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 곧 '통일운동'이라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는 '서울최보따리 인문포럼'은 11월30일 부터 12월1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40여명의 저명인사를 초청해 제3차 동학기행을 실시하였다. 이번 기행은 제1차 울산·경주, 제2차 당진일원에 이어 전라좌도의 핵심 동학활동지인 남원,구례 일원으로 하였다.

용성(龍城)으로 별칭되는 '남원'은 임진왜란시 '만인의총(萬人義冢)' 의 비극이 물들어 있고, 동학농민혁명군의 걸출한 인물인 김개남 장군의 활동 무대였다. 여기서 만일 김개남,전봉준이 합의하고 민보군 박봉양(朴鳳陽)의 배반을 막았다면 그 엄청난 힘은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첫날 광한루 인근, 최제우 선생의 방문 이야기가 있는 기념비에 대한 윤석산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수운 선생이 약재를 처분할 겸 해서 시내(지금 광한루 경내) 서형칠의 약종상집에 오게 되었다.

▲ 광한루 앞 기념비, 향토사학자인 한병옥(남원정신문화연구원)선생이 답사단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광한루 내에는 남원성 4대문 중 남문인 완월루(翫月樓)가 복원 중에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신루(拱宸樓), 망미루(望美樓), 향일루(向日樓)'도 복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경내의 호석(虎石)앞에서 수많은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참형 당한 사실을 지금 관광객들은 모르고 있고 오로지 춘향과 이도령 이야기만 알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권력에 저항한 한 여인의 이야기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광한루도 일제강점기에는 헌병대가 주둔하여 1930년대 까지 누각 1층은 유치장으로, 2층은 집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 호석(虎石)과 광한루 전경.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점심 후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향하였다. 이곳 입구 공원에는 '칼의 노래(劍訣)'비석이 있는데, 그 앞에 서니 호쾌한 수운 선생의 시호(時乎: 때가 왔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이러니는 진왜(眞倭)와 토왜(土倭)가 수운(水雲)을 잡고 죽일 명분을 찾았으나, 도무지 동학도 동국의 학문으로 유불선이라 하지, 영양(英陽)지방 반란에 연계하려니 거기 가지도 않았지, 그래서 이 노래를 집중 분석하여 '비록 목검이라 하나 칼을 가지고 반역을 도모하고 그리고 찬양하는 노래까지 만들었으니.. 사형(?)' 이런 식이 된 건데...

얼마전 통일진보당 이석기 생각이 나서 쓴웃음이 날 지경이고 지금 '검찰사태'와 연계해 보니 기가 막힌 현실에 처연할 뿐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이 ‘칼의 노래’가 ‘동학’에서도 금기시 해서 잊혀졌었는데 최제우 처형을 주도한 대구감사(大邱監司)의 보고서에 잘 나와 있어서 다시 복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룡산성(蛟龍山城)은 조선시대에도 산성이 있었고 그 위에 신라시대 창건이나 사실상 조선중기에 재건한 선국사(善國寺)라는 오래된 작은 사찰이 있고, 그 뒤는 조선 군대의 주둔지로서 지금 발굴 중이었다. 

▲ 동학공원 앞 ‘검결’시비와 교룡산성 홍예문.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300미터 산길을 올라가니 자그만 터가 나오고 그 곳이 ‘은적암’터 라고 했다. 또 뒷편 바위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표식, 옆에는 ‘경인 지부 권철 자 명규(庚寅 知府 權徹 子 命奎)’라는 각자도 있었다. 

뒷편에 넓은 곳은 ‘장류보관소’인데 군대 부식창고였을 것이다. 앞면은 남원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천하의 명당이다.

여기는 수운선생이 5~6개월 계시면서 동학이라는 명칭을 정립하고 동학 활동 계획을 작심한 의미 있는 곳이다. 더구나 팻말에 ‘백용성 스님 출가지’라고 ‘정토회(法輪)’가 세운 푯말이 있다. 기실 백용성은 14세때 여기서 출가했다고 하지만 곧 환속하고 정식 출가처는 ‘해인사’이다. 규모는 건평 10여평이고 방은 한 둘이었다고 한다.

은적암(隱蹟庵, 원명 덕밀암 德密庵)은 수운선생이 명명하고 은적암(隱寂庵)이라하다가 다시 隱蹟庵, 隱跡庵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고쳐서 부른다고 한다. 

여기서 수운선생이 얼마나 있었나 하는 것이 논란이 되는 데 ‘해 넘겨 5개월 인데 풀이 무성하다.’라는 표현을 가지고 윤석산 교수는 '해 넘겨서 5개월이니 10월에 왔으면 3월이고 양력4월이니 풀이 날때'라고 주장하지만 양력 6월로 인정하는 편이 우세하다.

