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탑의 중심축에 따라 대칭으로 건축된 배치 기법
     
필자가 참관 도중 절간 앞마당에 이르렀을 때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동승당 마루에 걸터앉아 대웅전과 석탑을 바라보니 대웅전의 오색찬란한 단청과 추녀 끝의 풍경이 가끔씩 지나가는 바람결에 댕그렁 댕그렁 청아한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마치 바람결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듯했다. 사회주의 나라 절간이라는 특별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태고적 신비감이 도는 듯한 분위기로 인해 잠시 고구려의 추억을 떠 올려보았다. 요술 램프 같은 풍경소리는 천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불러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오랜 만에 들어보는 청아한 풍경소리에 나의 마음을 비워보는 여유로움을 가져 보며 다시 스님과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고구려 시기에 창건한 평양의 주요사찰들은 영명사, 금강사, 광법사, 법운암, 정릉사 등인데, 현재까지 광법사, 정릉사, 법운암 등은 복원되었으나 영명사와 금강사는 아직도 사지(寺址)로서 연구 중에 있으며 머지않아 복원할 준비를 앞두고 있다. 다만 금강사로 추측하는 평양 청암리사지 탑은 평양 안학궁 터 옆에 건립한 평양민속박물관 경내에 복원되어 실물 크기로 우뚝 세워져있을 뿐이다.

해설사에 의하면, 평소 문화재와 사적지 발굴 보존 등에 대해 매우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생전의 김일성 주석이 1991년 2월 12일 광법사 개건 준공식에 맞춰 직접 찾아 “역사주의적 원칙에 맞게 광법사를 훌륭하게 복구한데 대해 큰 만족을 표시”했다고 한다.

“수령님께서는 평소 이곳 광법사를 친히 여러 차례 찾아주시어 ‘광법사는 우리 선조들의 재능을 보여주는 우수한 건축물이며 유구한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므로 잘 보존관리해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원래대로 복원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지도와 가르침을 주셨으며 그 결과 이렇게 훌륭한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해설사와 스님의 설명만으로도 광법사 복원에 대해 김 주석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경내로 진입하려면 일주문인 해탈문을 거쳐 천왕문을 통과하면 대웅전이 나오며 마당 한가운데는 8각 5층 석탑이 보인다. 남북 자오선을 축으로 해 중층(2층)의 대웅전을 남향으로 두어 그 앞에 석탑을 세움으로써 경내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고구려 식 절간의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었다. 또한 스님들이 좌선을 하며 기거하는 승당(僧堂)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배치되었는데 승당들은 툇마루가 있고 간결한 단청을 한 아늑한 구조였다. 이곳 스님들은 주로 동승당에 기거하며 집에 볼 일이 있을 때는 잠시 다녀오기도 하신단다.

입구에 있는 천왕문과 해탈문도 남북을 축으로 배치되었으며 해탈문 서쪽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동쪽에는 매우 육중하고 커다란 당간지주 두 개가 쌍둥이처럼 우뚝 서 있다. 원래 서쪽에 있던 것을 다시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한 천왕문 서쪽에는 1638년에 세운 ‘광법사십왕개소상비’를 비롯해 1727년 7월(영조 3년)에 세운 ‘광법사사적비’와 1760년에 세운 ‘광법사증수단청비’ 등이 비석의 형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각각 세월의 장구함을 보여주고 있어 나의 발길을 오래도록 멈추게 했다. 특히 “통훈대부 전(前) 행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이시항이 글을 짓고, 진사 황민후가 글씨를 쓰고, 한성 우윤 홍현보가 전서를 썼다”는 광법사사적비는 그 비석의 크기와 전후면에 음각으로 쓰여진 깨알 같은 한문 글씨의 단아한 필체는 나의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와같이 경내의 건축물들을 먼 거리에서 혹은 가까운 위치에서 주의 깊게 바라보니 이곳 광법사 역시 하나의 탑을 중심에 놓고 사방으로 건축물들을 배치하거나 탑을 통하는 중심축에 따라 대칭으로 배치되는 고구려 시기 사찰 양식의 배치기법을 적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 때 파괴되기 이전에 있었던 조선시대 건축형태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필자가 스미소니언 미술관에서 입수한 해방 전의 대웅전 마당 사진과 대조하면 조선식 건축양식도 아닌 듯 했으며 현재의 대웅전과 석탑의 형태도 그때와 너무 많이 다른 게 개건했다.
 

