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다사다난했다. 남북정상의 만남은 올 한 해를 훈훈하게 한 대표적 사건이다. 한 번도 아닌 세 차례의 만남은 민족적 관심을 넘어 세계적 주목을 끌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통한 세 번째 만남은 더더욱 감격적이었다.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는 말에서 가슴 뭉클했고, 두 정상이 함께 한 백두산 등정에서는 우리가 왜 한민족인가를 곱씹게 했다.

아쉬움도 남는다. 5천년의 의미야 뒤로 치고라도, 백두산에 담긴 의미의 본질에 대해 그 어떤 매체나 기관에서도 언급해주지 않았다. 그저 문대통령이 그곳 비행장까지 공군1호기를 탔느냐 2호기를 탔느냐가 관심사였고, 바로 오느냐 평양을 경유해 오느냐에 주목할 뿐이었다. 한편에서는 통일의 필요성을 적극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둥, 또 한 쪽에서는 북한의 혁명놀음에 놀아났을 뿐이라는 둥, 이념 갈등에 따른 평가만으로 뒤숭숭했다. 통일 상징으로서의 백두산의 의미가 차고 넘침에도, 진정 남북지도자가 백두산행을 택한 의미를 조금도 풀어주지 못했다.

북한 리설주 여사는 “우리나라 옛말에 백두에서 해맞이를 하고, 한라에서 통일을 맞이한다는 말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백두산은 단순히 해맞이 하는 곳이 아니다. 얼마 전, 우리 문체부 장관도 백두산 트레킹 코스 개발 운운했으나, 그곳이 관광수지(觀光收支)만으로 저울질될 곳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민족에 있어 백두산은 남다른 곳이다. 우리 문화의 원형에 가장 깊고 진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백두산이다. 융(Carl Gustav Jung)의 말을 빌리자면, 원형은 순수하고 거짓 없는 성질이며 너무도 무의식적이어서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백두산은 태백산이란 이름과 병칭해 왔다. 태백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초기 영토 확장과정과 발해 건국과정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처음 등장한다. 또한 백두산에 대한 첫 문헌기록은 『삼국유사』다. 통일신라시대 오대산의 불교 관련 내용을 설명하는 가운데 “오대산은 곧 백두산의 근맥(根脈)이다”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백두산은 동방 역사지리에 있어 부채의 사북으로. 지리적·역사적·철학적·종교적 의미가 착종되는 곳이다. “동방 대륙에 있어서 가장 높은 산이 무엇입니까. 가장 웅장한 산이 무엇입니까. 가장 신성한 산이 무엇입니까. 가장 역사상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 산이 무엇입니까. 가로대 백두산이 그것입니다”라는 최남선의 언설로도 암시받을 수 있다.

정인보는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드높은 백두산과 장대한 송화강을 터전으로 삼아 조선을 세우니 우리 겨레가 단군에게서 비롯되었고 우리의 정치와 교화가 단군에게서 시작되었다. 사실 우리 선조들이 후손에게 남긴 자취들은 모두 단군으로부터 유래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고 단군과 백두산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백두산 신시(神市)는 당시에 있어서 하나의 큰 도시를 나타내고, 또 훈융한 공동생활체로서의 사회조직을 의미는 것으로, 그 신시는 신의 질서로 엮어진 이상정치사회(理想政治社會)라는 것이 현상윤의 철학적 해석이다. 한편 문학에서는 어떨까. 이어령은 백두산 신시야말로 우리들의 고향, 수 천 년 동안 마음속에 그려오던 잃어버린 그 고향이라 했다, 희랍사람들의 꿈을 키워온 것이 올림포스의 산언덕이라 한다면, 한국인의 본뜻을 아로새겨 놓은 곳이 바로 백두산의 신시라는 것이다. 우리의 ‘원초적 고향(home-sick)’인 동시에 ‘가야할 고향(nostalgia)’임을 알게 해 준다.

