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족 대표인 조근송(64)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왼족)과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두병(48) 이사가 112주기 추모일을 앞두고 10일 오전 서울 인사동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07년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고종의 밀사 이준이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할복자결했다는 것이다. 그의 비분강개한 할복자결 소식은 온 민족의 가슴을 울렸고, 해방후 첫 열사 기념사업회로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 명망가들의 대대적 참여로 구성됐다.

그러나 112주기를 맞는 오는 14일, 기념사업회와 별도의 ‘이준 열사 순국 추모제전’이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이준 열사 묘역에서 열린다. 주최 단체명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다.

유족 대표인 조근송(64) 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두병(48) 이사가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고 싶다고 제안해 10일 오전 10시 서울 인사동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 자리가 마련됐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2016년부터 별도 추도식을 하고 있다”며 “독립운동하고 거리가 먼 그런 사람들이 이준 할아버지한테 제를 지내는 건데, 제를 지내면 절을 받으시겠느냐. 용납 못 하겠다”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조근송 유족 대표는 이준 열사 맏딸 이송선의 손자다.

▲ 조근송 명예회장은 기념사업회가 분열, 무력화 된 이유를 전재혁 전 회장의 전횡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념사업회가 오늘처럼 쪼개지고 무력화된 것은 2006년 12월부터 최근 6월말까지 12년 6개월 간 회장을 맡아온 전재혁(77) 전임 회장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난달 25일자로 전재혁 전 회장이 내세운 조승현(58) 신임 회장이 등기를 마친 상태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탄원서를 적어서 보훈처에 2017년에 돌렸다. 자기가 쓴 책에 김구 선생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안두희를 의열청년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이준 열사의 이름을 팔아서 당도 만들려고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사법권이 없는 국가보훈처는 자체 해결을 권유할 뿐이었다.

실제로 전재혁 전 회장은 ‘조국21’ 정당을 발기하면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내세우는가 하면, <블루투데이>에 ‘전재혁의 안보공감’ 등을 연재하며 극우 논지를 펴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도 지난해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해방후 만들어진 첫 번째 조직이 이준 열사를 추모하는 일성회(一醒會)라는 조직”이라며 “내려오면서 극우가 장악하게 돼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관련기사 보기]

조근송 명예회장이 특히 분노한 것은 이준 열사 관련 유물과 자료 일체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점이다. “2009년 동교동 사무실 시절에 훈장과 서류를 본 뒤로 본 적이 없다”며 “2011년 신길동으로 옮긴 사무실에서부터 캐비넷이 없었다”고 말했다.

▲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마련된 이준 열사 묘역. 네덜란드 헤이그의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서 1963년 이장해 모셨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는 전재혁 전임 회장에게 6월초 전화로 따져 물었다며 “전재혁 회장이 서류는 모르겠다고 하고 훈장이 어디 갔느냐 하니까 전화를 끊어버렸다”며 “그리고 난 뒤에 급박하게 회장을 넘긴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준 열사의 혼이 담긴 것들이 싸그리 없어져 유족들이 통탄한다”며 “그 많은 사진들도 없고. 추도식 때마다 썼던 훈장도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기념사업회 초기 추도식 때 사용한 유명인사들의 추도사들이 적힌 두루마기 서류들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두병 이사는 2010년부터 기념사업회 회원으로 참여해 2016년 6월 법인 등기이사가 됐고, 전재혁 전 회장과 손발을 맞춰 2017년에는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물론 그해 10월 곧바로 면직처리 됐지만.

