은 금강산 내 남측 시설을 들어내라고 했다. 지난해 열린 당 7차 제5차 전원회의 결과에는 남측은 언급조차 안 됐다. 해마다 1월 중에 열리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연합회의’가 개최됐다는 소식도 없다. 정부는 전원회의 결과보다 연합회의 호소문을 기다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대화에 매달리지 않고 남북관계에 우선적으로 나서겠다고 했지만 뒤늦은 감이다. 개별관광을 남북관계 개선카드로 꺼냈지만, 북측이 호응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설날 망배단에서 이산가족의 개별 고향방문 지원의사를 밝혔지만, 구체적으로 정해진 방침도 없다. 이미 열차는 떠난 기분이다.

하지만 길원옥 할머니는 평양으로 가야만 한다. 80년 전 일본에 끌려가기 전 어머니의 품이 남은 고향으로 가야 한다. 길원옥 할머니의 평양행은 단순한 고향 방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에 끌려가기 전의 모습으로, 원래 길원옥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 그것이 바로 평화통일이다.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끊임없이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 그 운전석에 앉도록 다그쳐야 한다.

눈을 감으면
어느새 나는 내 고향, 평양 집 마루에 앉아 있습니다.
아 달콤한 냄새, 기분 좋은 바람, 해가 산꼭대기로 넘어가려는데,
머리 위에 잔뜩 물건을 이고 장사하러 나간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느덧 어둠이 우리 집 마당을 덮기 시작합니다.
그 어둠 앞에 엄마 모습 희미하게 보입니다.

북녘의 엄마에게 보낸 편지처럼, 올해에는 길원옥 할머니의 손에 ‘평양행 기차표’를 쥐여주길 바란다. “나 올해는 꼭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라는 80년째 소원을 정부와 시민이 들어주는 해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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