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명당터에 세워진 성불사
       
성불사 주지 법성스님은 경내 이곳저곳을 돌며 한시도 쉬지 않고 해설을 해줬다. 거의 설법에 준하는 교훈적인 명언들도 쏟아 내었으며 아울러 그는 역사적 유래에 관한 해설에도 막힘이 없었다.

“원래의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 종교지만 우리 조선의 불교만큼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묘책을 간구하다보니 ”그렇다면 더 많은 살생을 당하기 전에 우리가 살신을 해서라도 많은 희생자를 막아보자“라는 의미에서 우리나라 불교를 호국불교로 방향을 잡은 것이며 그 이후 지금까지 그 호국사상이 정착해 왔던 것입니다.”

스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또한 스님은 해설과 더불어서 사회주의 국가 불교의 장점과 특징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에 대해 예기치 못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주었다.

성불사가 위치한 정방산은 황해도 관문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아주 웅장하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명산이며, 예로부터 반도의 서쪽을 방비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주는 고마운 산이라고 한다. 비단 옛날뿐 아니라 오늘날도 동북아 지역의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안보 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한편 산 주변에 살고 있는 인민들에게는 일상에서 한 자락 여유로운 품을 내어주는 마을 뒷산 같은 포근하고 정감 넘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듯했다.

일행이 성불사 경내를 기웃거리는 동안 필자는 착잡한 마음이 들어 청풍루에 걸터앉아 정방산 봉우리 자락을 무심히 내다보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성불사의 밤’이라는 가곡을  흥얼거렸다. 북미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라 마음이 무거웠던 탓이다. 고즈넉한 사회주의 나라 고찰에서 풍기는 쓸쓸함과 애잔함은 노래 가사로 인해 이념과 인생에 대한 화두를 더욱 피부에 와 닿게 했다.

절간을 둘러싸고 있는 초가을의 은은한 단풍들을 감상하면서 땡그랑 거리는 풍경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은 이내 평정심을 찾으며 고요해지는 듯 했다.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행정상으로 정방산의 주소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강성동”이라고 했다. 또한 이곳 정방산 천성봉 기슭에 자리 잡은 성불사의 행정구역상 주소가 원래 “황해북도 황주군 주남면”이었는데, 내각의 행정개편 정책으로 인해 다시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로 변경됐다고 한다. 잘 알려진 대로 고려 창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선(道詵)선사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쪽을 방비하기 위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 선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정방산은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인 ‘진호(鎭護)’의 땅이기 때문에 이곳에 성불사를 지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 활약한 도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풍수지리설을 창시한 장본인이다. 그가 지은 도선비기(道詵秘記)는 원본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고려 성립 과정이 수록되어 있어 그가 고려시대에 활약한 행적을 남겼다.

도선이 이처럼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도선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훈요십조 제2조에는 도선이 정한 곳 이외에 어느 누구도 국토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 것을 명시했으며 제5조에는 서경(지금의 평양)이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므로 서경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에 대한 내용이 수록됐다. 이처럼 태조 왕건이 후대의 왕들에게 도선의 풍수설을 유훈으로 남겼기 때문에 도선과 고려사회는 뗄 수 가 없는 중요한 관계가 되었다.
 
도선이 절을 지을 자리를 미리 정해 놓는 것은 마치 사람 몸뚱이에 침놓을 자리가 미리 정해진다는 침구학 이론처럼 국토의 중요한 혈자리를 미리 생각해 둔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중요한 명당자리에 절을 세운 후 그 자리에 승려들을 기거하도록 해 예불을 드리고 불법을 공부하면 부처님의 큰 가호가 있어 불국정토가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가장 먼저 대웅전(극락전)에 도착해 불상에 예를 표한 후 마음을 정리하듯 합장하며 고요히 묵상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 바람처럼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슴을 저미듯 밀려오는 심연의 고독과 허망함을 잠시나마 달래 보았다. 혁명을 꿈꾸는 이방 나그네의 욕망은 새벽종을 치는 동자승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어둠속에서도 번개처럼 반짝이듯 어느덧 나의 뇌리에 순식간에 반짝이며 이내 사라지는 듯했다.

