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분단은 일제강점기가 잉태한 사생아다. 거슬러 오르면 구한말격동기 당시 근대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시킨 우리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 더욱이 독립운동 당시의 분열상이나, 해방 직후 단결된 민족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점은 너무 후회되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분단으로 인한 후유증은 얼마나 컸던가.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으로 살상과 파괴는 극에 달했다. 1천만 명을 헤아리는 이산가족들의 고통은 지금도 아우성이다. 체제 대립의 고착으로 인한 이념 갈등은, 남북의 극한 대립과 더불어 사회의 분열이라는 고질병을 앓게 하고 있다. 더불어 진정한 민족문화의 계승‧발전을 저해하고 막대한 분단비용으로 인한 사회‧국가적 손실 역시 가늠키 힘들다.

무엇보다 응어리로 남는 것은 진정한 독립의 실패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3월 광복군의 활동 지역을 만주와 한반도까지 확대하고, 미군과 한반도 탈환을 위한 공동 군사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군사작전이 채 실행되기도 전에 일제가 항복했다. 해방 정국에서 우리가 주장해야 할 지분이 없어진 것이다. 백범 김구가 가슴을 치며 통탄한 이유이며, 해방 정국에서 남북협상에 목숨을 걸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세력에 있어 조국광복은 희열이자 아픔이었다.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를 찾음과 동시에 분단이라는 멍에를 동시에 몰고 왔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한 억압으로 국내의 발판을 모두 잃어버린 독립운동 세력은 아픔을 넘어 절망적 현실과 부딪히게 된다. 또한 타의에 의해 씌워진 이념의 굴레와 청소하지 못한 일제의 앙금은 또 다른 시련으로 역사를 정지시켰다. 다시 독립운동을 외쳐댄 이유다.

『독립신문』의 속간은 ‘다시 독립운동이다’라는 구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왠 『독립신문』이냐고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 세력의 독립촉성 활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분단된 해방의 공간을 독립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의 『독립신문』 속간에 대한 논의는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를 조직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1945년 10월 3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중국 시절 『독립신문』에 관하여 회고했다. 피와 눈물로써 쓰고, 피와 눈물로써 배달하고, 피와 눈물로써 돌려 읽었다는 회구담(懷舊談)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도 언론‧출판의 자유가 부여되었고, 우리 임시정부 일행들의 환국도 멀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유서 깊은 독립신문을 속간하기로 준비할 책임이 있다며, 『독립신문』의 속간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방향은 분명했다. 바로 완전한 독립 쟁취였다. 『(환국속간)독립신문』의 다음과 같은 「창간사」가 그에 대한 방증이다.

“…(전략)…해방 이후 일 년 반 우리는 아직도 독립을 찾지 못하고 남정북경(南政北經)이 각각 그 이념을 달리하여 민족의 분열을 초치하고 사상의 결렬을 초래하여 민족적 비극을 조성하고 있는 이때 민생은 다시 도탄에 들어서 조국의 전도가 암담하도다. 『독립신문』이 해외에서 싸워온 과거 28년의 고난의 투쟁사는 아직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고, 승리로서 장식할 최후의 그날까지 그 책무를 수행할 의로운 역할을 가졌도다.…(중략)…民心統ᅳ일의 여론환기는 본보(本報) 사명의 제일과라. 우리는 뭉쳐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독립을 전취(戰取)할 것이다. 오직 독립을 위하여 싸워온 『독립신문』은 앞으로도 독립만을 위하여 싸올 것이다. 독립을 방해하는 일절의 반동과 싸울 것이다. 『독립신문』은 독립을 위하여서 싸우는 동지들의 입이 되며 귀가 될 것이다. 이날 『독립신문』은 옛날과 같은 가난한 모습으로 그러나 과감한 씩씩한 모습으로 조국의 가슴을 찾아 와서 제일성을 한껏 외친다. ‘독립을 찾자!‘”

