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만수대대기념비 앞에 서다
    
북 인민들에게 ‘조선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평양을 내 두 발로 직접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감개무량한 일이다. 특히 순안공항에 도착해 평양시내에 진입할 때의 기분이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기쁘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집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들어 그 기분을 만끽한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미소가 가슴속에서 올라오곤 하는데 일행 중 누가 내 얼굴을 볼까봐 슬쩍 눈치를 살피기도 하지만 내 표정은 감출 수 없기에 쑥스러운 듯 입술을 굳게 다무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평양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은 아마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언덕일 것이다. 동상이 위치한 장소는 ‘만수대대기념비’라고 불리는 구역에서도 정 중앙이다. 방북단을 초청하는 기관에서는 공식, 비공식 방문단이든 해외동포든 외국인 방문객이든 혹은 개인이든 단체든지 간에 가급적 평양에 도착한 첫 날, 가장 먼저 만수대대기념비를 찾아 동상을 참관하도록 일정을 주선하며 권유한다. 북측 입장에서는 외국 방문객들이 수령에 대해 정중하게 도착 인사를 가장 먼저 드리도록 한다는 차원일 것이다.

그러나 ‘참관(參觀)’과 ‘참배(參拜)’는 다르다. 참관이란 전망대로서 매우 적절한 장소인 만수대언덕에 올라 평양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거나, 동상과 대기념비 조형물 탑들과 벽화 등을 관람하려는 의도로 올라온 일반 관광객들을 말한다. 또한 참배는 하지 않으면서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기념촬영을 하거나 나름대로 의미를 찾는 이들도 참관객에 해당된다. 그러나 동상이 있는 장소는 관광지가 아니라 북에서는 특별 성지로 여기는 혁명사적지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에게는 ‘관광지’보다는 ‘참관지’ 혹은 ‘참배지’로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필자가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를 보더라도, 내가 속한 일행이 처음으로 안내받은 곳도 이곳 만수대대기념비와 동상이었다. 대개 공항에 도착해서 평양의 정해진 숙소로 가는 도중에 가장 먼저 들리는 코스처럼 관례가 되어 왔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이런 관례는 더욱 완화되어 현재는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해 선택하는 추세이다. 특히 외국에서 자주 방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만수대 동상 방문은 자신이 매우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다.

필자가 처음 만수대대기념비 구역의 동상을 참관 할 때의 일이다. 석양이 내려앉기 직전 언덕에 도착해서 동상을 바라보니, 마치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는 듯한 모습으로 평양 시내를 엄숙하게 내려다보는 듯해서 약간 놀라기도 했다. 동상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기운과 함께 웅장함과 포근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으며,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해 생동감 있는 작품이라서 그런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위압감보다는 숙연해지도록 했다.

