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정 / 6.15산악회 회원, 615합창단 단원

 

그때가 생각나오.
주위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녹음으로 뒤덮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함께 재잘재잘 행복하게 떠들며 산에 오르던 많은 사람들. 얼굴을 한껏 치켜들어 숨을 깊이 들이쉬며 내 안을 관악산 기운으로 가득 채우던 내 이십대 시절 말이오.

돌이켜보면 그때는 나를 감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내가 함께 하던 모든 사람들도 아름답고, 내가 불태웠던 열정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소.

그대에게 지나가는 푸념처럼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소.
내 서울에 올라온 지 이십 몇 년을 훌쩍 넘겼소만 서울 안에 있는 산, 서울에 걸쳐져 있는 산, 서울 근교의 산, 이런 많은 산들 중에서 유일하게 못 가본 산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아름다운 품속에서 몇 년을 일하고도, 늘 곁에 두고도 오르지 못한 산이었소.
이런저런 산악회와 지인들과 여러 모임에서 몇 번의 산행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기회가 닿지 않아 대면하지 못한 산이었다오.

비로소 그 산을 가보았소.
눈부신 녹음도 아니고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단풍도 아니었지만 번번이 엇갈린 운명으로 만나지 못한 연인을 겨우 만난 듯 묘한 기분이 들더이다. 참으로 좋았소.

11월 18일 낙성대역에서 만나 올랐다가 사당으로 내려온다기에 소빈이를 데리고 사당까지 차를 가져가서 주차하고 다시 전철을 타고 낙성대로 거슬러 갔소.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눈이 바빠지는 재래시장에서 맛난 안주거리를 사들고 오르기 시작했다오.

▲ 산에 오르기 전 재래시장에서 맛난 안주거리를 사들었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어렸을 때는 곧잘 걸었던 딸이 불평 없이 잘 걸을 수 있으려나 걱정이 됐소만 기우였소.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오르막에서 몇 걸음 걷고 나면 주위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자아내고야마는 내 숨소리에 비하면 소빈이는 날아다니는 듯 보였소.

처음 올라본 산이라 같은 서울을 보는데도 신기했소. 그 품에 쏘옥 안겨있는 예전의 일터 또한 산위에서 내려다보니 다르게 보이더이다.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사를 토닥이며 손을 내밀고 있는 산줄기였소.

▲ 관악산 산줄기.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사를 토닥이며 손을 내밀고 있는 산줄기와 같다. [사진제공-6.15산악회]

능선을 타고 쭈욱 올라 사당과 연주대의 갈림길에서 김재선 대장님의 훌륭하지만 아침의 내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든 선택이 있었소.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내 산에 오르면 되도록이면 정상을 꼭 오르고야 말려는 신념을 말이오.

일행과 산행시간을 보아하니 연주대에 올라도 무리가 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신 대장님에게 내 평소의 신념이 아니었더라면 사당에 받쳐둔 나의 애마를 끌고 오라고 등 떠밀 뻔하였소. 제발 성질 죽이라고 걱정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여 내... 참았소.

▲ 정상 연주대를 향하여. [사진제공-6.15산악회]

그리하여 연주대에 올랐소.
이 길 저 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길로 서로 다르게 오르긴 했지만 결국 같은 곳에 다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소. 그것이 무엇이라고 큼지막하게 ‘관악산’이라고 새겨놓은 커다란 돌덩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더이다.

뭐라? 나도 그렇게 했어야 된다는 것이오? 어제 먹은 것도 겨우 기억해내는 본인을 생각하면 어딜 다녀왔는지도 틀림없이 잊을 터이니 줄을 섰어야 된다는 말이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대가 옳소.
관악산은 그 거대한 기상관측소를 빼면 다 좋았소.

▲ 관악산 정상 연주대에서. [사진제공-6.15산악회]

연주대에서 조금 내려오니 생각보다 큰 연주암이 있었소. 그만한 규모의 절은 산의 초입이나 중턱, 그 사이에 있던데 연주암은 정상 가까이 자리 잡고 있더이다. 아마도 작은 암자였던 곳이 계속 증축해서 이만한 규모가 되지 않았나 싶소.

기도발이 잘 먹힌다는데 온 마음을 담아 기도 하나 하고 올 걸 후회가 되오. 하지만 다음에 같이 가서 기도 실컷 하면 된다는 그대의 위로를 믿고 겨우 한 번 오른 이 산을 다시 오를 기회가 또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보오.

내려오다가 드디어 점심 먹기 좋은 터를 잡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소.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기 시작은 했지만 너무 추운 날씨 탓에 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몸에 온기가 돌까 싶어 애꿎은 막걸리만 잔뜩 먹었소.

소빈이는 따뜻해서 그랬는지 컵라면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걸음을 멈춘 몸에 한기가 밀려들어 힘들여 싸간 술들도 다 처치하지 못하고 서둘러 정리한 후 하산하기 시작했소.

▲ 점심시간. 몸에 온기가 돌까 싶어 애꿎은 막걸리만 잔뜩 먹다.[사진제공-6.15산악회]

하지만 615산악회가 어떤 조직이오? 중간에 또 좋은 터를 골라내더니 산상강연은 빠질 수 없다며 사람들을 주저앉히더이다.

다행히도 통일뉴스의 이계환 대표가 요즘 정세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내 추위를 잠깐 잊게 해주었소. 그래도 그렇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맛뵈기로 보여준다며 찔끔 얘기줄 땐 내 그 양반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도 싶었소만 그러다 맞아죽는다는 그대의 걱정이 맴돌아 또... 참았소.

▲ 하산길 중턱에서 자리 잡고 산상강연. [사진제공-6.15산악회]

강연을 마치고 어느 산을 오르던지 ‘껌이지’ 하며 등산에 신공을 보이는 합창단의 지휘자님과 함께 초간단 노래 한 곡을 선사하고 궁금하면 정기연주회에 오라며 또 티켓장사를 하는 뻔뻔한 합창단원들과 과천으로 내려왔을 땐 뜻하지 않은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소.
절로 탄성이 나오게 하는 아름다운 단풍길...

다음엔 그대와 아름다운 길들을 함께 걷고 싶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고? 내내 헥헥 거리는 숨소리 참아내며 함께 걸었는데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거 참... 뭘 그리 성을 내시오. 알콜성 치매이니 그대도 조심하시오.

▲ 절로 탄성이 나오게 하는 과천의 아름다운 단풍길. [사진제공-6.15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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