백두산의 종교적 상징 또한 넘쳐난다.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말처럼, 거룩한 산은 지상을 천상과 접촉시키는 ‘세계의 축(axis mundi)’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천상에 닿아 있으며 세계의 가장 높은 지점을 표시하기도 한다. 백두산은 우리 소도신앙(蘇塗信仰)의 효시(嚆矢)요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곳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자 신과 인간의 교통로다. 그곳에 존재하는 신단수(神檀樹, Sacredtree) 역시 우주수(宇宙樹)로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백두산은 천국의 출장소로 지구의 배꼽인 셈이다. 『규원사화』에 실린 다음 내용은 그러한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다.

“태백산(백두산-인용자 주)은 신시씨가 오르내린 신령한 땅이며, 단군이 임금 자리를 계승하고 시작한 땅이기에 제사 또한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국전(國典)이 되었다. 때문에 옛 임금들은 반드시 먼저 상제, 그리고 단군삼신을 공경하여 섬기는 것으로 도를 삼았다.”

백두산은 근대 한민족정체성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대종교가 출범(1909년)과 더불어 그 역사적 의미를 넘어 다양한 의미로 표출되었다. 대종교의 전신이라 할 신교(神敎)의 발상지이면서 역사적 활동무대인 동시에, 대종교 중광(重光-거듭 일어남)의 계기를 만든 성지였다. 또한 중광의 헌장이라 할 「단군교포명서」는 물론, 포교의 근본이 되는 경전(經典) 역시 이곳을 근거로 유포되었다.

대 제천의 출발 역시 백두산으로부터다.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이 1914년 음 6월 9일, 7백년 폐관되었던 팔관을 복원하며 백두산 천제를 올린 것이 그 효시다. 조선은 유교의 종주국이자 천자국인 중국에게 신교(단군신앙)의 오랜 전통이자 자주국권의 상징인 제천권을 박탈당했다. 이것은 전통사회에서 하늘과 교통하는 최고의 수단이 차단된 것으로, 천손의식이나 배달민족의 관념을 상실한 정체성의 붕괴와도 맞닿았다. 나철의 백두산 제천은 무너진 정체성의 부활이었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에서도 백두산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심지였으며 조국광복의 상징적 거울이었다. 대종교 등장 이후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항일전선에서 유명을 달리한 공간이 이곳이다. 박은식이 과거 노예의 역사를 한탄하며 개과천선의 통곡을 한 곳도 이곳이며, 김승학이 품었던 배달국이상향의 꿈도 이 공간에서 움텄다.

김좌진이 작사한 노래가사도 주목된다. “한밝뫼재 비낀 달에 칼을 뽑을 제 / 바위라도 한 번 치면 부숴지리라”는 「승리행진곡」의 한 구절이 그것이다. 북로군정서군이 청산리전투를 전후하여 부른 노래다. 백두산의 정기를 업고 일제를 깨부수자는 비장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북간도 독립군들이 10월 상달이 되면 백두산을 향해 제천보본했다는 이범석의 증언이 더욱 관심을 끈다. 어려운 재정에도 돌로 제단을 쌓고 돼지와 소를 잡아 하늘에 고천하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다는 것이다.

