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합의문을 내지 못하고 결렬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기대를 모았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정상회담(2.27~28)이 결렬되자 문득 몇 차례의 파탄난 한반도 평화의 결정적 계기들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결정적 시점에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고,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목전에 두고 부통령 앨 고어 후보의 대통령선거 재검표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5년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채택되고 방코델타아시아(BDA)라는 걸림돌을 넘어 2007년 2.13합의와 10.3합의까지 이뤘고, 노무현 대통령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10.4선언까지 발표했지만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넘어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세계적으로 냉전의 벽이 허물어진 지 만 30년, 한 세대가 흐르도록 유독 한반도만 냉전과 분단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1953년 한국전쟁 ‘정전’ 상태인 이른바 ‘53년 체제’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함석헌 선생처럼 숨겨진 하늘의 ‘뜻’으로 보자면 우리 민족은 엄혹한 시련을 거듭 겪으며 단련되고 각성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역사에 ‘우연’이나 ‘만약’이 없다면 역사의 ‘필연’을 곱씹어볼 필요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되고 ‘하노이 북미공동성명’이 발표될 것으로 기대감이 높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노 딜’(no deal)을 택해 뒷통수를 쳤다. 한마디로 한반도 평화 문제가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밀쳐지거나 내팽개쳐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똑똑히 목도한 셈이다. 하노이 회담에 대한 높은 기대감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특정인을 빼놓고는 출발부터 성립되지 않았던 점도 분명히 짚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긴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가깝고 인상적인 사례로는 9.11테러와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2006년 미군 전범재판에서 사형당했다. 핵을 포기하고도 리비아의 무아마르 가다피 국가원수는 2011년 미군이 지원한 반군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문제는 한반도 평화를 책임져야 할 남과 북이다.

미국 CNN 방송의 사후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하루 전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고위급 접촉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유엔제재 일부 해제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성명에 서명하지 않고 협상장을 떠나려 하자 허둥지둥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심야 기자회견에 이어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불평조의 언론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상황파악 없는 낙관과 수습에는 별 도움도 안 되는 자존심 깎이는 모습까지 노출한 것.

중재자를 자임한 한국의 역할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측이 접촉에 나서지 않아도 파트너인 강경화 외교장관을 찾지 않았다. 존 볼튼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회담장인 하노이로 향하는 중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만나기로 해놓고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보국장을 끌어들여 한미일 3자회동을 역제안해 사실상 회동을 무산시키고 제 갈길을 갔다.

▲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신한반도 체제' 비전을 제시했지만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인해 맥이 빠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을 목전에 둔 지난달 25일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며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전쟁과 대립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진영과 이념에서 경제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신한반도 체제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겠다”고 기세를 올렸다. 하노이 회담이 진행 중이던 28일에는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국가안보실 2차장에 임명해 이후 남북경협에 대한 포석을 놓기도 했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성공을 전제로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야심차게 제시하려 했던 ‘신한반도 체제’는 맥이 빠졌고, 아직도 한반도의 주인은 남과 북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각축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만 또렷이 부각됐다.

여기에 더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자 쌍수를 들어 가장 환영한 곳은 일본이었고, 볼튼으로 상징되는 미국 강경파와 일본 네크워크가 하노이 회담 일정에 맞춰 미국 하원 청문회에 ‘코언 증언’을 기획했는가 하면, VOX 뉴스에 합의문 초안을 흘려 판을 흔들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또한 북한이 상응조치로 남북경협을 넘어선 민수분야 유엔제재 해제를 들고 나온 데는 중국의 희망사항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물론 사실관계를 입증할 구체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전개된 지 100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 하노이 회담 결렬은 남과 북 모두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우리의 역량이 얼마나 준비돼 있느냐고.

북한은 하노이 회담에 대한 ‘총화’를 거쳐 대응방안을 마련한 뒤 다시 대화의 장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일정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된다. 일각에서 우려하듯 인공위성 발사 등 모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6,7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꾼대회 참가자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6,7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꾼대회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수령의 혁명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 된다”면서 “사상사업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도식과 경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90대의 김기남이 당 중앙위원회 고문 자격으로 김 위원장의 서한을 전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신비화와 도식·경직을 넘어선 객관적 총화와 합리적 대응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면서 “우리가 중재안을 마련하기 전에 보다 더 급선무는 미국과 북한 모두 대화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어렵게 여기까지 왔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북미 모두 대화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북미가 인내심을 갖고 이탈하지 않도록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제재의 틀 안에서 (남북)공동선언의 주요 사업을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겠다”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에 대해 “재개 방안을 마련해서 미국과의 협의를 준비하겠다”고 보고했다. 미국의 ‘승인’ 없이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는 불가능하다는 실토인 셈이다.

문 대통령은 10~16일 예정돼 있던 아세안 3개국 순방에 올랐고, 순방에 앞서 8일 통일부 장관에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을 지명했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 장밋빛 기대감 만 잔뜩 심어주고 정작 어떤 중재역도 해내지 못한 외교안보라인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실정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8일 문 대통령의 개각을 발표하면서 “이번 개각은 문재인 정부의 중반기를 맞아서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위해서는 능력이 검증된 인사를 발탁한다,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정부의 남북관계 정책 등에 대해서는 “변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능력이 검증된 인사’들이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담당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이 필요한 때다. 남과 북이 ‘하노이와 트럼프’ 문턱을 넘지 못하면 ‘53년 체제’는 그만큼 오래 지속될 것이다. 남북간의 의사소통과 협력도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임에 틀림없다. 남북협력을 넘어 남북공조가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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