▲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두병 이사는 지난달 전재혁 전 회장을 공금유용 및 횡령죄로 고소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고두병 이사는 “2018년 6월에 감사 결과 전재혁 회장이 기념사업회 공금을 유용하고 횡령한 혐의가 포착돼 국가보훈처 기념사업과에 고발장 형태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며 “서울보훈지청으로 불러서 권고조치만 할 뿐 사법처리가 없었다”고 전하고 “6월 25일 내가 전재혁 회장을 공금유용 및 횡령 혐의와 유품이 사라진 것도 횡령혐의로 추가해서 고소장을 강북경찰서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사라진 유품들에 대해서는 “62년도에 추서된 대한민국장과 훈장증, 그 이외에 유품 일체, 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던 서류 일체, 그 외에 기념사업회 보관된 증명사진 포함한 일체”라며 “유족 뜻도 그렇고 기사화 돼서 국민 심판대에 올려서 70년 넘은 단체의 일체 서류를 다 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고소장에 기재된 공금유용과 횡령은 횟수는 많지만 금액은 각각 30만원대 수준에 불과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과 ‘훈장증’을 비롯해 ‘네덜란드 현지 흙’, ‘이준열사 증명사진’, ‘캐비닛 2개 분량’의 문서와 유품이 적시됐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검찰은 한성판관학교를 기준으로 해서 이준 열사를 대한민국 검사 1호로 만들었다. 서울대에서도 한성판관학교를 서울대의 모태로 보고 서울대 1회 졸업생으로 삼았다”며 “김준규 검찰총장 재직시 이준 열사 역사박물관을 대검에 만들면서 이준 열사를 표상으로 내세웠고 표상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검찰조차도 지금의 기념사업회에는 힘을 보태지 않고 있다는 것.

그는 “그간 언론 접촉을 안 했던 이유는 유족 입장에서 너무 창피해서 제 얼굴에 제가 침을 뱉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유품과 과거 역사가 다 없어져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해 보훈처에다 기념사업회 보훈등록을 없애라고 요청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고두병 이사는 “보훈처에 등록된 단체들이 나라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못 받아서 사무실도 없는 단체들이 많다”며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많이 기려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 이준 열사 110주기인 2017년 7월 14일, 서울 안국동 152번지 해영회관 앞에 이준 열사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집터를 찾는데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맨 왼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자료사진 - 통일뉴스]

조근송 명예회장은 “독립운동해서 집안이 망했는데 국가에서는 3대까지에 한해 집안에서 한 사람만 지원해주고 있다. 광복회도 독립운동 후손 중 한 명만 회원으로 받아 준다”며 국가의 보훈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국가유공자와 유가족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라고 믿는다”며 “정부는 국가유공자와 가족의 예우와 복지를 실질화하고, 보훈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준 열사가 걸어간 길>

▲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 준, 이상설, 이위종. [자료사진 - 통일뉴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준(李儁, 1859.1.21.~1907.7.14.) 열사는 1895년 37세 때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졸업(제1회)한 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됐고, 탐관오리들과 마찰을 빚다가 모함을 받아 33일 만에 면관 당했다.

1896년 38세 때 「독립협회」 평의장 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 1898년 40세 때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독립협회」에 다시 가담하여 독립협회를 「만민공동회」로 개칭하고, 저항운동을 본격화하다 투옥 당하기도 했다.

1902년 44세 때 비밀결사 개혁당 결성에 앞장섰고, 1904년 46세 때 매국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맞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민권확립에 힘쓰다 검거돼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황주의 고도(孤島)인 철도(鐵島)에 정배당하기도 했다.

1905년 47세 때 이준 열사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아리스'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제창했고, 1906년 48세 때 이준 열사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정부에 ‘國政 구폐 진언서'를 제출했다.

「국민교육회」 회장을 맡아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건국대학교 전신), 「광신중상업고등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준 열사는 평리원 검사를 잠시 거쳐 곧 특별법 원 검사에 취임했고, 1907년 49세에 「국채보상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5월 고종황제의 위임장인 밀조(密詔)를 봉대한 특사가 되어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하여 1907년 5월 21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38세)을 만나 시베리아를 거쳐 ‘페테스브르크'에서 이위종(21세)과 합류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1907년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3인의 사절은 헤이그에서 각국 대표와 언론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 그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고,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였으나 열국의 냉담한 반응에 할복 자결로 대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사망에 대해 병사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광복 후 아들 이용 장군과 독립투사 함태영(뒤에 부통령이됨)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서거 55년째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1963년 10월 4일 헤이그에서 열사의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묘소에 안장하였다.

 

(수정,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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