▲ 스님의 안내로 필자와 일행들이 광법사의 대표적 문화재인 광법사기적비와 광법사십왕개소상비, 중수단청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건너 편 산 바위에서 바라본 광법사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대웅전 모습. 2층 규모로서 내부는 한통속 구조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대웅전의 건축미에 매료되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전각이 바로 금당인데 대개 남북 모두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높이 걸어 놓는다. 또한 남측 사찰에서는 절에 따라 대적광전, 무량수전, 미륵전, 용화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경우도 많이 있으나 이곳 광법사는 한문으로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절간의 중심축이 되는 건물이기 때문에 웅장한 2층 합각집 형태를 띠면서 어칸들이 넓고 툇간들이 좁도록 만든 것이 특이해 보였다.

겉으로 볼 때 남측 대웅전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잘 다듬은 돌로 튼튼하게 올린 기단위에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축조되었고 붉은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콘크리트를 사용해 포식두공 기법이라는 공법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목조가 아닌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금당 내부를 보면 기둥을 높이 세워 2층까지 훤하게 틔워 통층이 되게 했고 천장 정 중앙 맨 위에는 붉은 닫집을 달고 그 아래에 불단을 올려 삼불상을 모셨다. 금당으로 들어가는 1층 앞면의 모든 문들은 전통적인 꽃살문을 달았는데 나름대로 어여쁘게 보였다. 꽃살문들의 조각기술이나 색채, 디자인 등은 섬세하지 않고 약간 투박하게 보였으나 누군가 정성을 다해 신심으로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름답게 보였다.

특히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공포(拱包)의 수수함과 팔작지붕의 곡선미,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짜 올린 다포(多包)등이 조화를 이뤄 어색하지 않고 매우 세련되게 보였다. 남측 사찰의 대웅전처럼 아주 웅장하고 빛나는 장식과 색상은 아니지만 절제된 듯하면서도 화려미를 갖췄고 동시에 간결미도 보여주는 등 매우 수준 높은 건축미를 보여주었다.

대웅전뿐만 아니라 동승당과 서승당이라고 부르는 다른 전각의 지붕과 단청도 매우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흔히 부처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는 집을 법당이라 부르고, 스님들이 공부하고 정진하는 집을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으로 부르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스님이나 방문하는 손님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집을 요사(寮舍)라고 하는데 이곳 광법사의 동승당과 서승당은 선원과 요사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으며 스님의 답변에 의하면 필요에 따라 1주일에 한 두번 정도 집에 다녀오며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 대웅전 앞 8각 5층 석탑 앞에서 동갑나기 스님과 함께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대웅전 우측 모습. 위층 풍경에는 파란 물고기, 아래층 풍경에는 노란 물고기를 매달았다.[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화려하고 단아한 단청과 청아한 풍경소리에 푹 빠지다
        