그동안 나는 친미는 되는데 친북은 안 되는 사회, 친미는 죄가 안 되지만 친북은 죄가 되는 사회인 한국과 미국에서 살아왔다. 내 눈 앞에 서 있는 저 동상의 주인공 사진만 소지하고 있어도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재판을 받는가하면, 북과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에서는 마치 테러리스트처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 그런 나라에서 살다가 이곳 만수대 언덕에서 직접 마주하여 바라보니 이질감보다는 또 다른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북 인민들은 사회주의적 동상 문화라는 상징적 체계를 통해 자신들을 대신해 이 세상에서 영생하게 될 대리인으로 평소 절대적으로 추앙하던 수령을 선택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에 맞서려는 종교성마저 내포되어 있는 듯 보였다. 또한 이미 고인이 된 수령을 선두에 세워 수십 년간 이어져온 북미 대결전에서 최후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강력한 무장력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비록 육체적 죽음은 맛보았으나 수령을 함축하는 상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수령이 지켜왔던 의미, 가치, 명예, 세계관은 동상으로 살아남아 그의 유지를 성실히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만수대대기념비(萬壽臺大紀念碑)’라는 명칭에 대해 북 인민들은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대 언덕위에 자리 잡은 혁명박물관 벽면에 그려진 백두산 벽화를 배경으로 서 있는 동상과 대군상기념조각탑이 위치한 전체 공간들을 통칭해서 부른다. 물론 평양시민들은 대기념비를 ‘대군상조각기념비’ 혹은 ‘대군상조각탑’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원래의 최초 동상은 1972년 4월, 당시 김일성 수상의 탄생 60돌에 맞춰 최초로 제막되었으며, 그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이듬해인 2012년 4월, 기존 김일성 동상의 우측에 김정일 동상을 추가로 세운 것이다. 오른손을 높이 들고 시선을 멀리 내다보는 포즈를 취한 김일성 동상과 왼손을 허리춤 뒤에 대고 있는 포즈를 취한 김정일 동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조선의 혁명투쟁역사를 조형물로 만든 대군상조각탑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백두산 벽화가 그려진 조선혁명 박물관 정면 벽면이 보이는데 이 세 가지 모두 서로가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동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우뚝 선 대군상조각탑 그리고 뒷 배경이 되는 벽면의 벽화 그리고 정 중앙에 서 있는 두 동상을 한 세트로 묶어 한꺼번에 바라봤을 때 대기념비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과 메시지가 파악되고 해석될 수 있었다. 동상과 대군상탑 앞에 서 있으니 웅장한 스케일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이 느껴졌으며 인민대학습당, 창전아파트를 비롯해 대동강 건너 주체탑 등 평양의 주요 건축물도 한 눈에 둘러 볼 수 있었다.

▲ 만수대대기념비 동상을 배경으로 셀카 촬영을 하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주체탑에서 바라본 만수대대기념비 전경. 짙은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동상 진입로에 설치된 꽃매대(꽃집). 꽃을 미리 준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구입하는 참배객들도 많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동상 앞에서의 무례한 행동은 제재를 당할 수 있다
     
필자가 볼 때 북 인민들에게 있어서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의 동상은 단순한 동상의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동상은 그 자체가 조선의 체제요, 철학이며, 이념이며 정책이었다. 북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동상을 제막하고 3년이 안된 2년 8개월 동안, 이곳을 찾은 방문자가 국내외 합해 연인원 2천 7백 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1년에 천 만 명이 찾은 것이다. 전체인구 2천 5백만 명의 북 인민들이 아마 한두 번 즘은 여기를 방문했을 것이다. 천만 인민이라니, 그 집체의 일사불란한 참배행위를 통해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는 최선의 수단으로서의 외침과 몸부림이었으며, 이런 절박한 현실에서 동상을 참배하는 행위란 민족 자주의 자존심으로 담아 낸 하나의 ‘추모정치예술’이며, 지도자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영원한 비보(悲報)를 지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전위적 추모혁명’이었다.

