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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통일이 된다...그것만 되면 하늘나라에서도 춤추겠다." 유럽한민족연대 이종현 상임고문과 부인 우즐라 리 여사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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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19  23: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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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6년 5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입국불허와 강제추방을 당했던 이종현 유럽한민족연대 상임고문이 올해 5.18기념재단 초청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출국을 이틀 앞둔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시 대화역 인근 공원에서 이 고문과 부인 우즐라 리 여사를 만났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11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대화역 인근 커피숍. 얼핏 백발의 뒷 모습으로만 보였던 한 벽안의 여성이 혼자 다소곳이 앉아있는 걸 보고는 여기구나 싶었다.

독일에서 온 우즐라 리(Ursla Rhee) 여사. 이날 인터뷰를 하기로 한 유럽한민족연대 이종현 상임고문과 50년을 함께 살고 계신 분이다.

이종현 상임고문과 우즐라 리 여사는 지난 2016년 5.18기념행사 초청을 받고 귀국했다가 박근혜 정부로부터 입국거부와 강제추방을 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2년이 지난 올해 5.18기념재단은 이들을 '재유럽 오월민중제를 대표하여' 다시 초청했다.

1980년 5월 독일TV에 나온 광주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거리로 뛰쳐나와 학살을 멈추라고 울부짖었던 많은 이들, 1981년부터 지금까지 38년 동안 한 해도 빼지 않고 2박3일 일정의 '5월민중제'를 개최한 그들을 대표해 촛불시민이 이 고문과 우줄라 여사를 올해 5.18기념행사에 다시 초청한 것이다.

두 분은 5.18기념행사에 두루 참석하고 장흥, 부산, 통영, 서울 등 전국을 다니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출국을 이틀 앞두고 내일이면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11일 오후 이 고문의 동생이 사는 고양시 대화역 부근에서 두 분을 만났다.

파독 광부 출신 이종현의 53년 독일사
 
두 사람이 결혼한 1968년 11월은 전후 기성 질서를 전면 부정하고 완전히 다른 새 세상을 꿈꾸었던 열망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대였다. '1968년'의 젊은이인 우즐라 여사의 눈에 서점을 자주 드나들며 토론하고 이따금 성당에서 만나는 32살의 청년 이종현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이종현이 떠나온 나라는 새 세상을 갈망하는 세계의 흐름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이었다. 전쟁의 참화가 채 가시지도 않은 1967년 대통령 박정희가 국가기관원을 독일로 보내 반정부 인사를 납치한 동백림사건을 벌인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종현은 더욱 한국의 민주주외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았다. 함께 했던 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때로 가는 길을 바꾸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한 길을 걸었고 흰머리가 늘어나는 만큼 그의 어깨에는 더 많은 짐이 지워졌다.

그 세월이 지금까지 53년이다.

1936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나 오사카, 우에노시 미에켄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949년 12월 경북 상주로 가족과 함께 귀국해 14살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었다. 아버지와 큰 형님이 전쟁에 쓸려갔고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북으로 송환된 작은 형님은 40년이 지난 1990년에 평양에서 만났다.

권투 특기생으로 월사금없이 다녔던 중, 고등학교 시절. 아버님과 두 형님의 좌익활동을 문제삼아 시민증도 발급하지 않는 분단의 땅을 영원히 벗어나고 싶었다.

1965년 파독 광부 모집에 응시해 29살의 나이로 머나먼 이역 땅 지하에서 3년간 노동을 하고 1968년 독일인 아내 우즐라를 만나 독일사회에 정착했다.

독일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회사생활을 하던 1974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선 해외교포들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세계적인 판도에서 벌어졌고, 독일에서는 유학생과 광부, 간호원, 종교인들이 주축이 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이 만들어졌다.

그 후 1975년 재독한인노동자연맹 창립, 1976년 코리아 코뮤티 참가, 1985년 '민주민족통일한국인연합'(한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 1990년 범민족대회 참가, 2001년 한민족유럽연대 창립 등 자신의 온 생애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2년전 5.18기념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박근혜 정부로부터 강제 출국을 당했던 것도 거꾸로 보면 그만큼 그의 활동이 완강했기 때문이다.