여기서 또 아이러니. 몇 년전 일본군 참전 병사(예비군)의 일지가 발견되어서 보니까 ‘민가를 태우고 동학군을 죽이고 철수, 그런데 상부 명령은 다시가서 동학군 은둔 가능지역은 모두 태우라고 해서 다시 불을 지르니 사찰등도 포함’ 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애초 관군이 태웠다는 가설이 뒤집어졌다. 

그 사찰이란 선국사와 은적암 뿐인데, 선국사는 불탄 흔적이 전혀 없으니 은적암이 그 해당 사찰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은적암의 복원도 천도교,정토회,선국사의 이해가 얽혀 있어 복잡한 느낌이다.

또 그 위 바위가 있는데 ‘산신지위(山神之位)’는 민간신앙 장소로 주둔 병사들도 안녕을 비는 샤머니즘적 장소였다고 한다.  그 옆 ‘권철(權徹)’ 각자(刻字)에 대해 물으니 그냥 낙서라 폄하했지만 필자는 ‘권씨민주종친회보’ 기자로서 관심을 가지고 다시 연구해 볼 생각이다. 

우선 알아낸 것은, 이것은 1830년에 새긴 것이고 권철의 양자(실제는 백부)인 권명규(權命奎)가 부친의 안녕을 기원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울 고관의 자제가 왜 여기까지 와서 각자(刻字)를 했는지는 더 알아봐야한다. 이 부분은 안동권씨대종보에 실을 예정이다.

동학공원에서 ‘검결(劍訣)’시비 이야기를 듣고 시내 강변으로 향하였다. 

요천수(蓼川水)라고 한는데 지금은 작은 개천이지만 한때는 소금배가 다닐 정도였다고 하고 동학군이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동학군의 행정처소인 집강소(執綱所)가 있던 남원관아 자리를 방문하였는데 지금은 남원문화원이 자리잡고 있다. 남원도 춘향전 스토리보다 훨씬 우월한 컨텐츠인 동학혁명군 이야기를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 남원역 부지에 들려서 남원성 북문자리 찾는 작업현장과 저 멀리 원래 만인의총 자리를 바라보며 왜적과의 악연을 되새겼다. 

조명 연합군의 작전 실패로 5,000명의 양민이 학살되었고 더운 8월이니 수습할 수 없는 시신을 그냥 진흙탕에 묻고 묘를 하나로 만들었으니 이 또한 기가 막힐 일이다.  철도도 지금은 시 중심을 지나지 않고 노선을 바꾸었으니 그 옛날 중심 지역은 공동화가 되었다.
 
작년에 1930년대 철도 건설 스토리가 일본 자료실에서 발견되어 소개된 바 있다. 당시 무리하게 선로의 설계를 바꾼 것은 남원주민의 청원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교묘하게 남원성의 흔적을 다 파괴하였다고 한다. 역광장에 ‘삼일운동 기념비’가 서있다.

다음은 본격적으로 김개남(金開男) 장군이 떠나고 난 뒤 농민군이 진을 쳤던 평야와 깃대바위를 보았다. 깃대 바위에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비가 오니 나타 나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인근의 동학농민군 전라좌도 대표로 우도 대표인 전봉준과 비견되는 활동을 했고 신간회 활동과 해방후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하고 6.25 발발후 고령으로 사망한 유태홍(柳泰洪 1867-1950) 의사의 묘를 참배하였다. 

아쉬운 것은 그가 해방후 이런 세상에 남길 이유가 없다고 울분을 토하면서 동학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비석을 보니 ‘義士 유태홍’이라 되어 있으니 이는 어법상 잘못이라 생각했다.

▲ 유태흥 비석과 쪽뚤 벌판, 요천 유적지 표지석.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쪽뚤유적지’는 동학군 1만명이 주둔하면서 훈련하던 곳이나 패전의 아픔이 있다. 

이어 곧 ‘방아치 전투 현장’을 갔다. 방아치는 협곡에 절벽이어서 거기를 넘어 갈 수가 없는 데, 그 협곡으로 동학군이 갔다가 민보군(民保軍: 양반이 조직한 자위대) 대장 박봉양(朴鳳陽)에 의해 패배하고 남원성까지 내어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봉(雲峰縣)에서 보면 평지이나 남원 쪽으로는 완전 절벽이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가야,신라의 접경으로 서로 쟁탈을 벌리기도 하였지만 워낙 지형이 험준하여 공방이 어려우니 자연스럽게 천연의 국경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 남원구역 앞 3.1운동기념비와 남원부 관아터 동학집강소.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여기서 박봉양의 민보군이 돌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성벽을 무너 뜨려서 아래로 굴리니 자연히 그 굉음이 계곡에 퍼지면서 공포스럽고, 그 급경사에서 바위의 가속도는 엄청났을 것이다.