▲ 성불사 주지 법성 스님이 일주문 밖에서 일행을 안내하며 해설하기 위해 분주히 다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앞 숲속에 마련된 휴식처. 단체 식사나 간단한 조리도 가능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안내판과 국보유적 87호 지정비석.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노산의 입장에서 눈을 감고 전각마루에 걸터앉아 풍경소리를 묵상하다
        
성불사 주변에는 수백 년을 자란 참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이 큰 수풀을 이루고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그래서 더욱 고적의 풍치를 돋우어주었다. 성불사를 떠올리면 노산 이은상 시인이 지은 노래 가사 속에 등장하는 “그윽한 풍경소리”를 떠 올린다. 필자는 비록 한 낮에 이곳을 찾아왔지만 노산이 이 절간에서 머물렀던 그날의 하룻밤을 상상해 봤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풍경소리로 인해 잠 못 이루었다던 그 날 밤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경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다른 절간들과는 달리 무언가 처량한 인간 실존에 대한 심연의 고독을 제공해주는 듯했다.

성불사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 법성스님에게 물었다. 그러자 성불사라는 명칭은 ‘부처를 이루는 절’ 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누구든지 불법을 만나 수행정진하면 이 세상 어디든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도량이므로 이 세상이 곧 성불사라는 수수께끼 같은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스님도 노산이 지은 노래 가사를 잘 알고 있어 한번 같이 불러보자고 요청했더니 의외로 군가를 부르듯 힘차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성불사(成佛寺)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主僧)은 잠이 들고 객(客)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자료를 찾아보니 이 노래가사를 지은 노산이 이곳 성불사를 직접 찾은 건 29살 때인 1931년 8월 19일이라고 한다. 이화여전 교수시절 친구들과 함께 정방산에 놀러와 등반한 후 그날 밤을 이곳 성불사에서 묵었다고 한다. 마침 그날따라 사방에 벽이 없고 기둥만 세워진 청풍루 마루위에서 잠을 잤는데 밤새도록 처마 끝에서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해 그때 느낀 고적한 감동을 시조에 담은 것을 홍난파가 곡을 붙여 명곡이 탄생된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지루하지 않은 이 노래는 깊은 밤 산사(山寺)에서 홀로 느끼는 심연의 고독감을 정말로 잘 표현한 듯하다. 노랫말뿐 아니라 선율 또한 기복이 적고 노래의 흐름이 완만해 외향적인 흥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내면에 숨겨진 인간 실존에 대한 축적된 감동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만 같아 부를수록 더 부르고 싶은 노래이다. 또한 노산이 성불사를 방문하였던 시기가 1931년도라고 하니 그때는 성불사를 중수하기 직전이라 아마 아주 오래되어 낡고 초라한 청풍루 전각의 추녀 끝에 달린 풍경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후 불교계에서는 노래 가사 자체가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법문(法文)과도 같다고 하여 찬불가로도 사용하고 있다. 가사에 등장하는 ‘밤’은 이 세상 중생들이 무명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고, ‘풍경소리’는 세상의 유혹과 탐욕이다. 바람이란 존재는 가만히 매달려 있는 풍경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자꾸만 뒤 흔들기 때문에 하늘이 중생들에게 내리는 역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봤다. 바람맞은 풍경은 땡그랑거리며 멀리 울려 퍼지나 이내 허공에 잠깐 머물다 사라진다. 불교적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가 다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또한 풍경소리와 함께 온갖 고뇌를 떠 올리느라 맘 졸이던 객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객관 세계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잠을 자지 못한다. 세상에 연연하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한 것이리라. 반면 주승은 아무리 풍경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도 잠도 잘 잤으며 울리지 않고 멈춰 있어도 거리낌 없이 잘 잔다. 그렇다면 주승은 이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이미 모두 터득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보살이 아닐까?

경내를 구경하는 동안에도 여러 전각의 추녀 밑에서 동시에 울리는 풍경소리들은 마치 산속에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선율과도 같이 아름답게 들려왔다. 그 청아하고 맑은 소리들은 가장 먼저 내 귓전을 두드리고 이내 내 심장과 영혼마저 두드리는 듯해 그 메아리와 여운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듯하다. 성불사의 나른한 세월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찾아오는 사회주의 나라 명승지 중에 하나의 의미 그 이상을 넘는다. 가사내용에 등장하는 잠든 주승과 잠 못 이루는 객은 없고 오히려 깨어있는 주승과 어리석은 객들만 있었을 뿐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찾아온 이방인에 불과한 나는 이미 사회주의 나라의 어리석은 객이 되어 있었다.