소년기부터 권투로 단련되어서일까. 82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다부진 몸과 팽팽한 피부, 다정한 음성과 밝게 웃는 모습은 오랜 세월 격동기를 이겨 온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닮아가는 부부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우즐라 리 여사는 "남편이 하는 일에서 희망을 보았다. 일이 제대로 된다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지금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 스스로 '프라이드'를 느낀다. '잘해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노부부와 함께 인근 아파트 단지 안의 한적한 나무숲으로 옮겨 독일과 유럽에서 해 온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숲속 공원에는 까치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도 불과 몇 사람 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앞으로 남북문제가 잘 풀려나가서 공존공영이라는 기한을 지나 언젠가 꼭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만 된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춤을 출 것이다."

이종현 고문은 인터뷰 다음 날(6월 12일) 열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내일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 같은 것이 발표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종전선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트럼프도 양쪽이 계속 만나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뭔가 꼭 될 것이라는 희망은 있다.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꼭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

식민과 전쟁, 분단으로 얼룩진 운명 

   
▲ 숲속 공원에는 까치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이종현 선생과 우즐라 리 여사의 모습.[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 지난 2016년 5월 5.18기념재단 초청으로 입국했다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출국 당한 후 2년만의 입국이다. 쉬운 이야기부터 여쭙겠다.

■ 이종현 상임고문 : 53년동안 바깥에서 살다보니까 단어도 많이 잊어버렸고 한국말 하는 것도 상당히 서툴러졌다. 잘 다듬어서 써주길 바란다.

□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

■ 1936년생이니까 올해 만 82살이 된다. 일본 고베에서 태어나서 오사카에서 컸다. 소년시절을 보낸 곳은 우에노시 미에켄이라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경북 상주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아버님께서 먼저 와 계셨고 다른 가족은 일본에서 1949년 12월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6개월 후 내 나이 14살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전쟁과 맞닥치게 되었다.

□ 그때 어느 집처럼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어김없이 닥쳤을텐데.

■ 나는 5형제 중 셋째인데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이 6.25때 인민의용군으로 자원해서 들어갔다. 큰 형님은 서울에서 치안대 활동을 하다가 9.28 서울수복 때 구속을 당했다. 그 뒤 1.4후퇴 직전에 대전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보다 두살 위인 작은형님은 큰 형님과 마찬가지로 인민의용군으로 들어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교환될 때 북으로 돌아갔다. 그건 자신도 의용군으로 갔다가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동네 형님 친구분이 그곳에서 형님을 보았는데 '북으로 가길 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형님이 살아계신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1990년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범민족대회에 참가했다가 직접 만났다. 

아버님도 9.28 서울수복 때 잡혀 들어가 고생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되었다.

□ 한국으로 돌아 온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의용군에 갈 수 있었을까.

■ 아버님이 일본에 계실 때 총련 활동을 했다. 그때 총련 활동이라는 것이 뭐 특별한 사상을 갖고 있거나 공부를 해서 하는 건 아니었다. 당시 일본에 사는 '한또진'(반도인)으로서는  해방이 되면서 거의 대부분이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가졌을 때였다. 당시 청년운동을 했고 동네에서 우리 말을 가르치는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젖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난 그 때 어렸지만 형님들은 그런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 6.25전쟁이 벌어지니까 인민군 쪽으로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 파독 광부로 갈 때가 1965년이니까 20대 후반 나이다. 그 전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소개해달라.

■ 그때 나이가 29살. 독일 오기 전까지 중학교도 제대로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무엇보다 아버님과 형님들이 좌익활동 연루자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적색가정으로 분류되어 시민증도 없었다. 