필자가 경내에서 무엇보다 가장 주목한 곳은 대웅전 단청이었다. 평소 남측을 방문하면 고궁이나 사찰의 단청을 감상하는 것을 매우 즐겨하던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금단청을 입히는 등 세심한 노력과 정성을 들인 광법사 대웅전이야말로 눈이 호강할 정도로 안팎이 아름다웠다. 꽃들과 기하학적인 문양을 서로 조화롭게 하여 마치 비단무늬를 짜 놓은 모양을 탄생시킨 것이 특색이었다. 정릉사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고구려 무덤벽화에서 발견된 단청과 조선시대 사찰의 단청을 근거로 색을 입혔다고 하니 그 노력도 가상하거니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 넘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형형색색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금당의 단청은 주존불을 모신 곳이라서 다른 전각들보다 안팎을 더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해 보였는데 특히 배흘림 기둥에 단청을 입힌 것은 매우 장엄미로 다가왔다. 대개 단청을 하는 것은 단지 전각을 아름답게 하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조 건물을 보존하는 방충 방습의 효과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엔 절간의 건축물이라고 해서 모두 다 단청을 하는 건 아니며 화학약품처리를 해서 단청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북측에도 목재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단청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사찰들이 계속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적막한 절간의 대웅전 단청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고찰의 자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엄숙함을 더욱 빛내주려는 듯 은은하면서도 화려하게 다가왔으며 내가 단청에 매료되어 있는 동안 갑자기 어디선가 청아한 풍경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인지하게 됐다. 처음에는 단청 때문에 발길이 머물렀으나 이번에는 단청의 아름다움을 넘어 풍경소리가 더욱 더 내 마음과 귀를 사로잡았다.

숲속의 흐느적거리는 버들잎 사이에 자리 잡은 대웅전의 여러 추녀 끝에서는 쉴 새 없이 땡그랑거리는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안팎이 단청으로 색동옷을 입고 우리들의 눈을 호강시켰다면 창공을 향해 뻗어있는 용마루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은 우리들의 귀를 통해 마음과 영혼에 심금을 울려주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울리는 풍경 종에 매달린 나무 물고기들은 시방세계를 깨우는 듯 한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고즈넉한 절간에는 마치 고승들의 알 수 없는 선문답이 현실이 된 듯 물고기 열댓 마리가 허공에 살고 던 것이다. 고요한 사회주의 나라 하늘 아래, 이처럼 영혼을 맑게 해주는 풍경소리와 단청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청아한 금속성 소리를 내는 풍경 종 끝에 매단 물고기 장식은 주로 목재로 만들어진다. 작은 종을 만들어 가운데는 추를 달고 그 아래 쇳조각이나 나뭇조각으로 붕어 모양을 매달아 놓으면 바람결에 따라 맑은 소리를 낸다. 이곳 북측에서는 풍경이라고 하지 않고 풍탁이라고 불렀다. 주로 대웅전과 모든 전각의 추녀 밑이나 불탑의 옥개석 전각 등에 달아 놓는데 이곳 광법사는 오로지 대웅전에만 달아 놓았다.

종 끝에 매달린 노랑 물고기와 파랑 물고기가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리며 출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물속을 이리저리 헤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며 물고기모양 자체가 어찌나 앙증맞던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절간에는 연못에만 물고기가 사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추녀 끝 풍경에도 물고기가 살아 있었고, 공포와 천장에도 살아 있고, 어느덧 내 마음 깊은 곳에도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듯 했으며 바람결에 잠시 스치기만 해도 어느새 땡그랑거리는 풍경소리는 어느덧 청아한 법음처럼 다가왔다.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는 물론 잠을 잘 때도 눈을 감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는 하루 24시간 온 종일 눈을 뜨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인지 저 물고기들은 잠자는 것과 깨는 것 그리고 이념의 경계선은 물론 삶과 죽음의 경계선마저 모두 넘나드는 듯 했다. 수행자는 24시간 눈 뜬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서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의미로 달아 놓았을 것이다.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항상 마음의 눈을 뜨고 혼침과 번뇌에서 깨어나 일심으로 살아가리라 다짐을 해본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 이 물고기처럼 불면 면학하는 수도자의 자세로 항상 깨어있겠다는 다짐을 하고 이제 사찰 입구에 있는 연못과 당간지주로 발걸음을 향했다.
 

