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Daum영화]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한번 건넌 길을 되돌아 올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질문 자체가 좀 우습거나 어리석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좋은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이 훅 치고 들어오는 순간 심장을 찔린 것처럼 움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한때 공익을 위해 열정을 바쳐 왔으나 이제는 몸에 ‘때’를 묻히는 다른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양순호 변호사의 회심에 내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다행히도 그는 멀리 가지 않았다. 이건 중요한 문제이다. 그가 이미 멀리 갔다면 돌아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고, 더 많은 시간과 고뇌와 어떤 확실하고 결정적인 동기들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대형 로펌의 말석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때 인권 옹호와 공익 수호를 위해 불태웠던 자신의 유능함을 활용하여 이제 막 발돋움을 하려는 찰나. 물론 그래서 더 고민이 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래도 진창 속에 몸을 다 담그지는 않은 상태이다.

더구나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 예전의 길에 남아 있다. 자식이 변호사가 되는 것보다 바르게 자라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아버지가 있고, 15대 1의 뻔히 질 싸움을 하면서도 실익보다는 정의를 위하여 물러서지 않는 친구가 있다. 사람이 누구와 함께하는지는 이래서 중요하다.

▲ [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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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출세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떠맡은 일에서 손톱 밑의 가시처럼 숨어 있던 양심을 건드리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 한 변호사를 통해 관객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장애아를 키우느라 힘겨운 엄마는 늘 화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이를 사랑한다. 웃는 모습으로 곁을 지켜주는 듯이 보였던 친구는 사실은 친구를 괴롭히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표정을 통해서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복잡하여 표정으로는 알 수 없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주변의 평판이나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궤적조차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허약한 존재이고,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인간의 이기심은 그 허약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서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에게 ‘좋은 사람’이 이해관계를 같이하지 않는 타인들에게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 [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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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에게는 선량하고 성실하여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그럴 사람’이 되기도 한다. 겉보기에 점잖고 합리적으로 보였던 사람이 알고 보면 돈에 눈이 멀어 패륜도 서슴지 않는 인간 쓰레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진실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 그 어디엔가 숨어 있다.

주인공 역시 다르지 않다. 누구보다도 인권 문제에 민감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착한 아들, 다감한 남친이지만, 법정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인격을 함부로 모독하는 비열한 인간으로 표변한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순간, 그는 그저 돈을 위해서 다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다른 길이 자신을 다른 가치와 다른 인격으로 변절시켰음을 느끼고 당황한다.

그가 그 순간 자신을 합리화했다면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손톱 밑의 가시가 고개를 들고 그에게 제동을 걸었으며, 그는 멈췄다. 그리고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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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변호사의 회심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은 자폐증을 지닌 장애아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장애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살인 사건의 진실을 밝혀 가는 과정에서 진실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인 증인이 자폐 장애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장애를 다루는 영화도 흔치 않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보기 드물다.

장애를 다루는 영화는 대개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규정짓는 사회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장애인들의 애환에 초점을 맞춘다. 결론은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르다. 장애와는 아무 상관없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웃의 유일한 목격자가 증언을 했다. 그런데 자폐에 대해 1도 모르는 양 변호사에게 이 증인은 당황스럽다. 아무리 봐도 어린애 헛소리 같은데 증거 능력이 있다고 하는 데다, 그 증언의 내용은 자신의 의뢰인에게 불리하니,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는 이 증언의 실체에 다가가 증언의 효력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안 되는 증인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장애를 가진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정상인’이다. 자폐아 지우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즉 장애인이 ‘정상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시공간을 공유하고 서로 얽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화두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올바른 소통의 자세라고 말한다. 지우가 그러했듯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정상인 척' 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많은 ‘다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 [출처-Daum영화]

영화는 재판에 이길 욕심으로 자폐아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양 변호사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럼으로써 역시 자폐에 무지한 관객에게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같은 낯선 단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자폐 장애의 증상과 특징을 관찰하게 하고, 장애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소통법을 배우게 한다.

장애 문제에 관심이 없던 양 변호사가 자신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자폐 장애에 대해 공부할 때 관객 역시 양 변호사에 자신을 이입하며 열심히 자폐 장애를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교육적 효과는 대단하다. 영화는 가히 장애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교과서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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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인 줄 알았던 딸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장애만 아니었던들” 하며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 그건 지우가 아니죠”라고 장애를 포함하여 온전한 그 전체로 아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우 엄마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적이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며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비장애인이 양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폐가 지우의 일부가 아니라 지우의 정체성을 형성하듯이, 장애인도 이 사회가 수용해야 할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애초부터 이 사회의 온전하고 당당한 주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는 이 사회가 다름을 포용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회인지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척도이다. 

지우 엄마 식으로 말한다면, 장애인 학교를 세우기 위해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럼 그건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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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의 결말은 희망적이다. 깜빡거리는 전구 같던 양 변호사는 제 빛을 찾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신애는 지우에게 사과를 하고, 오미란 씨의 진실은 밝혀진다.

 “대한민국에서 성공하려면 적당히 때가 묻어야 된다”고들 말하는 사회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답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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