9.28 서울수복 직후에는 시민증이 있어야 자유롭게 서울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1.4후퇴 때 피난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형님 두 분은 종적을 찾을 수 없었고 아버님은 반 불구 상태로 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면서 동생 둘을 건사해야만 했다. 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같은 짓을 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될 즈음에야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몸이 다부져 보이니까 권투부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월사금없이 다닐 수 있도록 아는 분이 알선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권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몇달 후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권투실력이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침에는 학교를 다니고 오후에는 권투부 주장으로 후배들도 지도하면서 월사금을 내지 않고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 다음에 영등포공업고등학교까지 같은 방식으로 다니다가 졸업하게 됐다.

그 때 교장선생님이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1956년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출마한 대통령선거에서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교장선생님 성함은 김규현으로 기억된다. 그분이 나를 참 총애하셔서 항상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을 갖고 물어보셨고 정치문제, 이념문제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나를 좋아해 주셨기 때문에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선생님들 중에서도 몇몇 그런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에게도 많은 교육을 받게 되었고 남북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민족의식이 싹트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1학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군대에서 만 3년 지내고 하사로 제대한 후 집안에 여유가 없어서 가정교사 노릇도 하고 회사 안전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변변한 직장을 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바로 아래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을 하고 그 뒤에도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1965년에 파독 광부로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돈벌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독재와 반북 정책이 마땅치 않아서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원하게 됐다.  그때는 돈도 돈이지만 남북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조국에 오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떠나게 되었다.

□ 좌익 꼬리표도 원인이 되었겠다.

■ 그렇다. 매사 제약이 따르고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해외에 나가기 위한 시험을 봐서 다 통과는 되었지만 인적 사항 검토에서 걸릴 뻔하기도 했다. 외가쪽 먼 친척의 도움으로 독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독일로 가기 전에 어머님이 "가기 전에 꼭 가톨릭에 입교해라. 그러면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고 한 당부가 있어서 한국에서 가톨릭 입교를 하게 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님은 내가 독일로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던 것 같다.

□ 어머님은 그 이후로 뵐 수 있었나.

■ 어머님은 1993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한국에 올 수가 없어서 임종을 보지 못했다.

잊지 못할 '동백림사건'과 박정희 독재에 대한 반감  

   
▲ 흰머리가 늘어나는 만큼 그의 어깨에는 더 많은 짐이 지워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한국의 민주주외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았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이제 독일 생활에 대해 본격적으로 듣고 싶다.

■ 독일에서도 그냥 지낼 수는 없고 무엇이든 해야 했는데 공부부터 시작했다. 그 나라 말도 배워야 하고 생활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 지하생활(광부)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학교에 적을 두게 된 것이다.

□ 광부로 간 것 아닌가.

■ 물론 광부로 3년 계약하고 갔으니까 처음부터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계약 만료 3개월 전인 1967년 말에 쾰른대학 6개월 언어교육(어학연수) 과정에 입학했다. 저녁반 수업을 듣고 아침에 잠깐 열차를 타고 갔다가 언어 연습을 하고 배우고 돌아와서 잠깐 수면을 취하고 다시 저녁반 수업을 듣는 생활을 3개월간 했다. 

그 무렵에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과 이응로 화백 등 194명의 유학생과 교민 등을 납치하여 간첩단으로 발표한 동백림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7월에 벌어진 이 사건 때문에 당시 독일에서는 한국에 대해 굉장히 좋지 않은 인식이 생겼다. 

후에 사형선고를 받았던 정규명 선생을 사건 발생 4개월 전인 3월에 만날 기회가 있어 그 집에 가서 하룻밤 묵기도 했다.

난 그런 저간의 사정은 모른 채 그 분을 통하면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소개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지인의 권유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정규명 선생은 핵 과학을 전공한 후 귀국해서 기여하는 조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국비로 박사과정을 밟도록 한 수재였다.

그렇게 흉흉한 세월이기도 했고 1967년 말부터 시작한 6개월간의 어학연수 과정이 4개월째 접어드는 1968년 3월에는 파견 광부 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체류연장을 승인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3년 계약이 끝나면 그중 1/3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대부분은 미국이나 캐나다로 갔다. 나처럼 독일에 계속 남은 사람은 몇 안됐다.

