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2‧8독립선언(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의 마지막 부분이다. 일본이 끝내 우리의 자유를 외면한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피를 흘리며 영원한 혈전하겠노라 선언하고 있다.

「2‧8독립선언」은 당시 2천만 동포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대내외에 천명한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외침이다. 또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는데 선도적인 선언으로도 작용했다. 나아가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항일운동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 준 단초도 「2‧8독립선언」에서 찾을 수 있다.

사건은 우연히 발발하지 않는다. 「2‧8독립선언」의 배후를 말함에서도 상해의 신한청년당(1918년)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한청년당은 동제사(1912년)와 신한혁명당(1915년)의 정신을 이어받은 청년집단이었다. 다만 동제사와 신한혁명당이 대종교 인물들이 중심이었다면 신한청년당은 기독교 인물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 정신적 연결고리는 단군이었다. 다음 신한청년당 취지문의 서두에서도 확인된다.

“청년아! 단군의 혈손인 청년아! 과거의 치욕은 잠깐 잊을지어다. 선조시절의 영광을 회복할지어다. 인류의 앞날의 역사를 빛낼 새로운 대 영광을 창조할지어다.”

또한 동제사로부터 신한청년당까지 그 중심에는 예관(睨觀) 신규식(1879∼1922)이 있었다. 신규식은 동제사⟶신한혁명당⟶신한청년당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흐름을 지속시킨 인물이다.

일찍이 신한혁명당을 주축으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1917년)을 이끌어 낸 그는, 국내와 일본 등에 젊은 동지들을 밀파해 「2‧8독립선언」에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국내와의 긴밀한 연락 속에서 「3‧1독립선언」의 도화선을 당겼다.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이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일깨운 것도 그러한 이유다.

주목되는 것은 「대한독립선언」이다. 신규식은 「길림선언」이라고 칭했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선언은 항일무장투쟁의 본거지인 만주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한다.

흔히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흐름을 의병에서 독립군 그리고 광복군으로 계승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항일무장투쟁의 에너지원은 「무오독립선언」에 응축되어 만주무장투쟁의 중요한 기폭제로 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평가는 소홀하다.

본디 국내 「기미독립선언(3‧1독립선언)」의 단초는 1917년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중심으로 촉발되었다. 천도구국단은 1914년에 보성사(普成社)를 해체하고 만든 단체로 손병희를 명예 총재로, 옥파(沃破) 이종일(1858∼1925)을 단장으로 한 항일비밀결사였다. 1918년 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던 시기,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는 우리 종교인들의 연합을 통한 거사를 구상했다. 그러면서 천도구국단원들의 주도로 무오년(1918년) 3월 3일을 기해 시위를 감행하려했으나 실행하지 못한다.

다시 민중시위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성안(成案)하면서, 갑오농민운동과 갑진개혁운동을 이은 「무오독립시위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1918년 9월 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육당 최남선(1890∼1957)에게 선언문도 부탁했다. 그러나 「무오독립시위운동」은 다시 좌절되었다. 원로들의 교섭 지연, 자금 부족, 민중 동원의 어려움과 더불어 최남선의 선언문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계획은 1919년 3월 1일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무오독립시위운동」으로 계획된 거사가 밀리고 밀려 「기미독립선언」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편 「기미독립선언」을 기획했던 이종일의 일기 내용이 흥미를 끈다. 1918년 11월 20일자에, 이미 만주에서 「무오독립선언」이 실행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기 때문이다.

“(1918년 11월) 20일. 중광단원(重光團員) 39명이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겠다고 하니 우린 무얼 했느냐. 망설임으로 이같이 낭패 지경이 된 것이다.”

1918년 「무오독립시위운동」을 실행치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다. 주목되는 것은 이종일이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와 참여 인원수, 그리고 중광단원들을 중심으로 무오년에 이루어졌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독립선언」을 「무오독립선언」 혹은 「중광단선언」이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더불어 「무오독립선언서」를 처음 명명한 인물도, 1918년 11월 이종일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양력으로 1919년 2월 1일은 음력으로 1919년(기미년) 1월 1일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선언서의 말미에 양력 2월로 적혀있는 문건을 근거로 결코 「무오독립선언」으로 부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대한독립선언서」를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부르게 된 배경에는, 이종일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준비 과정과 완성이 무오년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선언의 중심에 있었던 대종교단의 기록에도, “북로군정서의 전신인 중광단은 군단조직 후 무기의 불비(不備)로 군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청년동지에 대한 정신교육과 계몽운동에 주로 힘쓰고 있다가 개천 4375년 무오(서기 1918) 봄에 기미 독립선언의 전주곡으로…(중략)…39인의 동서(同署)로 독립선언을 발포하였으며”라고 적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이 천도교의 천도구국단이 동인(動因)이었다면, 「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의 중광단이 주동이었다. 중광단의 ‘중광(重光)’도 1909년 대종교의 ‘중광(단군신앙의 부활)’에서 온 명칭이다. 「무오독립선언」의 발표 장소 역시 막연히 길림에서 발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만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대종교총본사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신규식이 「길림선언」이라 칭한 이유다. 그 선언서의 서명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대종교 교주였던 무원(茂園) 김교헌(1868∼1923)이었으며, 그 내용 역시 대종교의 사상과 뗄 수가 없다. 다음 선언서의 내용을 보자.

