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늑대. 개들이 보여주는 몸짓과 행동들은 거의 모두 늑대에게서 온 것이다. [픽사베이에서 캡쳐]

바람이 불면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자연히 눈길이 가는 곳이 있다. 거기는 평소에 동무가 앉아있길 좋아하는 자리인데, 골을 따라 집으로 올라오는 길이 끝나는 마당 가장자리이다. 골 아래쪽에서부터 개집 지붕을 날려버리는 강풍이 불던 어느 날, 그 곳에서 바람을 향해 서있던 동무의 모습에 딱 반해버린 후,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보여주는 동무의 행동이 나에게 전염시킨 습관이다. 온 몸을 곧게 펴고, 고개를 약간 쳐들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고, 바람이 불어오는 골 아래쪽을 향해 정물처럼 오랫동안 서있는 개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풍이와 달리 동무만이 보여주는 그 장면은 눈을 뗄 수 없이 마음을 사로잡으며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적으로는, 코를 치켜들고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오는 갖가지 냄새들을 다 맡아보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면 끝이겠지만, 그 장면이 자아내는 느낌은 그런 간단명료한 해석을 밀어내고 상상의 영역을 부풀어오르게 만드는 마력 같은 것이 있다.

저 바람은 동무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동무는 저 바람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숲과 초원을 뛰어다니던 머나 먼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을까? 함께 했던 무리들이 하늘을 향해 뽑아내는 긴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까?

상상이 대개 이런 방향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받으며 서있는 동무의 모습이 초원을 누비는 한 마리 작은 늑대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풍이는 머리도 더 둥글고 주둥이도 뭉툭한 것이 풍산개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만, 동무의 모습은 확실히 주둥이가 좀더 뾰죽하고 긴 늑대에 가깝다. 늑대에 관한 동영상들을 뒤지다가 어딘가에서 동무와 꼭 닮은 늑대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으니까.

두 마리 풍산개에게서 언뜻언뜻 늑대의 모습과 행동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형되어온 개들 중에서 풍산개는 허스키나 말라뮤트처럼 늑대에 보다 가까운 품종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늑대의 흔적

개들이 보여주는 몸짓과 행동들은 거의 모두 늑대에게서 온 것이다. 자기의 영역이나 지나는 곳 여기저기에 오줌으로 표시를 해놓는 것도, 앞발로 땅을 파서 뼈다귀를 넣고는 주둥이로 흙을 덮어놓는 풍이의 행동들도 늑대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모든 소리와 움직임에 그토록 예민하고, 나타나는 동물들을 쫓아가면서 짖지 않는 것도 사냥감에 은밀히 접근하는 늑대의 습성이 재현되는 것이다. 

동무의 행동에서 보여지는 늑대의 모습은 새끼들과 관련되었을 때 더욱 선명하다. 새끼를 낳을 시기가 다가오면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 굴을 파놓는 것은 전형적인 늑대의 본성이다. 새끼들이 비척거리며 일어서서 용변을 보러 나가게 될 때 쯤이면 새끼들을 물어다 그 굴 속에 집어넣는 것도 늑대의 유전자가 여전히 숨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두 마리 개가 틀림없이 늑대의 후손임을 과시라도 하듯 알리는 것은 이따금 들려주는 늑대의 울음소리이다. 내가 외출할 때나 둘 중 하나만을 데리고 산에라도 갈 때, 코를 하늘을 향해 쳐들고 ‘워우~~~ 우우~~~’ 하고 뽑아내는 긴 늑대의 울음소리는 가던 걸음을 돌려세울 만큼 가슴을 후비는 호소력을 지녔다. ‘나를 두고 가지 말아요’ 라고 절규라도 하는 것처럼, 홀로 남겨진다는 두려움이 밀어내는 그 울음소리는 어딘지 서글프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다. 

늑대들은 그 울음소리에 여러가지 신호와 소통의 의미들을 담는다 하지만 개들은 오로지 절박함만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늑대들은 짖지 않는다. 개는 개로 되면서 ‘짖기’를 터득했지만, 그러고 보면 그것들도 가장 절박하다고 느낄 때 깊이 잠자고 있던 자기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일까?

개와 늑대, 늑대와 개, 유전자 배열에 있어 단 1%도 못되는 차이가 그것들을 갈라놓았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렇게 서로 닮았으면서 또 그렇게도 서로 다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곳에 존재했으면서도 이제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멸종에 이르러 있는 늑대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인간사회에 정착하여 번성한 개들의 성공은 놀랄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성공이란 어떤 의미일까? 개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것일까?