▲ 성불사 일주문 모습. 예로부터 이 전각은 종루(鐘樓)로 사용돼 새벽종소리로 유명했다. 방문객들이 연이어 들락거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응진전 추녀 밑에 달린 풍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명부전 추녀 밑에 달린 풍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경내의 전각들을 면밀히 둘러보다
        
필자가 성불사를 방문하기 위해 사찰 중건과 승맥 계보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성불사는 일제 강점기에도 31본산 중 하나였으며 황해도 지역의 9개 군(郡)의 절을 관장하였던 사찰이었다고 기록되어있었다. 신라 말기 도선이 창건한 이후 1327년(충숙왕 14)에 5백 나한을 모신 응진전을 지었으며, 1374년(공민왕 23)에 나옹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나옹은 중창뿐 아니라 불사를 더욱 크게 벌여 여러 개의 석물들을 새로 조성하였으며 그 숫자가 이곳 성불사를 비롯해 산내 암자등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창 기록은 없었으며, 1569년(선조 2) 설숭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32년(인조 10)에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정방산에 축성을 한 이후부터 이곳 성불사는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 후 1650년(효종 1)에 다시 언택 스님이 중건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도행 스님이 장육탱화를 모시고 400근짜리 대종을 조성하였으며, 1709년(숙종 35)에는 명부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어서 1751년(영조 27)에는 찬훈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근래 들어 1924년에는 주지 이보담 스님이 3차 중수를 하였는데, 이 때 명부전, 향로전, 청풍루, 극락전, 응진전, 승방 등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현재 향로전은 없어지고 대신 운하당이 남아있다.

한편 성불사의 본사와 말사에는 휴정 스님의 법손이 주지가 되도록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내 말사인 안국사, 원통사, 상원암을 비롯해 산외 말사로서 황주군의 10개 사찰, 봉산군의 5개 사찰, 서흥군의 2개 사찰, 수안군의 4개 사찰, 곡산군의 6개 사찰, 평산군의 3개 사찰, 연백군의 1개 사찰, 금천군의 1개 사찰, 신계군의 1개 사찰 등 총 36개소의 말사를 관장하였다니 성불사가 얼마나 중요한 절이었는지 새삼 절감됐다.

경내에는 현재 북측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고려시기에 지어진 웅진전과 고려 양식으로 축조된 4각 5층 석탑,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일제 시기에 복원된 극락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등이 차례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법성 스님의 해설에 따르면 목조 건물인 웅진전만큼은 고려 충숙왕 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지만 경내 중심건물이자 대웅전격인 극락전은 안타깝게도 지난 6.25 전쟁시 미군의 공중폭격과 소이탄 공격으로 인해 모두 파괴된 것을 1957년경에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절간마다 대문격인 일주문이 있는데 이곳 성불사 일주문 현판에는 한문으로 ‘正方山 成佛寺’라고 적혀 있었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주불전인 극락전이 마주 보이고 동쪽에는 응진전, 서쪽에는 운하당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명부전은 응진전 남쪽에 놓여 있고, 마당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극락전 뒤쪽에 산신각이 있었으며 극락전 바로 앞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특히 극락전 어간문을 통해 내다보는 5층석탑과 청풍루, 정방산 능선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쉽게 만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명장면으로 보였다. 절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워 왜 이곳이 소문난 사찰인가를 잘 알려주었다. 마당 양 편으로 18세기 양식의 당간지주가 마주 서 있었다. 옛 선조들이 당간지주에 괘불을 걸어놓고 극락왕생을 염원했던 유물이 바로 각 사찰입구에 반드시 세우는 당간지주이다. 또한 1909년에 촬영된 성불사 사진들을 보면 스님들이 태극기를 절 마당에 높이 세워 놓은 장면도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 1900년대 초에 촬영된 성불사 극락전 모습. 우측에 태극기가 게양된 광경이 이채롭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경내 대웅전격인 극락전과 5층석탑 모습.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가 셋팅해 놓은 목마가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경내 전각들 사이에 핀 붉은 장미꽃. 마치 사회주의 불교를 상징하는 듯 붉은 색이 돋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목마의 말꼬리 옆에는 즉석사진 간판과 함께 고객들이 착용할 수 있는 각종 의상과 장신구류들이 놓여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똑같은 이름의 성불사를 우리나라에 네 곳이나 지은 도선 선사
         
가곡 ‘성불사의 밤’의 배경이 된 장소는 이곳 정방산 성불사라는 주장이 지금까지 정설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곡의 배경이 되었다는 근거는 실제 희박하며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불사를 창건한 도선 국사는 당시 똑같은 이름의 성불사를 우리나라에만 네 곳이나 창건했기 때문이다.