그리고 곧 운봉의 박봉양 공적비를 가보니 박봉양 비석이 거의 신라시대 고비(古碑)같으나 기껏해야 150년이 안된 것이다. 그 이유는 비석이 동네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사용 되다가 수 많은 민중의 방망이 질에 훼손된 뒤에 발견된 탓이다. 이 또한 기묘한 인연이 아닌가 한다. 아마 내용을 아는 민중이 고의로 빨래터에 누여놓고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방아치 전투 기념비와 박봉양 기념비, 깃대바위 표석 大王글자.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그러면 박봉양은 누구인가? 운봉(雲峰縣)의 아전으로 상당한 가렴주구 착취자이며 부자였으니 이를 보전하기 위해 짐짓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강경파인 김개남 장군이 자금을 요구하자 변심하여 자신의 노복 30여명으로 자위대를 만들고 김개남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여기에 경상도 지주 계층이 동학의 확산을 우려하여 금전을 제공하니 그 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났다고 한다. 또 김개남 장군의 정병이 5천명이상 이동하고 없으니 동학군은 지휘자 부재와 작전미흡으로 패배하고 만 것이다.

후에 박봉양은 일본군에게 잡혀 취조 당하고 그 덕에 의병이 되고 애국지사로 등록되었니 이 또한 얄굿은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어 혼란 스럽게 한다. 그가 민병으로 성벽을 허물었다는 죄목도 있어서 전투지역을 왜곡한 기록도 남겼다고도 한다.

그러면 왜 동학군에 대한 인식이 나쁘게 내려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양반·지주 계층이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군을 멸시한데다가 역시 진영논리에 빠진 매천 황현(黃玹, 1856~ 1910)의 기록에 의한 바가 크다. 

황현은 동학군을 동비(東匪:동학도적떼)라고 폄하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도 기득권을 지키려고 민보군(民堡軍)을 만들어 소년 접주 김구(金九)와 대결한 바가 있다.

그리고 동학과는 관련이 적으나 유적지 인근 동편제 마을 앞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파괴장소를 방문하여 그 깨어진 대첩비를 숙연히 바라보았다. 왜(倭)는 고려말 난리를 일으키고 1만명의 병력으로 침입했다가 최무선의 화약에 배가 파괴되자 내륙으로 무작정 들어가니 이성계가 이들을 황산벌에서 격파한다. 그 공적을 기리려고 선조때 운봉현감이 주청하여 새긴 것이 대첩비이다.

황산대첩에서 슬픈 사실은 왜구가 1만명이 상륙했는데 황산벌에서는 1만5천명이 되었다는 것이니, 고려의 부역자가 5천명이나 가담했다는 것이다.

이후 왜구는 지리산까지 들어 갔다가 100여명만 살아서 도망 갔다고 한다.

남원의 동학 유적을 돌며 아쉬운 점은 전봉준과 김개남의 노선차이, 김개남의 강경한 생각이 박봉양이라는 능력있는 인물의 배신으로 귀결되고 그것이 동학혁명군의 패배로 이어 진 것은 실로 안타까운 것이다. 만약 김개남과 전봉준이 합의하고 민보군이 된 박봉양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 엄청난 파괴력은 '민족의 운명'을 바꿀만 했을 것이다.

▲ 운봉면 ‘황산벌 전승 기념비각'과 일제가 폭파한 원래 비석.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동학은 東國(코리아)의 학문으로서 그 평등성과 휴머니티한 가치관은 세계적 보편성 위에 엄존하고 있다. 그것이 민족자존의 3.1운동으로 발휘되고 6.10만세운동, 4.19혁명, 6.29시민혁명, 촛불혁명 정신으로 도도히 살아남아 이제 1만년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민족통일의 대과업을 달성하고,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니 그 사사천(事事天),물물천(物物天)의 사상은 곧 세계최고의 철학으로 자리매김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事事天-천한 일이든 귀한 일이든 열심히 하면 하늘의 뜻이요. 物物天-하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제자리를 찾아서 역할을 하면 하늘의 뜻이라는 것’ 이니 정심(理念)과 성의(實踐)의 정신을 의미한다.

자연사랑, 아이사랑, 남녀평등을 비롯한 이와 같은 선진적인 사상은 '코리언 정신(홍익인간, 제세이화, 대동화평)’의 정화에 다름 아니니 ‘동학 천도교’의 저력이 아닐 까 생각한다.

제3차 동학기행을 마치면서 이 겨레의 앞날에 동학정신의 숭고한 사상이 온누리에 널리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수정-4일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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