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지만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슈바이처) 

 

 외로움의 폭력 
 - 최승자 

 내 뒤에서 누군가 슬픔의
 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고 있다.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
 무서운 원색의 화면,
 그 배경에 내리는 비
 그 배후에 내리는 피.
 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
 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
 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
 오지 않을 길목에서
 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
 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요즘 학교에서는 ‘교무분장’이 한창이다. 평상시 친하게 지내던 교사들도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된다. 공정한 교무분장은 무엇일까?

 공부모임에 오는 한 교사가 말한다. ‘다들 1/n을 공정, 정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 학교에서는 서로의 입장과 상황을 존중하며 교무분장을 했어요.’

 우리는 ‘1/n의 윤리’에 익숙해져 있다. 버스를 탈 때도 차례대로 타는 것에 아무도 의의를 달지 않는다. 우연히 먼저 와, 자리에 앉게 되는 게 공정,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늦게 와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 그들 각자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중에는 몸이 아픈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젯밤 어떤 일이 있어 몹시 피곤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들 마음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1/n의 윤리는 겉으로는 정의롭고 공정해 보이지만 각자의 처지와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에 사람들을 점점 ‘각자도생’으로 몰아간다. 세상은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는 생지옥이 된다.     

 우리는 모두 ‘외로움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내 뒤에서 누군가 슬픔의/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고 있다.’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무서운 원색의 화면,/그 배경에 내리는 비/그 배후에 내리는 피./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오지 않을 길목에서/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있다. 도심은 타고난 본성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인심은 태어난 후에 만들어지는 ‘자아(自我)의 마음’이다. 자아는 자기중심적이다.  

 도심은 맹자가 말하는 본성의 네 가지 덕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사람은 이런 마음을 지녔기에 남을 사랑하고 의롭게 살고 예를 다하며 지혜롭게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혼자 아무리 진미성찬을 먹고 대궐 같은 집에 살아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외로움에 몸서리친다. 견딜 수 없어 온갖 쾌락을 추구하지만 결국엔 지치고 우울과 권태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1/n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공동체의 꿈을 꿨다. 가족은 서로의 처지와 입장을 완전히 고려하며 살아간다. 능력껏 일하고 각자 필요한 만큼 분배한다.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R. 브라우닝)’이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이러한 지상 천국이 깊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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