이북에 한 곳과 이남에 세 곳을 지어 우리나라에서만 도선이 지은 성불사가 모두 네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러 가지 정황상 그중에서 그나마 이곳 성불사가 가장 유력하다고 여겨졌을 뿐이다.

이남에 있는 성불사들을 살펴보면 먼저 충남 천안시 태조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성불사가 있는데 이 절은 현재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라고 한다. 이 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어느 날 학이 날아와 바위에 불상을 만들고 날아간 자리에 도선국사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 곳은 전남 광양시 봉강면에 있는 성불사로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시기에 소실됐으나 지난 1966년부터 지속적으로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18세기 ‘범우고’와 ‘광양읍지’ 등에 그 존재가 기록돼 있다.

마지막 또 한 곳은 충북 내륙에 위치한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에 위치한 해발 520미터의 성불산(成佛山, 옛이름 松明山) 아래에 있는 성불사터이다, 산 아래에는 옛 절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직지심체요절)’가 발간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 측에서 이 성불사를 복원할 계획으로 지도부가 2013년 11월과 201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절터를 방문해 복원 불사를 구체화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 말기 직지가 엮어진 성불사에 대해서 충북 괴산, 경북 영천과 대구, 황해도 황주와 해주, 평산, 함북 길주 등이 문헌에 나와 그 위치를 두고 현재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곳 정방산의 성불사가 백운화상이 직지를 편집한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여. 하루 빨리 서지학자들의 엄격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노산의 가곡에 등장하는 ‘성불사’가 정방산에 있는 이곳 성불사 외에도 이남에만 모두 세 곳이 있는 만큼 모두가 자신들의 절이 가곡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 정방산 성불사의 법성 스님도 이 절이 노산이 지은 노래가사에서 언급한 장소가 맞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러나 정방산 성불사를 비롯해 이남에 있는 여러 성불사들의 주장들은 실제 가능성이 있는 주장들이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도 할 수 없고, 틀리다고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다만 노래가 탄생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불사의 밤’이 발표된 것은 ‘노산시조집’이라는 노산의 첫 시조집이 발표된 1932년이므로 우리나라에 산재한 네 곳의 성불사측에서는 이은상의 행적과 대비해 그 연관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이은상은 살아생전에 어느 곳의 성불사를 모델로 지은 시라고 밝히지 않았고, 그에 따라 이곳 정방산 성불사가 어떤 역사적 근거에 의해 그 가사의 주인공이라는 증거는 아직까지 뚜렷하게 없다. 다만 노산이 이화여전 교수시절에 이곳 정방산 성불사를 방문했다는 전언에 의존할 뿐이다.

수수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극락전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법성 스님은 일주문에 들러서기 전부터 일행들의 갖가지 질문들에 대해 소상하게 답변해 주느라 진땀을 뺐다. 일행들의 발걸음이 어느덧 극락전에 이르자 일행들을 모두 법당 안으로  불러들인 스님은 일행을 모두 불상 앞에 나란히 서도록 했다. 일행이 모두 들어서자 목탁을 치며 통일을 기원하여 반야심경을 읊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필자일행을 위해 예불을 올려주는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스님의 염불은 매우 처량하고 애처러운 곡조를 띤 구성진 가락처럼 느껴졌으며 남측 스님들의 염불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주불전인 극락전은 1374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리고 1650년(효종1) 정면에 퇴칸을 덧붙였으나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전후 1957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며 북측 건축용어로는 “배부른 기둥 우에 3익공, 통천정, 배집지붕을 얹은 단층건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석축 위로 기단을 올린 것이나 다포, 기둥 등의 방식들은 물론 겹처마를 댄 맞배지붕과 건물의 천정을 연등천정으로 마무리 한 것 등을 보면 고려시대 단청문양이 남아 있어 전통적인 고려 건축물의 방법을 따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었다. 특히 공포는 전형적인 주심포계 형식이며 꽃문양으로 창호를 꾸미고 금단청과 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단청칠은 북에서 최고의 단청칠 기능 보유자로 손꼽히는 안창호라는 동무가 완성한 것이라고 했다.

안창호는 북에서 37년 동안 단청만 연구해온 인물이며 현재 남포시에 산다고 했다. 그는 성불사 뿐 아니라 평양의 대동문과 보통문, 평원의 훈련정, 해주의 태봉각, 안변의 가학루, 안주의 백상루, 안주의 백상루, 태천의 양화사 등의 단청칠을 직접 맡았다고 하니 가히 그 분야에 일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2002년 6월경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원군에 있는 량천사를 현지답사 했을 때 안창호가 그린 대웅전 천정의 무악도와 여러 단청들을  구경한 후에 몹시 칭찬했다고도 한다.