당시 대학 입학원서는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체류 허가만 받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먼저 외국인 체류 허가를 담당하는 부처에 가서 여권을 내놓고 절차를 밟는 중에  여권 만료기간이 2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됐다. 

꼼짝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줄만 알았는데 여권기한만 연장하면 체류기간을 늘려줄 수 있다는 제안이 왔다. 굉장히 기뻐하는 나에게 담당자는 본의 한국 대사관에는 절대 혼자 가지 말라고 신신상부를 했다. 

당신네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정부 입장에서는 한국인을 혼자 대사관에 보냈다가 또 잡혀갈 수 있고 그건 자신들의 책임일 뿐 아니라 망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적의 내가 한국 대사관에 가는 걸 독일 정부가 막으면서 보호하려는 그 상황이 기가 막혔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쳐 체류연기를 받았다. 그 무렵에 지금 아내를 만났다.

결혼, 소중한 가족...깊어가는 한국사회에 대한 실망 

   
▲ 이 고문은 파란만장한 독일생활에 대해서도 부드러운 표정과 다정한 음성으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아내와 만난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 그 때 아놀드 슈미츠라는 독일 유명 작가가 쓴 '기사도'라는 책을 찾고 있었다. 당시 서점을 하던 우즐라에게 문의를 했더니 독일 사람들도 문학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는 읽기 어렵다면서 지금 당신의 독일어 실력으로는 아주 어려운 책이니 나중에 읽으라고 권유를 하더라. 

묘하게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나고 해서 다시 책방을 찾아가 '내가 그 책을 사서 버리던지 말던지 상관없이 당신은 책을 팔기만 하면 되는데 왜 팔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서점에는 책이 없었기 때문에 주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소동을 겪으면서 일주일 후에 책을 받으러 갔던 그 일이 인연이 되어서 연애도 하고 나중에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생각에는 책을 팔기만해도 다른 소리를 듣지 않았을텐데 그걸 팔지 않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양심은 바른 사람이라고 보였던 것 같다. 이후에 성당에서도 만나고 그러다가 2년 가까이 연애한 끝에 1968년 11월에 결혼하게 됐다.

□ 그 무렵 독일이나 유럽은 대격변의 세월이지 않았나.

■ 맞다. 1968년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학생들의 반항이 대단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교육제도, 육아방법, 남녀관계 등 모든 기성의 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한해 전에 있었던 동백림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본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대학에 기계공학 전공으로 입학을 했다.

□ 결혼 생활은 어땠나.

■ 1973년 9월 대학을 졸업하고 10월에는 독일로 온 후 8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갔다. 그때 2살 6개월된 큰 아이를 데리고 어머님을 뵈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굉장히 좋아했다. 처음 뵙는 자리였기 때문에 큰절을 하라고 당부를 했는데, 어머니가 큰절하는 낯선 서양 며느리를 그냥 달려와서 안아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그때 거의 울고 싶었다. 이 사람(부인을 지칭)은 그때 이후로 한국과 가족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것 같다.

가족을 만난 기쁨은 컸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도 상당히 컸다.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길거리에서 헌병과 경찰이 신분증 보자는 검문을 거리낌없이 하는 것이 아주 거슬렸다. 

한번은 국립미술관에 갔다가 나이 든 일본인들이 주변 관람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잡담하는 모습을 보고 항의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걸 한국 사람들을 멸시하는 태도라고 느꼈는데 주변사람들이 그런 걸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속상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는 외국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파란 천막같은 걸 쳐 놓은 걸 보기도 했는데, 매사 이런 식이라면 한국의 앞날은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럼 그때 어머니를 뵌게 처음이자 끝이 되어 버린 건가.

■ 그렇게 됐다. 그 후로 1999년까지 한국에 들어오질 못했다. 어머니는 1993년에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정확한 동네 이름은 모르겠는데 근처에 어린이대공원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유신독재의 심화와 강해지는 민주주의, 통일운동

□ 독일에서 본격적인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 1973년까지는 한국 국적이었고 1975년에 독일 국적을 받았다. 그때는 독일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져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이 만들어지고 반군사독재운동이 벌어지게 됐다.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런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유학생과 광부, 간호원,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 1974.3)이 창립되었다. 그 운동을 통해서 대규모 반독재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해 연말부터 노동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어서 이듬해인 1975년 초에 '재독한인노동자연맹'(노동자연맹)이 꾸려졌다.