▲ 대웅전 좌측 단청을 가까이서 찍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웅전 좌측 처마 끝의 곡선미. 윗층 처마 끝에 달린 풍경에 나무로 만든 파란색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웅전 2층 처마 끝 풍경에 달린 파란색 물고기가 살아있는 듯 앙증맞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웅전 좌측 처마 끝 단청을 가까이서 찍은 모습. 자로 잰 듯한 정확한 대칭 구조미가 너무 아름답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직사각형 연못의 복원과 당간지주의 발견
      
해탈문 입구 좌측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옛 연못이 복원되어 있다. 연못 안에는 연잎이 수면을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 절간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북측 당국은 광법사 복원공사 도중 발견된 당간지주를 초기에는 이 연못자리에 세웠는데 나중에 그 자리가 연못 터였음을 추가적으로 발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해탈문 우측 공터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간지주가 서 있던 자리에 현재의 연못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여성 해설사에 의하면, 이곳 광법사 비문 중에는 구룡산(대성산)의 아홉 마리 용과 아흔 아홉 개의 연못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기록의 근거와 인근 지역 인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1958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고 한다. 비문과 구전을 바탕으로 대성산 일대를 일제히 조사하고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비문에 기록된 숫자보다 갑절이나 되는 1백 70개의 연못 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간지주 앞에 도착한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광법사가 392년에 창건되었으니 이 당간지주의 나이가 무려 162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높이와 무게는 매우 웅장했으며 폭격에 의해 땅 속에 묻혔다가 발굴된 것이라 그런지 천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해 보였으며 육중한 모습과 달리 역사의 증인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매우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당간지주는 단순한 세로 형태의 바윗돌이 아니다. 당시 석재를 다루는 기술과 함께 해당 사찰의 규모와  위치를 확정해 주는 기준표가 되는 것이며 연원이 오래될수록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광법사의 당간지주는 남북을 통 털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당간지주는 평양 중흥사에 있으며 높이가 4m에 달한다고 했다. 현재 중흥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옛 터전만 남아있는데 유일하게 발견된 유물은 이 당간지주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모든 사찰들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입구에 당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꽂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며 이 당간이 쓰러지지 않게 지지대 역할이 필요한데 이때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육중한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광법사의 당간지주는 불교의 3대 절기인 석탄절, 성도절, 열반절 뿐 아니라 조국통일기원법회 등을 진행할 때 불교 깃발이나 쾌불탱화를 걸어놓고 행사를 진행한다고 증언했다
 

▲ 필자 일행에게 사찰 경내를 구석구석 안내하며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광법사 스님. 해탈문 좌우로 연못과 당간지주가 서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당간지주 모습. 불교 깃발이나 쾌불탱화를 걸어놓기 위해 당간을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말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스미소니언 미술관에서 입수한 해방 전의 광법사 당간지주 모습. 지주 앞으로 가마꾼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스미소니언 미술관에서 입수한 해방 전의 광법사 당간지주 모습. 사진을 찍은 일행 중 한 명으로 보이는 외국인이 당간지주 사이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경내에 있는 직사각형 구조의 연못. 광법사가 개원한 1990년 2월 이후에 한참을 지난 후에 복원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해탈문의 보살들과 천왕문의 수호신들
    
사찰에 들어오는 산문(山門)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일주문(一柱門)인 이곳 해탈문(解脫門)은 가운데 칸을 출입자들의 통로로 하고, 그 좌우 칸들에는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세워져 있었다. 해탈문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불교 최고의 이상세계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말 때문인지 뭔가 해탈되려는 기분도 은근히 들었다. 문수보살은 해탈문 좌측에 연꽃망울을 들고 푸른 사자처럼 생긴 해태를 올라타고 있었으며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타고 활짝 핀 연꽃을 들고 있었다. 문수보살은 지혜로써, 보현보살은 실천행으로써 석가모니를 보좌하는 협시보살들이라고 하는데 올라탄 형상의 얼굴만 보아서는 도무지 어린 동자승인지 장성한 보살인지 구분이 안됐다.