북 인민들이 동상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에 대해 적대세력들과 외부 방문객들이 주관적으로 왈가왈부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과연 외부인들이 인민들의 추모의 마음과 그들의 고민의 지점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그런 말들을 하는지 의문이다. 내 처지에서 그들을 평가할 수도 없고, 평가하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참배나 참관을 목적으로 만수대언덕에 도착하면 안내원이나 관계자의 지도에 따라 동상 앞에서 참배를 해야 하며 본인이 거부할 경우에 강요하지는 않는다. 참배를 하려는 단체와 개인은 필요에 따라 입구 매점에서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구입해도 되며, 형편이 안 되면 그냥 참배를 해도 된다. 참배하는 광경을 보면 단체일 경우 동상 앞에 한 줄로 정렬한 후에 인도자의 멘트에 따라(혼자일 경우 자발적으로) 기립자세에서 가벼운 목례를 하거나 혹은 허리를 숙이는 정도이다. 그러나 북측 단체나 기관의 초청을 받아 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참배의식은 매우 중요한 책임성과 중에 하나이므로 가급적 입장을 배려해 권유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젠가 필자가 미 동부지역 목회자들과 통일운동가들이 만수대 동상을 참배하는 비디오 영상을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행 중에는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목사도 포함됐는데, 의외로 문 목사는 다른 일행들이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꼿꼿하게 서서 참배 의례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평소 반북적인 성향은 아니다. 이처럼 개인의 성향과 판단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에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혹 기독교 신자들이나 특정 종교 신자들 혹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참배행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북측 관계자들이 억지로 권유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는다. 특히 북측 관계자의 사실적 증언에 의하면 기독교 교리의 잣대로 참배행위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며 예민하게 반응하며 대책 없이 무례하게 행동하는 방문객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으며 그런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나 근거 없는 악의적인 소문처럼 참배를 거부할 경우 위협을 가하며 강제적으로, 위압적으로, 동상참배를 강요하는 일은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안내하는 북측 관계자들은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를 매우 우월하게 여기며 두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추앙과 존경심을 갖고 있지만, 사상이나 종교가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심도 큰 편이다. 필자가 볼 때 외국에서 방문한 동포들이나 외국인들은 혹여 자신들의 치기어린 작은 행동이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안내원들에게 큰 결례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어느 방북단으로부터 우연히 전해들은 이야기다. 김일성 동상의 포즈를 보면 오른손을 높이 들고 있는 형상인인데, 일행 중 어떤 해외동포가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면서 장난스럽게 비슷한 동작을 취하다가 이를 목격한 북측 인민들과 관계자들에게 크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고 들었다. 별거 아닌 거 같으나 인민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신성모독처럼 보일 수가 있다. 내재적 관점에서 북을 이해하려는 상식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또한 해외 관광객이나 방문객들이 동상을 촬영할 경우 안내원들은 가급적 카메라 앵글이 전면을 향하여 올바로 정면 사진이 나오도록 요구하고 있다. 동상 뒷면이나 측면 혹은 이상한 각도에서의 촬영은 만류하고 있다.

필자도 북을 방문했을 때 초창기에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평양 인민대학습당 1층 현관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김일성 석고좌상을 촬영하려던 필자는 먼저 1층 정면에서 찍은 후 곧이어 2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나는 석고상을 좀 더 멋있게 찍어보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아래층의 좌상을 향해 하향식으로 촬영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안내원이 아연실색을 하며 촬영을 제지했다.

촬영을 제지한 이유에 대해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수령님(석고 좌상)의 정면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 것만 허용이 됩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측면이나 특이한 각도로 찍는 것도 허락이 안 되는 이유는 미국이나 적대세력들이 불순한 의도로 사진을 편집해 수령의 초상을 왜곡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도 포함됐다고 했다. 이와 같이 동상에 대한 북 인민들의 생각은 특별한 애정과 함께 생존 시의 수령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한 여름, 화창한 날씨 속에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만수대대기념비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언덕 좌측 진입로를 통해 바라본 만수대언덕 동상.
[사진제공 - 최재영]
▲ 만수대언덕은 인근 시민들이 찾아와 가벼운 산책과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도 이용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만수대 동상 금속 성분과 크기에 대한 정보는 금기사항
     
1972년 4월 13일, 당시 김일성 수상의 탄생 60주년을 맞이해 동상 제막식과 함께 대군상기념비탑, 조석혁명박물관 벽화 등도 동시에 개관했다고 한다. 모두 72년 4월부터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것이다. 동상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북측 당국이 성분과 규모를 공개적으로 밝혀주었다. 그러나 동상을 제작한 금속 재료나 동상 크기나 무게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북측이 공개한 자료 외에는 파악할 수 없다. 예민한 부분은 질문을 하기가 부담스럽고 굳이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적대세력들은 이 동상을 100% 순금으로 제작했으며 수백억 원의 비용이 들어갔다느니 하며 낭설들은 퍼트리고 있는데, 성분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근거도 없고 설령 알았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다.