특히 극락전안의 삼불상은 아미타 삼존불로서 목조불상이며 전형적인 18세기 조선 후기 양식이며 온화한 표정과 자비로운 미소를 지녔다. 주불인 아미타불 좌우에 모신 보좌부처는 대세지와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삼불 모두 은은한 미소와 자상한 눈을 지녔으며 예술적으로 볼 때 뛰어난 목조 공예 작품으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극락전 법당 안쪽 구석에는 작은 범종을 달아 놓았는데, 지금도 간혹 예불의식에 쓰이고 있다고 한다. 미니 범종이라 그런지 귀엽고 앙증맞아 보였다.

▲ 극락전 내부를 출입하는 일행들의 모습. 우측에서 세 번째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극락전 법당 안에 모셔진 삼불상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가장 인상 깊은 전각은 500 나한을 모신 응진전이었다
       
성불사를 대표하는 응진전(應眞殿)도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다포양식의 건물이었다. 1327년에 중창되었는데, 경북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황해북도 연탄군의 심원사 보광전, 평안북도 박천군의 심원사 보광전과 함께 고려 시대의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반도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불교에서는 ‘응진(應眞)’이라는 뜻이 ‘아라한(阿羅漢)’을 지칭한다고 했다. 아라한은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른 완전해진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며 1935년 해체해 수리할 때 묵서명이 발견되어 이 전각의 연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1327년(충숙왕 14)에 주심포 건물로 세워졌으나 1530년(중종 25) 중수 시에 공포만 교체하였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필자가 국립중앙박물관 발행 자료를 살펴보니 ‘응진전’으로 나와 있었으나 1909년에 찍은 사진자료에 의하면 보수하기 전 사진에 나오는 편액에는 ‘응진당(應眞堂)’으로 되어 있었다. 아무튼 응진당과 응진전은 같은 용도의 건물을 말하며, 원래는 부처의 제자 16나한을 모신 곳이었으나 현재 500나한으로 증가된 것이다.

그러나다가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들어와 다시 지은 응진전은 그 내부가 고려양식이지만 훗날 조선시대에 들어 다시 중건하면서 고려양식과 조선양식이 공존하며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응진전은 극락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건물이고, 그 밖의 건물들은 조선시대에 세웠다고 보면 된다. 응진전 정면은 그 길이가 무려 20미터나 되는 길쭉한 건물이면서도 균형이 잘 짜여있고 나란히 줄지어선 기둥들과 처마 밑 장식, 아름다운 처마의 짜임새 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보면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이와 같이 응진전은 현존하는 옛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시기에 건축된 것이며 뛰어난 건축술과 높은 예술적 기교로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공포형식의 변천관계와 기능상의 차이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또한 응진전에는 포식공포를 하고 극락전에는 익공식 공포 방식을 했다는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특별히 응진전 내부는 무려 오백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압권으로 느껴졌으며 건물 자체도 여섯 채 전각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불교의 도를 깨우친 500여 성자들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들은 삼불상 좌우에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익살스런 표정을 지녔는데 때마침 한 줄기 햇빛이 나한들의 얼굴들을 향해 비추이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다양한 표정들을 연출하였다.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착각에 빠지도록 해 마치 시공을 초월한 공간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필자가 볼 때 이곳 응진전은 건립 연대나 독특한 건축양식도 훌륭하지만 그 안에 모셔진 오백 나한상만으로도 그 가치가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나한상들은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것으로 보였는데, 표정이 저마다 익살스럽고 천연덕스러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또한 500나한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난을 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이 저렇게 사실적이고 생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금방이라도 나한들이 벌떡 일어나 나에게 악수를 청할 것만 같았으며 활기찬 나한상들이 걸어 나와 개구쟁이처럼 법당 안을 뛰어다닐 것만 같았다.
     

▲ 좌측에서 촬영한 응진전의 단청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응진전 내부 삼불상 모습. 삼불상 좌우에 각각 250 나한을 배치하여 모두 500나한상을 모셨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응진전 삼불상 우측에 모셔진 250 나한상.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응진전 삼불상 좌측에 모셔진 250 나한상 앞에서 통일을 기원하는 필자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500 나한상은 똑같은 표정이 하나도 없으며 각각 다양한 표정을 지녔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5층석탑과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의 아름다운 조화들
      
경내를 돌아보니 마치 한 여름 밤처럼 아직도 곤충들의 소리가 숲속에서부터 요란하게 들려오는 바람에 어릴 적 시골에서 느낀 그 시절의 정감어린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무래도 경내 건축물 중에는 고려 충숙왕에 창건된 응진전과 극락전이 가장 돋보였다. 또한 ‘정방효종(正方曉鐘)’이라했던가? 예로부터 이곳 정방산 성불사의 새벽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해 황주팔경(黃州八景)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고 하니 이 절의 종은 단연 최고의 유물이다.
  