남측 불교 경내 건축물들을 보면 주불로 모신 금당 외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여러 보살을 모신 전각들을 비롯해 산신, 칠성 등의 토속 신을 모신 전각들과 역대 조사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전각들, 경전을 모시는 전각 등 여러 종류의 전각들이 일정한 교칙대로 질서 있게 배열되는 것이 그 특징인데 이곳 광법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주문을 통과하면 사천대왕을 모신 천왕문(天王門)이 나온 것이다. 사찰의 수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을 줄여서 ‘천왕문(四天王)’이라고 했다고 한다. 천왕문도 해탈문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칸을 출입자들의 통로로 하고, 그 좌우 칸들에는 각각 험상궂은 모습의 네 분의 사천왕상을 모셔 두었다.

천왕문 좌우 칸에는 지국천왕, 다문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등 사대천왕이 모셔져 있었는데 내부 좌측부터 지국천왕, 다문천왕 두 분을, 우측에는 증장천왕, 광목천왕을 커플처럼 각각 모셨다. 한편 이들 천왕들의 몸체 다리를 보면 하체는 주로 이승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저승에서 벌을 주며 발로 짓밟는 무자비한 형상을 하고 있어 섬짓해 보였다.

한편 필자가 미리 준비한 자료를 손에 들고 스님과 해설사에게 광법사의 전각들의 건축기법이나 공법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더니 도무지 그런 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남과 북의 건축 용어에 대한 이질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필자가 미국 스미소니언 갤러리에서 입수한 일제시대의 이곳 해탈문 사진을 대조해 보니 지금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사천왕의 형상은 마치 제주도의 돌하루방같이 생겼으며 그 옆에는 사모관대를 착용한 대감의 모습도 등장하는데 반해 오늘날의 광법사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들은 형상이나 표정들이 당시와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천왕 전각이나 산신을 모신 산신각, 칠성님을 모신 칠성각 같은 것은 본래 불교신앙의  대상은 아니지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우리 민속신앙까지 한데 아우르며 종교화되어 뿌리를 내리며 전각으로 모시기까지 했는데 북측 지역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기독교나 기타 여러 종교들이 하나의 통일된 형식으로 전 세계에 전파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라는 종교는 일정한 고정 형태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지역, 인종에 따라 그 문화 속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 잡는 특징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이곳 광법사를 비롯한 북측 사찰의 모든 전각에도 인민들이 손쉽게 찾아와서 형식보다는 진리를 추구하며 북측 사회주의 문화에 걸맞는 토속적 신앙들이 드러나 인간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기원해 보았다.
 

▲ 필자 뒤로 보이는 해탈문 전경. 내부에 코끼리상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해탈문 내부 좌측 칸에는 흰색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상이 서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해탈문 내부 우측 칸에는 푸른 사자 모습의 해태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상이 서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천왕문 내부 한쪽 칸에는 사천왕 중에 한 분인 지국천왕이 서 있다. 양손에 큰 칼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은 선한 사람에겐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늘 인간들을 보살피며 국토를 지켜준다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이승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저승에서 지국천왕에게 짓밟히며 벌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천왕문 내부 한쪽 칸에는 사천왕 중에 한 분인 증장천왕이 서 있다. 우측 손엔 용, 좌측 손엔 여의주를 들고 있는 증장천왕은 자신의 덕으로 만물이 태어날 수 있도록 덕을 베푸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이승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저승에서 증장천왕에게 벌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사천왕 중에 한 분인 광목천왕이다. 광목천왕상은 원래 악의 무리를 쫓는 역할이기 때문에 눈을 부릅떠야 하는데 광법사는 반대로 인자한 눈이다. 또한 우측 손에 쇠창살, 좌측 손에 탑을 들어야 하는데 광법사는 좌우가 바뀌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이승에서 죄를 짓고 저승에서 광목천왕에게 벌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사천왕 중에 한 분인 다문천왕이다. 항상 부처님의 설법을 빠짐없이 듣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항상 비파를 들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이승에서 죄를 짓고 저승에서 다문천왕에게 벌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스미소니언 미술관에서 입수한 해방 전 광법사의 천왕문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한때 조불련 스님들을 배출하는 불학원(佛學院)도 운영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양시 대성동구역 대성동의 대성산성 내에 위치한 광법사는 평양 시내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접근성과 대를 이어 인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김일성 주석의 적극적인 주도로 개건된 북측의 대표적인 복원사찰이라는 장점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탄생한 사찰이라는 역사적인 커다란 상징성 때문에 국내외 인사들의 방문시 참관 장소와 관광 코스로 가장 우선시 되고 있었다.