□ 그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어떻게 된 것이, 그뿐 아니라 독일에서 무슨 운동이 만들어졌다고 하면 처음부터 내가 뛰어들게 되더라. 그 다음에 1976년 독일인들이 주축이 되고 저와 송두율 교수를 비롯해 한국인 네 명이 참가하여 '코리아 코뮤티'(한국을 위한 협약)이라는 조직을 창립하기도 했다. 독일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우리 운동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다음 1977년부터 일본에서 시작되어 전세계 해외교포들의 반독재민주화운동 조직으로 꾸려진 '민주민족통일한국인연합'(한민련)이 있다. 유럽지역에는 유럽본부가 있었고 주축은 일본의 한민통이었는데, 당시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판정이 나면서 그와 연결이 되는 한민련 소속단체들에 대한 탄압이 상당했다. 독일에서도 한민련에서 일을 하면 상당한 감시와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건, 노동자연맹 관계자들이 많이 함께 했다.

민건은 1979년 박정희 사망 직후에는 '선통일 후민주', '선민주, 후통일' 등 노선상의 분열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선민주'편에서는 "통일은 후에 있을 일이고 지금 당장은 민주화운동부터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선통일'측에서는 "민주주의와 통일은 동시에 나가야 하며 선통일을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결과는 민주화운동을 전제로 하는 '민건' 관계자들 중에 일부가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한민건)으로 분리되어 나가고 나머지는 민건에 그대로 남는 모양이 되었다. 

한민건 관계자들 중 대부분 유학생들은 몇년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 운동을 지속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고 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와 통일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되어 갔다.

1980년 광주항쟁은 이런 흐름을 더욱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범민련, 돕고 싶었지만 회원이 되지 못했다.

   
▲ 이 고문은 1990년 범민련 결성과 관련, 의견이 달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유럽에서 매년 5월민중제를 개최하신 걸로 유명하신데...

■ 5월 광주항쟁 추모와 계승과 관련한 운동은 1980년부터 독일만해도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1986년 무렵에는 다 함께 같이 하자고 해서 '5월민중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7년엔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5.18광주항쟁이 우리에게 대단한 영향을 준 것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각 조직이 일년에 한번씩 모여서 국제정세와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광주항쟁 열사들과 민주열사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내도록 한 것이다.

5월민중제를 위해 6~7개 단체가 함께 모여 활동을 하면서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욕구가 생겼고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이렇게 떨어져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01년 5월 19일 '한민족유럽연대'가 창립되었다. 재유럽 5월민중제는 한민족유럽연대 외에 민중문화모임 등 여러 단체들이 함께 치르고 있다.

현재 한민족유럽연대는 한민족유럽연대 코리아협의회, 베를린노동교실, 한국민중문화모임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에 앞서 나는 김길승, 이종수 박사에 이어 1985년부터 한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 일은 최기영 박사, 채희완 박사, 윤이상 작곡가, 정성배 박사, 이희세 작가, 이응로 화백 등 저명 인사를 비롯해 유럽 전체의 교포를 묶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 후 통일운동의 중요한 '모멘트'가 된 것이 1990년 8월 15일 범민족대회였는데, 남·북·해외 준비모임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할 때 또 한번 한국에 들어왔다.

그해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는 유럽지역에서 60여명의 참석자들이 다녀왔다. 이 사람도 나와 함께 평양에 갔다왔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일본, 미국에 앞서 범민련 유럽위원회가 먼저 만들어졌다. 그 때 문제도 적지 않았다. 

