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담판인 북미 정상회담이 내달 12일로 결정되었다. 평양 혹은 판문점이 아니어서 서운한 감은 있지만, 그 동안 70년 이상을 적대관계로 대립해왔던 북과 미국이 자리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그 무게감은 결코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남북 정상회담과 이번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공포와 분단의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내는 역사적 이정표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여러 가지의 변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우리의 사정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현재의 한반도가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변화는 지난 시기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해석할 수도 없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에 적절히 대처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한반도는 우리에게 거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한반도는 현실의 변화가 사고의 변화를 앞지르고 있다. 이는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질서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힘이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성을 이미 넘어서고 있으며, 읽고 해석하기에 작동하는 힘의 크기와 방향이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어떻게 이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대비할 것인가이다. 과거보다 더한 노력이 요구되는 사정이다.

현재 한반도는 여전히 깨지기 쉬운 그릇이기는 하지만 과거 우리가 줄기차게 요구하고, 희망해왔던 평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우리는 그간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고민과 논쟁을 거듭해왔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이 때로는 힘을 합치기도 했고, 때로는 날카롭게 대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치거나 대립하지도 못한 채 평화의 길이 열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희망했던 길이 열리는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혹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더욱이 평화의 길이 열린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지금까지 ‘평화체제 만들기’에 대해서만 고민했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도 한다. 이제는 ‘평화체제 만들기’를 넘어서서 ‘평화체제 그 이후’를 고민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의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정작 평화체제가 만들어진 이후의 텅 빈 공허함을 맛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정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새로 만들어진 판짜기의 과정에서 ‘민간’의 역할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것과도 관련된다. 물론, 민간의 역할이 ‘평화체제 만들기’와 ‘그 이후’에 대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민간은 자신들의 맡은바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그리고 이는 ‘평화체제 만들기’와 ‘그 이후’의 든든한 토대가 되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그 이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정도로 사고와 행동의 변화에는 굼뜬 상태에 있다. 어떻게 보면 지난 9년간의 ‘거대한 공백’의 상처라 할 수도 있다. 정작 상대해야 할 ‘북’의 변화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며, ‘남’의 거대한 변화에 주인공이었으면서도 그 변화의 깊이는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여전한 상태이다.

현재 많은 이들이 여전히 ‘97년의 프레임’에 갇혀 북의 변화와 현재의 구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평화체제 만들기’과 ‘그 이후’에 대해서도 ‘97년의 시각’으로 이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는 다가오는 변화에 그저 주변부에 놓인 구경꾼의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97년의 시각’에 갇히게 되면, 그 어떠한 담대성과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해 보일지도 모르는 ‘담대성’이며, 현재의 변화를 앞서가는 ‘상상력’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담대성과 상상력은 특히 민간에게 기존의 인도적 지원이니, 개발협력이니 하는 틀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 많은 정부 부처와 민간에서 남북의 길이 열리는 것에 대비해서 북과의 앞으로의 협력 사업에 대한 수많은 제안과 구상 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다수가 그 동안 수북이 쌓인 먼저를 털어내는 수준에 있는 듯이 보인다. 그저 과거에 기획했다 중단된 것들이거나 혹은 우리의 일방적 희망을 과도하게 앞세우는 것들이다.

물론, 앞으로도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필요하고, 개발협력의 방식으로 더 규모있게 협력 사업을 전개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현 시점에서 북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떤 것들이 현재의 변화 방향에 부합하는 것들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의 깊이가 부족해 보인다. 더 많이 토론하고, 지혜를 모으지 않는다면 ‘어게인 2000년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현재의 변화와 ‘평화체제 그 이후’에 대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렴풋할 뿐이다. 다가오고 있지만 분명하지 않은 ‘그 무엇’을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조차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평화체제 만들기’의 커다란 고갯길을 넘어서고 있으며, 그 앞에는 ‘그 이후’의 더 큰 고갯길이 앞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집단적 지혜의 힘을 모은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고갯길일 것이다.

이제야 말로 현실을 직시하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정부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만 머무르지 말고, 여기에 민간의 힘과 지혜가 더해져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고민이 ‘행복해지기 위한 기쁜 고민’이라는 점이다.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진 한반도를 상상하는 ‘기쁜 고민’을 함께 해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에 새겨진 ‘평화와 번영’의 표지석을 기억해보자. 지금까지 ‘평화’에 주목했던 그 이후의 키워드의 하나는 ‘번영’이 아닐까? 남북의 번영, 한반도의 번영을 위한 든든한 토대가 ‘평화’라면, ‘그 이후’의 키워드가 ‘번영’이라는 두 글자에 압축적으로 새겨져 있지 않을까? 더 치열하게 고민해볼 지점이다.

물론, ‘판문점 선언’의 정식 명칭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다. 번영 이후 통일은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우리가 갑자기 ‘번영’의 키워드에 맞닥뜨렸듯이 통일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문학박사, 2001)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방문연구원(2002-2003)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위원(2004-2006)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원(2007)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저서로 북한의 개혁·개방: 이중전략과 실리사회주의(2004), 김정일 리더십 연구(2005), 서울과 도쿄에서 평양을 말하다(2008),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번역서,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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