전문가가 아닌 필자의 눈으로 볼 때 이곳 만수대 동상의 재질이 정확하게 어떤 성분인지는 전혀 종잡을 수 없다. 아니, 보면 볼수록 헷갈렸다. 청동으로 본체를 제작한 후에 도금을 입힌 ‘금상(金像’)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구리로 만든 진짜 순수한 ‘동상(銅像)’ 그 자체인지는 육안으로 구분이 안됐다. 특정 방향에서 바라보면 황금빛 찬란한 도금으로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붉은 빛이 아주 강한 구릿빛으로도 보였으며 또 다른 방향에서 보면 황금색도 구릿빛도 아닌 제3의 묘한 색깔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게와 크기, 주재료 성분이나 제작 기법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아무튼 북을 방문하면서 여러 유형의 동상들을 간혹 봐 왔지만 이렇게 큰 동상은 유일무이하다. 성인 남성이 꽃다발을 증정하기 위해 동상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순간 포착하면 대리석 단대(발판)가 사람 키보다 훨씬 더 높았다. 그것을 기준삼아 볼 때 동상의 높이는 어림잡아 20미터 이상은 족히 되고도 남아 보였다. 동상 크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상 옆 대군상조각탑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북측은 탑의 가장 높은 부위가 22.5미터라고 공개했기 때문에 이 조각탑과 동상의 크기를 눈 짐작으로 비교 해보면 동상 높이가 대략 가늠이 된다. 필자가 볼 때 동상이 약간 더 커 보였기 때문에 동상 높이도 22미터는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상 뒤편은 마치 병풍처럼 백두산이 그려진 ‘조선혁명박물관 벽화’가 가로 70미터, 세로 12.85미터의 규모로 그려져 있었고, 동상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대군상의 기발탑(깃발탑)’들이라고도 부르는 역동적인 탑들이 서 있다. 좌측 탑 이름을 ‘항일혁명투쟁탑’, 우측은 ‘사회주의혁명 및 사회주의 건설탑(약칭 사회주의혁명건설탑)’이라고 부르는데, 위용 있게 늘어 서 있는 두 개의 탑 모두 가장 높은 부분이 22.5미터라고 한다.

항일혁명투쟁탑에는 항일투사 119명의 군상들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형상화했고, 사회주의혁명건설탑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맨 앞에 횃불을 높이 든 투사를 뒤따르는 109명의 군상이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꿈틀대는 듯한 역동적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 이렇게 많은 무리의 군상을 조각한 탑의 평균 높이는 5미터이고, 총 연장길이는 무려 200미터라고 한다. 군상들에 등장하는 군인들과 투사, 인민, 노동자들은 하나 하나 각기 다른 의미와 메시지를 주는 듯했다.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보여준 항일투쟁과 해방 후 사회주의혁명 투쟁역사와 사회주의 건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어 하나의 역사 파노라마 그 자체였다.
 

▲ 동상 부근을 청소하거나 사용한 꽃다발을 정리하는 담당 일꾼들의 모습. 대리석 단대(발판) 높이와 성인 키 높이를 비교하면 동상의 크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만수대대기념비 우측 대군상조각탑을 배경으로 셀카를 촬영하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천리마동상 부근 대로에서 바라본 만수대대기념비. [사진제공 - 최재영]
▲ 석양이 은은히 비추는 가운데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대군상조각탑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연간 연인원 천만 명이 참배한다는 만수대 동상

필자가 방북 체류 중에 북측 관계자들에게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2012년 4월 만수대언덕의 동상 제막식 이후 2015년 11월까지, 그러니까 2년 반 동안에 무려 2,641만 명이 동상을 찾아와 참배했다고 한다. 물론 중복 인원이 합산된 연인원 통계이긴 하지만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원래 만수대 언덕에는 최초에 김일성 주석의 동상만 한 자리에 꼭 40년간 세워져 있었으나, 필자가 2012년 평양에서 개최된 10.4선언 5주년 통일토론회에 참석하던 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도 더불어 우측에 세워졌다.