그러나 『(환국속간)독립신문』은 공교롭게도 김구와 그 운명을 같이했다. 즉 1949년 6월 26일 서거한 김구가 그해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자, 『(환국속간)독립신문』 역시 그 다음날 공보처로부터 무기정간(폐간)을 당했다. 폐간의 이유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라는 것, 절대 독립을 지지했다는 것, 그리고 남한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왈가왈부도 아직 진행형에 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 아닌 단순한 정부 수립에 불과하다는 의견과, 진정한 건국의 의미를 갖는다는 인식의 충돌이 그것이다.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1919년 임시정부의 수립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강변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애써 경시(輕視)하고자 한 것이다. 현 정권 들어서의 인식은 상반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해 광복절 축사에서 1919년이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소중히 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을 반포하고 ‘민족평등·국가평등 및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과 ‘절대 독립을 서도(誓圖)함’을 포함한 6가지의 정강을 공포하며 출범한 정부다. 그 과정에서 노령정부(대한국민의회), 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한성정부, 고려임시정부, 임시대한공화정부 등을 아우르며 명실상부한 유일 정부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지도자들의 사상적인 대립과 독립운동 방법론의 차이로 인한 적지 않은 갈등이 노정되었다. 그럼에도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묻어둘 수 없다는 평가다. 첫째 한민족 정신의 결정 내지 확대라 할 수 있는 3·1 운동정신을 집약적으로 계승·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이래 1945년 8월 조국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안으로 각종 항일투쟁의 지도와 민족역량의 결집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민족을 대표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의 법통을 연면히 이어왔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국권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드러낸 역사적 실체,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를 태동시킨 중국 상해를 거점으로 완성된 백암 박은식의 저술 역시 새삼 주목된다. 임시정부 출범 전에 완성된 『한국통사』(1915)와 출범 직후 저술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가 그것이다. 중국인 징웨이(精衛)가 『한국통사』「서문」에서 한 말을 떠올려 보자.

“태백광노(太白狂老-박은식의 필명-인용자 주)가 자기가 지은 『한국통사』를 나에게 주어 읽게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한국독립운동사를 지어 이미 완성하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서문을 써 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그 사람을 보았고, 그 말을 들었고, 그 글을 읽고서 슬프고 기쁨이 저절로 마지않았다. 슬픈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국에 통사가 있는 것이 슬프다. 기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국에 독립운동사가 있는 것이 기쁘다. 태백광노는 비록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나 장차 한국독립성공사를 지어 통사와 독립운동사의 뒤를 잇겠구려! 동아의 친애한 동포와 더불어 환호하면서 맞이하기를 바란다.”

비록 이국인의 감회이지만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징딩청(景定成)이 언급한 “통사는 눈물이고 독립운동사는 피다.”라는 표현에서는, 탄식 이전에 오열이 앞선다. 『한국통사』가 나라가 망한 데 대한 눈물의 역사라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나라를 찾기 위한 피의 역사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징웨이의 소망에 언급된 『한국독립성공사』를 이루지 못했다. 다만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사장이었던 희산 김승학에게, 후일 해방을 맞으면 진정한 『한국독립사』의 완성하라 부탁했다고 한다. 김승학의 다음 회고가 그것이다.

“내가 일찍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 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할 때, 백암 박은식 동지가 편저한 『한국통사』라는 나라를 잃은 눈물의 기록과 『독립운동지혈사』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 수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다음번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굳은 맹약을 하였었다.”

김승학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지켜냈다. 김승학이 해방 공간에서 『(환국속간)독립신문』 발간에 적극 앞장섰던 이유도 이러한 언약과 무관치 않다. 박은식의 유언과도 같았던 진정한 독립성공사의 완성! 그것이 바로 나라를 찾은 데 대한 웃음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분단은 그 웃음의 역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김승학이 겪은 우여곡절을 보면, 그 편찬의 과정이 웃음의 역사가 아닌 피눈물의 역사와도 같았다. 김승학의 『한국독립사』「자서」에는 해방 후 세우지 못한 민족정기에 대한 회한이 아픔처럼 서려있다. 피아(彼我)를 구별하고, 정사(正邪)를 헤아리며, 진위(眞僞)를 가려내는 기준을 무너뜨린 위정자에 대한 지탄 또한 마음을 후빈다.

그것은 『한국독립사』를 엮어내는 기쁨과 웃음의 감회가 아니었다. 분단시대에서 미완성의 『한국독립사』를 편찬해야만 하는 김승학의 피눈물이 숨겨진 넋두리였다. 그나마도 김승학은 『한국독립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지금의 『한국독립사』는 1965년 김승학의 손자에 의해 유고(遺稿)로 활자화된 것이다.

분단의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고대하던 남북정상회담이 마침내 성사되었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에서 상봉하는 것은 분단 70여년 만에 처음이다. 세기의 만남이요 세계적 관심사다. 이제 첫걸음을 디딘 시점에서, 벌써 비핵화 합의, 종전선언, 평화협정 채택 등 수많은 기대들로 설레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남북정상이 새겨야 할 것은, 궁극의 통일을 향한 진정성의 교감일 듯하다. 이것은 언젠가는 서로 변제해야 할 역사적 채무를 상계하는 일이며, 분단의 아픔 속에 멈춰버렸던 해방의 환희를 되돌리는 작업이다. 그것이 진정한 독립이요, 나라를 찾은 데 대한 웃음의 역사를 완성하는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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