▲ 울부짖는 늑대. 늑대들은 그 울음소리에 여러 가지 신호와 소통의 의미들을 담는다. [픽사베이에서 캡쳐]

늑대에로 가는 입구

「개에 대하여」를 쓴 스티븐 부디안스키는, “개는 타고난 본성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열등하게 된 늑대이고, 성장을 멈춘 늑대 새끼들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개를 알기 위하여 읽은 여러 권의 책들이 한결같이 향해 있는 늑대와 개의 연관에 대한 가장 간명한 설명이다. 책과 영상들에 꽤나 시간을 바쳐도 개가 시원하게 알아지지 않던 판국에서 개를 알기 위해서는 늑대를 알아야 한다는 과제를 명확하게 던져준 말이기도 하다.

동화와 만화의 활약에 힘입어 악당의 상징으로 고정된 늑대에 대한 관념이 한 방에 바뀌었던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제아무리 굳어진 것이라 해도 그릇된 관념이라는 것은 진실 앞에서는 그저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해왔듯이 팔리 모왓의 늑대가 그랬다. 

「울지 않는 늑대」는 팔리 모왓이 늑대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캐나다 아북극의 툰드라 지대 현장에서 홀로 1년간을 지내며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이다. 작품은 그가 큰 늑대 세 마리와 새끼 네 마리로 이루어진 늑대무리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현장에서 만난 이누이트가 들려주는 늑대에 관한 이야기들을 더하여 써 내려간 글이다. 그것은 그가 직접 경험한 늑대의 진짜 모습에 대한 보고서이며, 거대한 자연의 진실과 거기에서 발견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늑대몰살계획을 합법적으로 뒷받침할 증거를 수집하여 보고서를 작성할 임무를 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 그것은 늑대들이 순록을 모조리 죽여버려 사냥터에 순록이 줄어든다는 총포제조회사와 사냥협회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공포와 증오를 불러일으킬 현장감 있는 늑대들의 이미지를 원했으나, 작가가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은 신비하고 고결하기까지 한 늑대들의 본성에 대비되는 추악하고도 잔인한 모피사냥꾼을 비롯한 인간들의 모습이다. 그가 묘사한 늑대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세하고 정교해서 그가 보는 늑대를 마치 나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가 만난 이누이트는 다섯 살 때 늑대굴에서 하루 동안 새끼늑대들과 놀았던 경험을 갖고 있는 늑대의 말까지 알아듣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종족 속에서 내려오는 창세설화를 들려주며 ‘순록과 늑대가 하나이며 모두 인간을 위한 신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한다. 늑대는 병들고 약한 순록을 잡아먹음으로써 순록을 튼튼하게 유지시켜주고, 그럼으로써 자신들도 건강한 순록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만이 그 땅의 생태와 동식물 그리고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이치를 알고 있다. 

오래 전에 이 책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늑대보다는 인간이었다. 늑대의 모습이 이렇게 자세함에도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배경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다시 펼쳐든 책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늑대 그 자체였다. 개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서 마침내 늑대를 발견한 것이다.

개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유일한 동물이다. 사람이 가축으로 길들인 동물들은 꽤 여럿이지만 개와 사람 사이에 생겨난 특별한 관계에까지 도달한 동물은 없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는 어쩌면 가장 쓸모없는 동물일 수도 있다. 힘을 쓰는 것도 아니고, 털이나 가죽이 유용한 것도 아니며, 고기라고 해봐야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개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특별한 지위에 자리잡고 있다. 

특별한 지위란 이런 거다. 사람의 생활권에 들어온 동물들과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일방적인 사육이지만, 개와 사람의 관계에는 협력이라는 요소가 보태진다. 사람은 개와 협력함으로써 인지능력과 행동능력을 자신의 한계 너머로 확장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불가사의하게도 교감과 신뢰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이다. 그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는 다시 늑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물어봐야 한다. 왜 하필이면 늑대였을까? 인간의 협력자로 된 동물이 인간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영장류나 원숭이류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머나먼 늑대였을까? 

늑대에 대하여

짐과 제이미 더쳐 부부는 미국 아이다호 소투스 야생지역에 기증받은 늑대들을 풀어놓고 그 가까이에 천막 캠프를 치고 6년을 살았다. 그들이 그 일을 시작한 것이 멸종되어가는 늑대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동물 다큐를 제작하는 영리회사의 현장감 넘치는 필름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이 제작한 다큐가 여러 대의 카메라와 실감나게 잘 연출된 장치들과 전문적인 촬영기사와 편집자의 솜씨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보면 후자에 가까울 거라는 짐작을 할 뿐이다.

