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출신으로 빨치산 활동을 한 유기진 선생이 26일 타계했다. 향년 94세. 1925년생이니 비슷한 처지의 작고한 ‘남로당 연구’의 저자 김남식, 그리고 생존해 있는 ‘남도빨치산’의 저자 정관호 선생과 동갑이다.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듯이 그에게도 마지막 소원이 있었다. 북송(北送)이다. 그는 2차 송환 희망자였다. 이제 영면에 들었기에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그의 소원은 고향을 찾고 자식을 만나겠다는 게 아니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고인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해 낙동강 2차 도하작전에 참가했으며 이후 회문산에 입산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4년 토벌대에 체포됐다. 명백한 전쟁포로였다. 그러나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청주형무소로 옮겨졌다. 7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37세인 1961년에 출소했으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970년부터 남측에서 제2의 인생인 택시운전을 시작해 장장 40년 동안 이어졌다. 그가 기사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라’는 평소의 지론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에겐 택시기사가 곧 활동가였고 작은 캡슐 안에서 만나는 손님이 대중이었다.

보디빌딩을 해 균형 잡힌 몸매의 소유자인 그는 다부진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도 여느 장기수들처럼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6.15산악회 초기 회원으로 참가해 매번 최고령자 산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90세가 넘어서도 영원히 산을 탈 것만 같았던 그도 2-3년 전부터는 세월을 이길 수 없음인지 산행이 뜸해졌다. 언젠가 6.15산악회에서 매년 말에 수상하는 우수회원에 뽑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최현 장군의 부대원이었다. 최현 장군이 ‘매사에 성실하라’고 늘상 말했다. 나는 그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갖고 살았다.”

그는 ‘천생(天生) 인민군’이었다. 생전에 ‘죽어서도 영원한’ 인민군 출신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인민군 장교 교육을 받고 참전했으며, 빨치산 생활을 통해서도 ‘인민군으로서의 긍지와 책임’을 다했다. 중상을 입고 후퇴 명령을 따르다 고립되어 체포될 때도 인민군복을 입은 채 붙잡혔다. 군인 신분이기에 체포됐을 때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송되어야 했지만 빨치산으로 처리돼, 옥고를 치렀다. 그러기에 그는 아직 제대를 못한 현역이었다. 특명을 받고 전역을 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송환을 원했던 이유다.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 된 그는 북쪽으로 갈 수 있을까? ‘천생 인민군’ 유기진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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