“2012년 4월, 우리 수령님(김일성주석) 탄생 100돌을 맞아 동상을 높이 모셨으며 그때부터 2014년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무려 2,641만 명의 인민들이 이곳을 다녀갔고 꽃바구니(화환)는 5만 2천여 개가 진정(증정)됐습니다.”

관계자가 메모지에 볼펜으로 빼곡히 적어서 읽어주는 것으로 보아 관계자의 통계가 정확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2년 반 동안 연간 천만 명 정도가 동상을 참배한 것이며, 이중에는 유치원생, 초등학교 어린이, 청소년 학생들, 청년대학생들, 인민군, 노동자, 농민, 해외동포들과 외국방문객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라고 한다.

▲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만수대 동상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일과를 마친 군인들과 근로자들이 주로 단체로 야간에 참배하는 경우도 많다. 조선혁명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김정일 동상은 양복 코트에서 모자 달린 점퍼로 바뀐 후의 최근 모습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동상 주변 시설 공사와 보수 관리는 ‘혁명사적지도국’의 책임
    
만수대대기기념비 구역에 위치한 동상 주변은 그 면적이 무척이나 광대하다. 시시각각 청소와 조경관리, 헌화된 꽃바구니와 꽃다발, 화환 등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일들, 경비와 보안을 서는 일들, 야간 조명이나 음향 관리, 매일 벌어지다시피 하는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일들, 보수공사나 재정비사업 등 이곳은 무수한 손길들을 필요로 한다. 특히 동상 주변과 대군상기념조각탑 앞의 교양마당과 계단 등에 대한 관리 업무들은 필수적이다. 해당 부서는 단계별 보수 관리를 1년 내내 진행하다시피하며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며 필자도 보수작업을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동상이 차지하는 주변 공간은 9천 550㎡이며 동상 바로 인근에 조성된 교양 마당, 2천 260㎡의 대계단 등에 대한 공사는 혁명사적지도국의 책임 하에 진행된다고 한다. 동상이나 기념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고지도자가 최초 발의하면 장소, 착공 및 완공 일정 등의 기획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당역사연구소가 총지휘를 한 후에 만수대창작사에 의뢰한다. 만수대창작사는 총력을 기울여 작품의 디자인, 도안 설계, 예산, 작가 선정 등을 구체화하여 사업을 추진한다고 했다. 또한 동상이나 기념비가 세워진 주변 시설물에 대한 구체적인 공사와 작업은 혁명사적지도국 산하 혁명사적건설국에서 책임을 진다고 한다.

물론 만수대동상과 전국에 있는 70여개의 동상들과 동상 주변에 대한 단순한 청소나 가벼운 관리는 그 지역의 인민들이 주축이 되어 순번이 정해져 있으며 책임자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보수작업이나 리모델링(개건공사) 등은 혁명사적지도국 관할이다. 혁명사적지도국은 혁명전적지나 혁명사적지 건설과 유지를 위해 당성이 충천한 기술자들로 구성된 국가기관이며 설립 역사도 꽤 오래돼 2016년이 창립 40돌이 되는 해였다고 한다. 건설국에 소속된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작업장을 ‘전투장’이라고 부르며, 만수대동상이나 기념비, 여러 사적지를 건축하거나 주변 축조물들을 보수 관리한다. 또한 금강산과 백두산 등 명산의 바위에 구호문구를 새기는 일들도 관여하고 있으며 전국에 산재한 사적지를 관리하기 때문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혁명사적건설국 소속 기술자들은 뛰어난 인력과 장비 등을 갖춘 전문팀으로 구성되며 동상주변 건축물과 조경, 계단 등을 유지 보수하는 구체적인 작업들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달되면 모든 준비를 마치는 대로 현장으로 달려가 적당한 곳에 ‘전투장’이라는 임시거처를 설치하고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그곳에서 숙식을 하며 작업에 매진하는데 공사기간은 보통 수개월 정도 걸리지만 작품이나 건축물의 작업 난이도에 따라 길게는 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 혁명사적지도건설국 소속 기술자가 만수대 사회주의혁명건설탑 위에 올라가 보수작업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혁명사적지도건설국 소속 기술자들이 만수대대기념비 동상 옆 계단을 보수작업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만수대창작사 작가들과 혁명사적지도건설국 소속 기술자들이 합동으로 대형 크레인 등 을 동원해 동상 손질과 보수 작업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만수대대기념비는 인민예술 조각가 로익화의 작품
     