특히 성불사의 범종은 조선 숙종 때 만든 것으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종소리로 인해 전국에 사는 많은 불자들의 발길을 성불사로 향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범종은 어디로 갔는지 현재 흔적도 없었다.

또한 경내 건축물들의 배치는 앞뜰을 중심으로 전각이 주위를 사방에서 둘러싸는 형식이며 그 중심에는 극락전 앞의 돌탑이 자리 잡은 형국이었다. 탑은 두 단으로 된 밑단 위에 5층으로 올려졌다. 단순해 보이나 만든 수법이 검소하면서도 세련돼 보였다. 현재 극락전 앞에 있는 5층 석탑은 원래 명부전 앞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은 국보 27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윗기단에 음각으로 새기고 윗면에 연꽃잎을 양각으로 새겨 놓아 매우 격조 있어 보였으며 탑 높이는 4.36 미터에 달하며 4각형의 5층 돌탑 구조이다.

응진전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전각은 명부전이다. 명부전은 단청 색깔도 최근의 것으로 보여 고풍스런 맛은 없으나 수수한 전각으로 보여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전면에 마루를 깔아 개방하여 평범한 전각처럼 느껴졌으며 기둥 상단부에 보를 지르고 보 사이에 귀면을 조각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전각 안쪽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었는데 조각 수법으로 볼 때 역시 근래에 조성된 작품이라 고풍스런 맛은 없었다.

청풍루에 도달하니 중앙 통로를 뺀 나머지는 명부전처럼 마루를 깔았으며 오른 편 마루 천정에 목어를 걸어 놓았다. 그러나 목어의 이빨을 지나치게 강조해 물고기로 보이기보다는 마치 용이나 악어처럼 보였다. 단아한 기운을 풍기는 운하당(雲霞堂)은 사찰의 전각이 아니라 서원의 공부채에 가까운 느낌을 주어 수수한 맛을 더 해 주었다. 현판의 의미가 구름도 머물다 간다는 뜻인데 예로부터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들이 구름처럼 한 세상 멋지게 노닐다가 이곳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을 생각나게 했다.

▲ 극락전 뒤편에 있는 산당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명부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풍루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풍루에 매달린 목어. 모습이 마치 악어나 용같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외로운 성불사를 떠나며
     
이곳은 한때 “붕어빵에 붕어 없다”는 우스갯소리처럼, 풍경소리로 널리 알려진 이 절간이 최근까지 풍경이 전혀 달려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주지 스님은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소이탄 공격으로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풍경들도 소실됐고 그 후 2003년도 까지 우리 절간에는 풍경이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해 주었다. 그러다가 10여전이던 2003년경, 마침 남북교류 행사로 인해 방북 중이던 서울 우이동 도선사 주지 혜자 스님이 이 절에 풍경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서울로 돌아가 풍경 장인이 지극정성으로 만들어 보시한 풍경 20여개를 조선불교도연맹에 전달해 주어 이곳에 매달았다는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아마 정방산 성불사와 서울 도선사 두 곳 모두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라서 공통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성불사 경내 각 전각에 매단 풍경들은 특별한 이름들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극락전에 매단 풍경은 특별 제작을 해서 그동안 남북화해와 교류의 주춧돌을 놓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두 부자의 이름을 아로 새겨 극락전에 매달아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두 분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분들이라 여겨졌다.

어느덧 성불사 경내엔 정오의 햇살들이 유유히 사라져 버리며 석양의 전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 가야할 시간이다. 아쉬움을 안고 우리 일행은 떠날 채비를 서두르며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잊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 살피고 또 살폈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중략)
宇宙는 죽음인가요
人生은 눈물인가요
人生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성불사를 떠나며 평소 즐기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고적한 밤’이라는 시구를 떠올리며 평양행 승합차에 몸을 내던지며 시나브로 성불사의 고요한 잠을 청했다.

▲ 운하당 전각 추녀와 단청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운하당 현판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일주문 우측에서 바라본 정방산과 경내 모습 일부.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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