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무대로 첫 고위급 회담을 비밀리에 약속했다가 무산된 것으로 나타나 주목됩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 20일 보도에 따르면, 평창올림픽 참석차 한국에 온 펜스 부통령이 지난 10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회담할 예정이었으나 2시간 전에 북한 측이 취소 의사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첫 느낌은 북미 고위급회담이 불발됐다는 아쉬움보다 그래도 양측이 어떻게든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일종의 안도감입니다. 대부분의 정세분석가들은 평창올림픽을 무대로 북한과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만날 것이라고 짚으면서도 확신은 하지 못했습니다. 북미관계의 불안정성과 예측불가능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평창올림픽에 임하는 양측의 사전 입장도 한몫 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펜스 부통령이) 어떠한 북한 관료와도 만날 계획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다만 펜스 부통령은 한국행 직전까지 “우리는 북한과의 만남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고 다소 여지를 남기긴 했습니다. 조영삼 북한 외무성 국장도 “명백히 말하건대 우리는 남조선 방문기간 미국 측과 만날 의향이 없다”면서 “우리는 겨울철 올림픽과 같은 체육축전을 정치적 공간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북미 회담을 먼저 제안한 쪽은 북한이며 이를 취소한 것도 북한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제안하고 왜 취소했을까요? 북한은 미국과 만나 당연히 관계개선을 위한 미국 측의 입장을 진지하게 듣고 싶었겠지요. 이를 위해 북한이 분위기 조성을 한 정황이 있습니다. 북한은 평창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8일 건군절(인민군 창설일) 70주년 열병식을 오전에 조용히(?) 치르고, 오후 5시 30분께 녹화중계 한 것입니다. 이는 ‘열병식이 8일에 개최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미국의 요구에 일정하게 호응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며칠 후 평창을 무대로 한 미국과의 대화 성사를 위해 공을 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달랐습니다. 북한의 대화 분위기 조성과는 달리 펜스 부통령은 지난해 6월 북한에서 풀려난 지 6일 만에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부친 프레드 웜비어 씨를 대동했으며, 방한 첫날부터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하고, 탈북자들과 만나는 등 대북 강경 행보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평창올림픽 사전 리셉션에서는 김영남 북한 상임위원장과 눈 한번 안 마주치고 다른 정상들하고만 수인사한 후 5분 만에 떠나버렸으며, 이어진 개막식에서도 바로 뒷줄에 앉은 북측 대표단을 내내 외면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구걸이 될 법한 대화를 북한이 철회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극비리에 진행됐던 북미 회담 결렬 과정을 미국이 왜 뒤늦게 공개했느냐는 점입니다. 아마도 미국은 평창올림픽에서 펜스 부통령이 보여준 행태가 국제적 비난이 되는 것을 차단하고 싶었겠지요. 그러면서 북한과의 대화 노력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겠지요. 결국 미국 측의 정보 유출은 북한과의 대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의 북미 대화가 불발됐다고 해서 양국의 대화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폐막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회가 끝나고 2회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마침 폐막식에 맞춰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선임고문이, 북한에서는 김영철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한국에 옵니다. 이번에도 양측은 서로 만날 일이 없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북한과 미국이 개막식 때 만나고자 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서로 만날 기회와 수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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