“이천만 대중의 깊은 충정을 대표하여 감히 하느님[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며…(중략)…단군대황조께서는 상제(上帝)에 의지하여 우리에게 기운을 주시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일신(一神)은 대종교 중광과 더불어 등장하는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연유한 것이다. 단군대황조라는 용어 또한 대종교 중광의 동기를 가져다 준 「단군교포명서」에 처음 등장한다.

「무오독립선언」은 일개 중광단 선언 또는 대종교가 중심이 된 외침이었다. 그러나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책원지에서 발표된 한민족 전체의 대일항쟁선언이요 한민족 전체의 의지를 드러낸 포효였다. 또한 만주 전지역의 독립군들에게도 「무오독립선언」은 독립운동의 방략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정신적 재무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고무시킨 것이다.

후일 중광단의 맥을 계승한 북로군정서가, 이 선언에 실린 다음의 무장혈전주의를 계승하여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미증유의 대승리를 올리게 된 쾌거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번 죽음은 인간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돼지와 같은 삶을 누가 구차히 도모하겠는가?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는 마음과 몸을 부활할 것이니 어찌 일신을 아낄 것이랴!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우리 같은 마음, 같은 덕망의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의 본령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하고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임을 명심하여 하늘[皇天]의 명명을 받들고 일체의 못된 굴레에서 해탈하는 건국임을 확신하여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

이러한 혈전주의는 「2‧8독립선언」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하겠노라”고 외쳐댄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국내 「기미독립선언」에 와서는 평화주의로 탈색되었다. 당시 국내가 일제에 의해 강점된 지역이라는 한계가 컸을 듯하다.

「2‧8독립선언」 기념일이 엊그제 지났다. 100주년을 앞둔 3‧1절도 코앞이다. 아쉬운 것은 광복을 맞은 지 70여년이 지나도록 변함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권력과 명예와 돈이 뒤엉킨 현실 속에서 가치의 추구는 뒷전이 된 지 오래다. 대의(大義)는 현상에 묻혀 그 본질은 퇴색했는가 하면, 명분은 실리를 감추는 그저 명분일 뿐, 사람다움마저 팽개쳐진 사회다. 어찌 육신의 속박만이 개돼지 같은 삶이겠는가. 헤어나지 못하는 정신적 질곡은 개돼지만도 못하다 할 수 있다.

지금 동계올림픽 열기가 남북 화해의 분위기 속에 한층 고조되고 있다. 설 명절의 흥분은 어려운 서민들에게는 그나마 위안이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평창동계올림픽의 개막식을 중계하는 미국 <NBC방송>의 망언이 또다시 우리 마음을 후벼 팠다. 또한 영국 신문 <더 타임스(The Times)>는 공동 입장한 한반도기 사진을 설명하며 ‘독도는 일본이 소유한 섬’이라고 보도해 물의를 빚었다.

특히 미국 < NBC >는 모든 한국인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방송을 하여, 오늘의 우리를 식민지의 노예인 양 매도했다. 전세계에 한국인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를 긍정하는 것처럼 호도한 것이다. 이 말은 일제의 식민지근대화가 있었기에 평창동계올림픽도 개최할 수 있었다는 의미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혹여 오늘의 흥분과 열기 속에 묻혀, 썩어가는 우리의 실상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허울 좋게 비춰진 우리의 표피적 삶에, 나락으로 지는 내면의 실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 우리 모두 냉정해지자.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등이 반세기만에 일궈낸 우리의 오늘에 감탄의 시샘으로 가십(gossip)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들의 눈에 비친 평창동계올림픽이, 배부른 노예들이 개최한 재롱잔치 정도로 인식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가 오늘의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차치해두고라도, 우리의 오늘은 분명 정신적 질곡의 시대다. 하기야 우리 지식층에 식민지근대론자들이 어디 한 둘인가. 학자인 양 하며 독도공유론을 내세우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더욱이 잘난 교육부 관료마저 우리 민중들을 개돼지로 몰아세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산다. 대한민국 법원 역시 그러한 가치 선택에 대해 관용해 주는 판결이 다반사다. 가소를 넘어 분노를 누를 수 없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 들 안 새랴. 그저 안팎이 개돼지로 몰아세우는 세상에서, 사람인양 살아가려는 우리 꼬락서니가 서글프기만 하다.

왜 다시 「무오독립선언」의 외침이 귀청을 때릴까. 올해로 「무오독립선언」이 등장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우리가 잊고 사는 100년 전의 외침! 우리 선열 39인이 토해낸 피 끓는 고함! 노예로부터 벗어나자는 한맺힌 절규! “개돼지 같은 삶을 누가 구도할 것이냐! 개돼지 같은 삶을 누가 구도할 것이냐!”

그래, 오늘도 민중들은 개돼지 취급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전도(顚倒)된 세상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부류들이 민중들을 개돼지 같다고 혐오하는 꼴이 너무 가관이다. 이런 세태에 민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을사늑약 당시, 그 시대를 통곡한 「시일야방성대곡」의 다음 한 구절로 위안을 삼아 볼 뿐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大臣)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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