갑자기 북에 가서 범민련 결성에 대한 일을 꾸며 왔지만 교포들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보는게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노동자연맹을 통해 여론조사를 해보기도 하고 토론회도 가보고 했는데, 대체적인 의견은 '아직은 힘들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래서 나는 '설사 지금 무리하게 (범민련을 결성)하더라도 우리는 소수로 남아 범민족대회를 꾸려나가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내가 한민련 사무국장으로 있었고 그 일을 진행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협에서도 주요 직책을 겸하고 있었지만 범민련 결성을 위한 베를린 1차회의에서 반대했다. 역량상 아직은 무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까 '지금 당장 해야 한다'고 어느정도 입을 맞추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지금 유럽이 먼저 하지 않으면 미주나 일본에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조직적으로 결정한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난 거기 들어가지 않았고 그 후로 범민련 회원이 되지 못하고 고집쟁이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후에도 상당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범민련 운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 그리고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회원은 아니었다.(웃음)

□ 북에서 작은 형님을 만나셨다고 했는데.

■ 1990년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 전부터 있었는데, 그 전해인 1989년에 동서독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나.

그때는 서독에 속한 베를린에서 동독에 속한 베를린으로 왕래할 수 있었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도 다닐 수 있었다.

내 형님이 전쟁포로로 붙잡혔다가 북으로 송환되어 갔는데 생사를 알고 싶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는데, 범민족대회 준비모임을 하는 과정에서 '살아계신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범민족대회가 열린 1990년 8월 평양에서 아내와 함께 작은 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 40년이 지나서 만나게 된 건데, 바로 알아볼 수 있었나

■ 처음엔 힘들었다. 사진을 봤을 때는 비슷한 것 같다고 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까 정말 내 형님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형님이 일본에 있을 때 우리 형제끼리만 알 수 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어서 틀림없이 내 형님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다.

그 다음엔 1993년 12월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몇개월이 지나서 조카로부터 받게 되었다. 바로 북에 가족방문 신청을 했는데 9월 무렵 승인이 나와서 1994년 9월 평양을 방문하여 형수님, 조카들과 함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했다. 그게 두 번째 방북이었다. 집에 가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 주고 성묘를 할 수 있도록 차도 내 주고 해서 지금도 북측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 가장 최근 방북은 언제였나.

■ 2007년 6.15 남북공동행사 참석차 방북했다.

□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는 방북이 힘들었던 건가.

■ 방북이 아니라 오히려 방남이 힘들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에도 오고 해서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는데 박근혜 정부가 2016년 5월 입국을 거부하는 바람에 공항에서 바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니 8년만에 한국에 온 셈이다.

북미관계 정상화는 '꼭 된다'

   
▲ 2016년 5월 박근혜 정부로부터 입국거부와 강제출국을 당한 이 고문 부부가 주독 한국대사관 앞에서 재유럽 오월민중제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펼침막을 들고 1인시위를 벌였다. [자료사진-통일뉴스]
   
▲ ‘해외 민주통일인사 귀국 추진위원회’는 지난해 9월 촛불항쟁 1주년인 2017년 10월 29일 해외 민주통일인사들의 귀국을 추진하겠다고 발족 기자회견을 가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이번에도 5.18재단 초청으로 들어오셨는데.

■ 그렇다. 2년전에 왔다가 쫓겨났을 때도 5.18행사 치르기 위해 왔었다. 그런데 2년 전 일과 관련해서는 지금도 박근혜가 참 괘씸하다. 

물론 내가 2012년 12월 대선 직후부터 박근혜의 당선이 부정선거에 의한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럽에서  탄핵 운동을 벌였고 곧 이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밝히라는 일도 하고 한일 '위안부'피해자 강제합의에 반대하여 평화의소녀상을 유럽에 처음으로 들여오기도 했기 때문에 박근혜가 나를 좋지 않게 볼 수는 있는데 모두 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날 공항 인근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호텔에 하룻밤을 자면서 어찌나 화가 나던지 동생한테 주려고 가져왔던 술 한 병을 밤새 마시면서 성토했다. 독한 술은 마시지 못하는 이 사람과 함께 아마도 박근혜 정부의 검은 세력들이 듣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독일말로 노래를 불러가면서 울분을 토했던 기억이 있다.