또한 백두산의 상징성은 종교를 넘어서 공감되었다. 김약연이 설립한 명동학교의 교가 1절에 “흰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 한배검이 끼치신 이 터에 / 그 씨와 크신 뜻 /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라는 가사가 나온다. ‘흰뫼’는 물론 백두산이며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순우리말이다. 기독교적 공간에서도 조국독립의 정신 에너지를 백두산과 단군에서 찾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편 백두산을 그들의 상징으로 만들려 한 일제의 흑심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정체성의 중심인 백두산의 상징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였다. 일제가 백두산에 신궁(神宮) 건설을 통하여 동북아식민지의 완성을 꿈꾸었던 내용이 이와모토 요시후미(岩本善文)의 기록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岩本善文, 『北鮮の開拓』, 北鮮の開拓編輯社(朝鮮·京城), 1928.] 그는 백두산을 동북아 여러 민족 수호신으로 보았다. 또한 중국에서도 백두산은 무함(巫咸)의 영봉(靈峰)이며 군봉(群峰)의 으뜸으로, 외경(畏敬)이 서린 영산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중국을 통틀어 백두산만한 존재가 어디 있겠느냐는 반문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두산이야말로 극동민족의 융합귀일(融合歸一)을 암시하는 최고의 상징성을 가진 산이라는 시각이다. 다음 이와모토의 신궁 건립의 의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이곳 백두산에 신궁을 짓고, 이 영산의 신비한 힘으로 정신적 결합을 도모할 것을 제창한다. 그리고 신궁의 제신(祭神)으로는, (1)일본 건국의 제신(天神五代·神代七代)‧천조황대신, (2)중국의 요순 및 주왕실의 문왕·주공, (3)단군과 기자, (4)공자·맹자, (5)신라 혁거세, (6)고구려 동명왕, (7)발해의 시조, (8)금나라의 완안씨 영가(盈歌)와 아골타, (9)조선의 원조(遠祖) 및 시조, (10)청나라의 원조(遠祖)와 누루하치 등의 10종의 신체(神體)를 합사(合祀)한다.”

이와모토는 일본의 건국신들을 으뜸으로 세우고 다음으로 중국 신위를 내세웠다. 우리 단군의 위계는 그 다음이다. 백두산의 주인공인 단군을 들러리로 전락시키고, 일본 건국신들의 공간으로 치환시키려는 복심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정신의 처음이자 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백두산의 상징성을 무너뜨림으로써, 식민지의 완성을 도모한 것이다.

이렇듯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정체성의 상징적 대유물이다. 우리의 역사‧철학‧문학의 원형이 잉태된 곳이며, 단군으로부터 누천년 이어온 종교적 성지이기도 하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 동력원이었던 동시에, 식민지 완성을 위해 일제가 무너뜨리려 한 마지막 성역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백두산이 시공을 넘어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과거와 현재가 그랬듯, 미래의 화합 역시 그 의미 속에 녹아 흐를 것이다. 그 시간에서는 어제와 오늘이 없었고 그 공간에서는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졌다. 보수니 진보니, 좌니 우니 하는 이념놀음도 신지씨(神誌氏)가 형량한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의 저울 앞에서는 그저 탕평으로 어우러질 뿐이다. 다투며 어울릴 수밖에 없었고 떨어지며 합치는 것이 이치였으며, 흔들리며 안정해 온 것이 백두산이 상징하는 질서였다. 고루 이극로가 예찬한 백두산 천지(天池)의 후덕함에서도 그 의미가 와 닿는다.

“산마루에 한울못물은 바다같이 크고 깊도다 / 저와 같이 우리 마음도 너그럽게 가져봅시다 / 송화강과 두만 압록강 이 못물에 근원 두어서 / 끊임없이 흘러 나가니 우리 믿음 끝이 없도다”(「성지태백산」)

복도 지어야 오는 법이다. 기도도 간절할 때 하늘을 뚫는다. 지성이면 감천이 그 말 아닌가. 우리 선인들이 누 천년을 기대어 온 ‘땅 위의 하늘집[地上天宮]’이 백두산이다. 그래서 기도해 본다. 통일이 우리의 간절한 정성으로 앞당겨 질 수 있다면 백두산의 영험만큼 기댈 곳이 어디 있을까.

백두산의 영험에는 남북이 없다. 그 음덕에 기댄다고 해서 이견인들 있으랴. 그저 단군할아버지 앞장서고 동명성왕, 발해고왕 좌우에 서시라. 그리고 홍암나자(弘巖羅子)의 지극 정성을 빌어 염원해 보자. “통일이여, 백두산의 영험을 품고 오라!” 그렇게 무술년 세밑에 기도해 본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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