그러나 ‘소투스 무리’라 이름지은 늑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들은 늑대들에게 푹 빠져들었고 2년 예정의 계획은 4년, 6년으로 늘어났으며, 마침내 그들은 늑대들의 친구, 야생동물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들이 제작한 다큐를 보면 늑대들이 사람과 얼마나 친밀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들 부부와 함께 어울리는 늑대들을 보면 그것들이 늑대인지 개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다큐 필름보다 더 의미있는 것은 책이다. 「늑대의 숨겨진 삶」이라는 책은, 그들이 늑대들과 함께 한 생활의 세세한 내용과 늑대무리의 알려지지 않은 습성, 멸종에 이르게 된 원인과 경위, 그리고 늑대의 존재가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들을 선명한 사진과 함께 잘 정리해 놓은 보고서다.

늑대는 떠돌이 짐승이 아니라 정착해 사는 존재다. 늑대는 분명한 경계가 있는 영지의 주인이다. 늑대는 가족을 단위로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 무리의 숫자는 살아가는 영역의 크기와 사냥감의 양과 사냥의 난이도에 달려있다. 무리 중에서는 우두머리 수컷과 암컷만이 유일하게 짝짓기를 하여 새끼들을 낳지만 이들은 구할 수 있는 먹이의 양에 따라 무리의 수를 조절하기도 한다.

늑대는 호랑이처럼 강하지도 않고, 곰처럼 힘이 세지도 않으며, 심지어 먹이감인 가젤이나 순록만큼 빨리 달리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늑대를 상위의 포식자로 자리잡게 한 것은 늑대무리가 갖고 있는 잘 짜인 조직력과 지구력이다. 그러니까 늑대의 힘은 집단에서 나오는 힘이다. 

늑대무리는 서열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고유한 사회를 구축하고 서로에게 깊은 유대감을 가지며, 무리 내의 늙고 병든 늑대를 부양하고 무리가 함께 새끼들을 돌보고 교육한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은 많지만 구성원 전체가 함께 새끼를 기르는 것은 늑대가 유일하다. 늑대는 다양한 자세와 소리와 행동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서열을 표현하고 질서를 유지한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에 있어 우두머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늑대무리의 우두머리는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태어난다고 한다. 늑대무리의 생존과 안전은 거의 우두머리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우두머리는 위험에 가장 민감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어떤 위험에도 가장 먼저 움직이면서 무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늑대무리의 우두머리는 가장 지혜롭고 가장 용감하며 가장 어렵고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무리의 지도자이다.

늑대의 발견

늑대에 관한 이야기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인간들의 사회를 발견한다. 동물학자들은 ‘늑대사회와 인간사회의 지배적인 규칙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말하고, ‘늑대사회를 들여다보면 조화롭게 이루어진 고대의 한 부족을 보는 것만 같다.’고도 이야기한다. 늑대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리를 위해 사냥하며, 자신의 새끼가 아니라 무리의 새끼들을 위해 사냥한다. 늑대무리의 유대관계는 인간만큼이나 끈끈하며, 늑대는 무리와 가족에게 극진한 헌신을 보여주는 철저히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아직 수렵시대에 머물러있었을 때에는 이러한 늑대들의 습성을 잘 알고 이해하며 숭배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늑대의 사냥기술을 예찬하고 모방하고 터득했으며, 몽골인과 돌궐인, 로마인들과 같이 늑대의 후손임을 가리키는 시조설화를 간직한 토착민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늑대와 인간은 비슷한 신체적 한계를 지녔으며 그 한계를 집단의 힘과 고도의 협력으로 뛰어넘는 서로 유사한 존재였던 것이다. 인간과 늑대는 그렇게 수십만년 동안 동일한 생태적 지위를 누리며 공존해왔다. 그런데 불과 수백 년 만에 늑대는 인간의 적, 증오의 대상이 되어 멸종의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팔리 모왓은 ‘유럽과 아시아의 인간들이 수렵의 전통을 포기하고 농부와 목동이 되어버리자, 인간은 이 고대의 공감을 잃어버리고 늑대의 적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문명인은 집단의식 속에서 늑대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제거하고, 대신 병적인 공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사악함으로 가득 찬 조작된 이미지를 심어 늑대에 대한 몰살을 거리낌없이 실행해왔다는 것이다. 