아울러 조불련의 모든 공식적인 법회 장소로도 적극 활용되고 있었으며 크고 작은 국가적 불교행사도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필자는 북측 조불련 산하에 승려들을 배출하는 불교학원(佛學院)이 이곳 광법사에서 잠시 운영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에게 몇 가지 물었다.

“과거에는 이곳 광법사에 스님이 되고자 하는 분들이 모여서 공부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 불학원은 벌써 오래전에 다른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어디로 이전했고 그곳에서는 현재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지요?”

“우리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책임 하에 운영되고 있는데 처음에는 량강도 삼수 중흥사 선원에서 시작을 해서 거기서 한 25년 정도 운영하다 나중에 평양 용화사로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광법사가 개건 공사를 마치면서 이곳으로 옮겼고 후에 다시 평양 시내로(조불련 청사)로 옮겨서 지금까지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분들이 공부를 합니까?”

“신심이 좋은 분들을 매번 뽑아서 불교 공부를 합니다. 경전과 불교력사는 물론 염불이나 불교제례 등을 공부하고 력사와 철학도 공부합니다. 그리고 불학원 말고도 지방에는 불교강습소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어 시험과 심사를 통해 스님들을 배출합니다.”

알고 보니 조불련은 승려 양성을 목적으로 1965년 조불련 중앙위원회 산하에 4년제 불학원을 오늘날의 량강도 삼수군 관평리 성거산(聖居山) 기슭에 있는 중흥사(重興寺)에서 개원했다고 한다. 불교의 특성상 대도시가 아닌 속세에서 떨어진 첩첩산중 심산유곡을 일부러 도량의 장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89년 12월 평양 용화사로 이전했다가, 평양 광법사가 개건공사를 마치고 1992년 2월 개원하면서 불학원이 이곳 평양 광법사로 이전해 2년 동안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4년 6월경에 다시 평양 시내 조불련 청사에 입주해 조불련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을 함께 사용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학사일정이나 기수별 입학생, 졸업생 등의 정확한 자료는 공개된 바 없으나 학생들은 졸업 후 조불련 사무실이나 각 불교기관 혹은 전국에 있는 각 사찰에 파견돼 승려업무나 종교업무를 맡고 있는 듯 보였다.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노동당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야 하며 동시에 북측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야한다. 또한 조불련은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와 함께 1993년부터 고려대장경을 조선어(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해 2년 만에 완역을 하기도 했으며 드디어 2001년에는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17권의 고려대장경을 출간하는 등 꾸준하게 불사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직접 확인해보니 북측의 불교는 남측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으나 전통불교의 명맥이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물론 아직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년 고찰을 떠나면서
      
해방 직후 북측은 민족 문화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이른바 주체성의 원칙과 대중성의 원칙, 그리고 현대성(반복구주의)의 원칙, 역사주의(유물사관)의 원칙에 입각해 사회주의 이념에 배치되는 유물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했으나 반면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유물들은 모두 문화유산으로 발굴해 보존하는 정책을 펴왔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현재 북측에는 국보 50점, 보물 53점, 사적 73개소, 명승지 19개소, 천연기념물 467점 등 총 712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중 불교문화재는 국보 19점, 보물 28점, 사적 3점 등 총 50점이라고 한다. 북측의 사찰은 골고루 산재해 있는 편인데 그중에서 평양시는 6곳, 개성시 4곳, 황해도 12곳, 평남 4곳, 평북 18곳, 강원도 10곳, 함남 9곳, 함북 3곳, 량강도 1곳 등 총 67개소가 있다고 한다.

