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한반도 대격변에 청신호가 켜졌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70여 년간에 걸쳐 한반도 상공에 드리워진 전쟁과 대결의 그림자가 평화와 화해의 햇살로 전환할 기회의 창이 열린 것이다.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전망은 남북의 두 정상이 제공해줬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겨레와 세계에 엄숙히 천명한다”며,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판문점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특히, 남북 정상은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면서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고 덧붙였다.

판문점선언은 모두 3개 조 13개 항으로 이뤄져 있어 그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3개 조는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 △한반도 군사적 긴장 상태 완화 및 전쟁 위험 해소 노력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협력으로 이뤄졌다. 그간 남북 간에 이뤄진 모든 합의의 종합판이자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간 10년 동안 대부분을 한반도가 긴장과 대결, 나아가 전쟁분위기 속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5월 말-6월 초에 예정된 북미정상회담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II

판문점선언은 이처럼 최근 한반도 정세에 호응해 평화문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통일문제와 민족문제가 홀시되어 있지는 않다. 판문점선언은 1조에서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나갈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곧이어 1항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며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판문점선언에는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그리고 10.4선언의 내용들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그간 남북합의들의 원칙과 계승성을 인정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민족자주의 원칙 확인’이라는 대목은 7.4성명부터 시작해 6.15선언과 10.4선언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를 다룬 3항은 남북기본합의서에 그 연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고위급회담 개최, 각계각층의 협력과 교류, 이산가족·친척 상봉,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군사분계선 일대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금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 평화수역 획정 등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비롯돼 특히 10.4선언에 대부분이 공유되어 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도 남북기본합의서에 나온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의 변형일 뿐이다.

                                                         III

이처럼 판문점선언에 들어있는 많은 내용들이 과거 합의들과 비슷해 자칫 진부함을 줄 수도 있지만 결코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정상의 남다른 이행 의지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과거에는 정권 중간이나 말에 늦게 합의가 이뤄져 정권이 바뀌면 실천이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비장감을 나타냈으며, 김 위원장 역시 “이제 마음 단단히 굳게 먹고 다시 원점으로 오는 일이 없어야겠다”, “이 합의가 역대 북남 합의서처럼 사장화된 불미스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며 결연함을 밝혔다. 한마디로 두 정상이 ‘역진 불가능한 합의 이행’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판문점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큰 우산 아래 남북간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해소하면서 장차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통일의 길로 접어들겠다는 큰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정상이 판문점선언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평화문제를 해결하고 내부적으로 통일문제의 단초를 열고자 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두 정상이 신뢰구축, 나아가 민족공조를 이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면서 “남과 북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주도적으로 결정해 나가자”고 말했으며, 김 위원장도 “우리가 서로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으면 그 어떤 도전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정상회담의 숱한 장면 중에서도 두 정상의 신뢰구축과 민족공조를 보여준 가장 극적인 장면은 27일 오후 공동 식수 행사 뒤 진행된 도보다리 산책과 그 다리 끝에 마련된 벤치에 마주보고 앉아 나눈 30여 분간의 대화였을 것이다. 배석자 없이 사실상 단독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이 회담은 흡사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 순안공항 환영행사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파격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리무진에 동승해 김 대통령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 가기까지 55분에 걸쳐 진행된 차량 단독회담(?)을 연상시켰다. 모두 언어가 통하는 같은 민족이기에 가능한 장면들인 것이다.
 
                                                          IV

이제 눈길은 자연히 ‘김정은-트럼프’ 북미정상회담으로 쏠린다. ‘문재인-김정은’ 두 정상이 판문점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을 공동의 목표로 명기했기에, 이는 향후 북미정상회담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평화협정’으로 요약되는 북미정상회담의 핵심 의제에서, 그 실천 과정은 매우 지난하다고 할 수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숨 가쁘게 달려온 한반도 정세의 변화과정에서 볼 때 문 대통령은 운전자든 중재자든 북미 간의 ‘비핵화-평화협정’ 프로세스를 주도하거나 그에 개입할 수 있는 역할과 권한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다.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대로 남북의 두 정상이 상호신뢰에 기초해 민족공조를 발휘한다면 북미정상회담도 성과적으로 진행돼 한반도에 새 시대, 평화시대가 가시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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