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남북 정상이, 올해 북미 정상이 군사분계선(MDL)을 넘나듦으로써 ‘53년 정전체제’는 결정적 균열이 났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쪽에서 문제가 삐져나왔다. 화들짝 놀란 일본이 한편으로는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라는 무리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53년 체제’, 즉 한반도의 분단구조에 기생해온 일본은 따지고 보면 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근원적 책임자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면 패전국도 아닌 우리가 전쟁과 분단을 겪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정전체제가 파열음을 낸 지금 일본이 스스로 본색을 확실히 드러낸 것이다.

아베 정권의 ‘화이트 리스트’ 배제라는 두 번째 수출규제 조치가 취해진 2일,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가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임을 상기시키고 “언제가는 넘어야 할 산”이라며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문 대통령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묻어났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제2차장은 같은 날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아관파천, 가쓰라-태프트밀약, 을사늑약, 한일강제병합을 열거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우리의 평화 프로세스 구축 과정에서 도움보다는 장애를 조성했다”고 각별히 언급했다. 최근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초계기 사건’을 적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자가 현지취재한 2003년부터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당시 일본은 ‘납치자 문제’에 올인하며 회담에 장애만 조성해 각국 취재진의 빈축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2005년 9.19공동성명이 채택됐고, 이에 따라 2007년 2.13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일본만은 끝내 대북 에너지 지원에 불참해 어깃장을 놓았다.

도광양회하며 대국굴기를 꿈꾸던 중국이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마침내 동북아와 국제정치 무대에서 입지를 다진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본은 노골적인 6자회담 훼방꾼으로서 ‘정치 난쟁이’를 자임했다. 전범국의 족쇄인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가기 위해 한반도 문제를 징검다리로 삼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해소된 지 30년이 지나서야 한반도의 ‘53년 체제’가 파열음을 내는 지금, 일본의 역주행이 오히려 우리의 아픈 역사와 현주소를 일깨우고 있다. 외세 탓도 크지만 우리 민족 내부의 분열이 분단을 낳았다면 ‘53년 체제’의 닫힌 문를 열 수 있는 열쇠 역시 우리 민족 내부의 단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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