□ 8년 만에 한국에 오셔서 한달 정도 한국에서 지내고 내일 모레 13일에 출국하시는데, 이번에 돌아 본 소감은.

■ 독일에서 한국에 다녀왔던 사람들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도 있었지만 2010년까지 한국은 발전이 잘 되었지만 일반적인 유행을 쫓는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건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정적인 모습도 동시에 눈에 띄었던 것인데, 이번에 와서 보니까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골에 다니면서 보아도 그다지 낙후하지 않고 많이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골 식당에서도 전혀 불편함없이 식사할 수 있었고 방문 목적을 말해도 별 다른 선입견없이 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설 때는 떡을 싸서 건네주면서 가다가 드시라는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이 인정이 남아있고 큰 도시를 가더라도 나무나 숲이 우거진 것이 좋았다. 2000년대 와서 버스나 전철같은 것을 타고 다니다 보면 일률적으로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번엔 보니까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기라도 하듯 다채로워진 걸 볼 수 있었다. '한국이 이제 잘 돌아가는 구나'하는 인상을 받았다. 정치적인 문제를 배제하고는 그렇게 볼 수 있었다.(웃음)

□ 지난 4.27판문점선언도 있고 내일(6.12)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담이 있다. 분단을 넘어선 새로운 한반도가 성큼 다가오고 있는 역사적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계신 소감은.

■ 이번 북미회담에서 어떤 합의를 못본다고 하더라도 여하튼 서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북미문제라고 본다. 작년까지도 미국은 북이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적대하는 입장을 취해왔고, 북에서는 결국 수소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만들지 않았나.

그런데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방치하다간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수소탄 하나가 뉴욕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미국에서도 이제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미국이 해결을 위해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북과 손을 잡으려는 배경은 그렇다고 본다.

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배고프게 살았나. 이젠 좀 경제부흥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미국으로부터 당해왔던 경제제재를 풀어냄으로써 경제적 부흥을 도모해야 한다. 남북 분단의 해결까지는 세계적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그러니까 북미관계 정상화는 북으로서도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일 북미정상회담에서 마음에 쏙 들 정도로 평화협정 같은 것이 발표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종전선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양쪽이 계속 만나겠다는 것은 트럼프도 말하고 있으니까 뭔가 꼭 될 것이라는 희망은 있다.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꼭 된다.

   
▲ 우즐라 리 여사는 남편이 하는 일에서 좋을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으며, 지금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우즐라 리 여사님께 질문하겠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 젊은이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 (단호하게) 한 두 가지가 아니고 그의 존재 전체가 한꺼번에 마음에 들었다. 어떤 것이 좋았다고 찍어서 말할 수 없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웃음)

□ 남편이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느라고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웠을텐데,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것 같다.

■ 남편이 하는 일에서 희망을 보았다. 일이 제대로 된다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집안일을 돕지 못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 스스로 프라이드를 느낀다.

한국은 남의 나라가 아니고 늘 내 곁에 있었다.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지금 잘 되어가는 상황을 보면서 그동안 잘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돌아가신 시어머니나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시동생들과는 어떤 느낌을 공유하고 있는지.

■ 1973년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김포공항에 시동생과 친구들이 마중 나왔었다. 처음부터 남이 아니라 한 집안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와 만났을 때는 다른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엄마같은 '아주 그냥 너무나 당연하고 굉장히 편한' 느낌이었다. 아직까지 그때의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이 생생하다.

우즐라 여사는 지금 동서독은 통일된지 20년이 넘도록 하나되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남과 북은 갑작스럽게 하나로 되는 것보다는 연합 또는 연방제로 살면서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좋겠다"고 자신의 경험을 담아 조언했다.

이종현 고문은 "독일에서 나보다 훨씬 많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내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산증인처럼 되어버렸다. 앞으로 남북문제가 잘 풀려나가서 공존공영이라는 기한을 지나 언젠가 꼭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만 된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춤을 출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정-22일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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