▲ 북아메리카의 늑대사냥 [동영상 「The Wolf OR-7 Expedition」에서 캡처]

북아메리카 늑대의 멸종

북아메리카 늑대의 멸종은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어온 유럽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아메리카의 토착민인 인디언들에게는 수렵시대와 다름없는 늑대와의 유대관계가 존재했다. 더쳐 부부도 ‘대부분의 인디언 문화에서는 늑대를 고귀한 가문의 동물이며 날렵한 사냥꾼이자 따뜻한 털을 가진 동물로 여기고 존경해왔다. 인디언의 전통에서 늑대를 적대적인 동물로 여기는 문화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양을 가축화 하면서부터 늑대에 대한 적대적인 문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특히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퍼지면서 늑대가 확실한 악의 상징으로 되었다. 기독교가 신앙의 모티프로 차용한 ‘목자와 양’의 구도에서 늑대는 사악함과 공포의 이미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늑대를 이교도와 동일시하면서 ‘굶주린 늑대가 양떼를 덮치듯이’ 라는 표현을 상징적인 수사로 사용했고, 그것은 사람들의 늑대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광범위하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7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영국제국주의자들은 고향을 떠나기 전에 이미 그 곳에서 늑대를 전멸시켰다. 양과 목자의 신앙으로 무장하고 양과 소와 말과 같은 가축과 작물의 종자까지 지참하고 아메리카에 들어선 그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낯선 땅은 기독교의 땅으로 점령해야 할 악마의 영역이었으며, 낯선 자연과 동물, 토착인들은 자신들이 가져간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 무찔러야 할 적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심리전이다. 경제적 야망과 종교적 정당화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인디언과 늑대에 대한 전면전을 실행하면서 종교적 정당화는 정치적 정당화로 발전하고 경제적 야망은 포상금과 장려금 사냥꾼들을 대규모로 양산해냈다. 오늘날까지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각 곳에 대한 미국의 침략도 이러한 심리전을 바탕에 깔고 있다.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정당성과 도덕성을 거머쥐고, 쉼없이 자행되는 모든 종류의 침략에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온 심리전의 경험과 기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디언과 늑대는 동일하게 취급되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인디언을 전멸시킨 것과 동일하고도 더 잔혹한 방식으로 늑대들을 전멸시켰다. 덫과 함정은 기본이고 총과 수류탄, 독약, 헬기와 쌍발 비행기까지 아낌없이 사용했다. 자연재해와 돌림병으로 죽은 양들의 사체와, 모피사냥꾼들의 무분별한 순록 사냥으로 남겨진 처참한 현장을 찍은 사진들은 늑대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덫에 걸린 늑대의 아래턱을 절단하고 풀어주어 굶어 죽도록 만들고, 못을 박은 고기덩이로 늑대의 위가 구멍이 나도록 해서 천천히 죽게 하고, 늑대굴에 미끼를 단 낚시를 던져 삼킨 새끼들을 끌어내 죽이고, 독약을 채운 동물사체를 늑대잡이에 상습적으로 사용했으며 옴진드기병을 퍼뜨리는 세균전까지 자행한다. 미국 생물학연구소의 버넌 베일리는 늑대몰살작전을 ‘지금까지 시행된 유해동물 박멸 중에 가장 체계적이고 성공적인 전쟁’이라고 칭했다. 

▲ 북아메리카의 늑대사냥 [동영상 「The Wolf OR-7 Expedition」에서 캡처]

늑대의 멸종, 그 후

그러나 ‘늑대의 멸종, 그 후’를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정부에 소속된 마지막 늑대사냥꾼, 애도 레오폴드라는 사람은 에세이를 썼다. 늑대가 줄어들면 사슴이 늘어나고 사냥꾼들의 천국이 될 거라 믿었던 그는 서부지역에서 최후의 늑대무리가 숨을 거둔 후를 이야기한다. 늑대가 사라지고 사슴이 늘어나고, 사슴이 지나다니는 새로운 길들이 생겨나면서 관목과 묘목들이 죽었다. 먹을 것이 사라진 사슴들은 굶어서 비쩍 마르고 수가 너무 많아져서 결국 죽어버렸다고.

북아메리카의 늑대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뒤늦게 늑대의 진짜 모습과 그 가치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늑대를 복원하고자 활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또 늑대에 대한 어떤 형태의 비극을 내포하고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시아 초원지대의 늑대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치며 거의 사라졌다.

늑대들은 사라지고 개들은 번성했다. 우리는 다시 개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왜 하필이면 늑대였을까’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 초원지대에서 늑대들이 사라지는 이야기 속에서 늑대와 개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거기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 계속…..〉

(수정-24일 오후 5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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