북측 불교가 이전보다 더 활기차려면 우선 저런 국보급 불교 문화재와 유적지, 유물들을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불교유적지와 문화재 발굴과 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남측 불교는 물론 미주를 비롯한 해외동포 불교계와의 협력과 지원을 받아서라도 이미 사지로서 발굴된 터전위에 옛 사찰들을 하루속히 복원하는 사업들부터 신속히 착수해야 한다.

또한 북측 불교가 흥왕하려면 조불련의 조직이 막강해야 하며 정체성의 영역이 좀 더 넓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승려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 활발하게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현재 평양 시내에 있는 초록색 3층 건물의 모습을 띤 조불련 청사는 건축된 지 벌써 10여년이 넘었는데 그 안에 불학원이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평양신학원도 처음에는 조그련(조선그리스도교련맹) 청사에 입주해서 운영하다가 나중에 별도의 신학원 건물을 건축해 이전했듯이 불학원도 속히 별도의 자체 건물을 확보해 실력 있는 교수진을 구비하고 승려 후보생들을 더 많이 확보해야한다. 후보생들에게는 집중적인 교육과 정해진 학제에 따라 불학원에 걸맞는 정상적인 학교 시스템이 가동되도록 해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의 불교이기 때문에 아직은 여러 제약이 많겠지만 오히려 장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북측 불교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전통적 불교성향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체제 하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불교를 구축해왔다. 석가탄신일이 되면 조불련을 주축으로 사찰에서 봉축법회도 열고 경내에 연등을 설치하고 탑돌이도 하는 등 나름대로 여러 기념행사를 주도하고 있으나 법회 현장은 기독교의 조그련과 별 차이 없이 국가 정책이나 노동당의 방향에 맞춰 최고지도자의 정책을 옹호하고 협력하는 소위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구체적인 한 예로 최고지도자가 발표한 올해 신년사의 실천 결의를 다지는 등의 정치적 내용의 행사를 매우 당연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종교적 내용의 법회보다 정치적 성향이 내포되는 법회나 행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필자가 평소 북의 각 종교단체 지도자들과 대화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정치는 곧 신성하다”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더 나아가 “정치는 곧 거룩한 것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으며 “가장 정치적인 것이 가장 거룩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교가 거룩한 영역이 되려면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돼 있다.    그런 연유 때문에 불교 측에는 조불련의 심상진 위원장이나 최근의 강수린 위원장을 비롯해 기독교 측 조그련 위원장 강명철 목사도 등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나 상임위원에 선출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몸을 담고 있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천주교, 천도교 등 여러 종교 대표자들도 대부분 정당과 내각의 영향력 있는 간부 출신들 중에서 선출되거나 겸임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측 종교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는 대로 북측 종교인들과의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종교적 교류는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남측 종교는 보수주의 성향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런 남측 불교계가 바라는 ‘순수한 종교적 교류’ 혹은 ‘종교 교류의 비정치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북측 불교의 정체성을 비하하거나 별종으로 이단시하지 말고 내재적 관점에서 존중해주고 받아들여 남북의 불교가 서로 상생하며 소통해야 한다.

필자 일행이 광법사를 떠나며 스님에게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석별의 정을 나누자 절간 식구들도 주차장까지 따라 나와 필자 일행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 까지 잘 가시라는 배웅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 광법사를 떠나면서 스님과 석별의 인사를 나누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