필자는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조각 작품들을 관람해왔으나 이토록 사회주의 혁명에 걸맞는 엄청난 크기의 기념비는 처음 본다. 명칭 앞에 큰 대(大)자가 붙을 만했다. 이 커다란 작품을 하나도 아니고 한 장소에 두 개를 만들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사뭇 궁금해 북측 관계자에게 묻자, 곧바로 이름을 댈 정도로 북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미술계에 명성이 높은 조각가 로익화 선생이라고 했다.

그의 자손들도 조각가들이 많아 평양에서는 조각예술가 가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로익화의 아들 로인수는 이미 만수대창작사 공훈조각창작단에서 조각가로 일하고 있으며, 손자 로현성은 평양미술대학에서 조각학부 전문부에서 조각을 전공중이고 또 소학교에 다니는 또 다른 손자 로금성도 미술에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로익화는 평양미대에 입학해 회화를 전공하려고 했으나 조형예술로 전공을 바꾸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조각을 배웠다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창의적인 조각기술들을 체계 있게 습득하더니 급기야 대학 재학시절에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만든 조각품 ‘고난의 행군’을 창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시절에는 기존 조각예술가 선배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제작하는데 동참하였다.

또한 그는 이곳 만수대대기념비를 제작한 것 외에도 ‘삼지연대기념비’를 비롯해 많은 기념비 조각들을 곳곳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김일성 훈장’을 수훈했는가하면 국가로부터 ‘김일성상 계관인’, ‘노력영웅’, ‘인민예술가’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훗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아들 로인수도 부친을 닮아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정에 설립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을 제작했고, 평양 문수물놀이장에 있는 김정일의 총천연색 채색입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평양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는 로현상과 막내 로금성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함께 장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데다 단란한 가정까지 이루고 있어 로익화는 많은 조각가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한다.

▲ 만수대대기념비를 제작한 조각가 로익화의 가족사진. 좌부터 손자 로금성, 로익화, 부인, 며느리, 아들 로인수, 평양미술대학 조각학부 전문부에 다니는 손자 로현성. [사진출처: 조선의 오늘/사진제공: 최재영 목사]

만수대 동상의 무게를 알게 했던 12살 소녀 이야기
   
1972년 10월 개최된 남북적십자사회담 기간 중에 평양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남측의 이범석 대표가 이끄는 제3차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은 어느 날 평양시내 참관에 나섰다고 한다. 남측 대표단은 방북 시마다 시내관람과 사적지 참관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북측 김태희 단장 일행이 안내하는 코스에 따라 만수대언덕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남측 대표단장은 훗날 외무부장관을 지내다가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중 버마 아웅산묘지 참사에서 희생당한 이범석이었다.

“만수대 동상 참배를 마치고 인근 언덕을 지나던 어린 초등학교 여학생 일행과 마주친 남조선 대표단 한 성원이 “혹시 동상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라면서 질문했더니 12살 되는 어린 여학생 한 명이 ‘아버지 원수님을 받드는 전체 조선 인민의 심장의 무게를 합친 것과 같습니다’라며 당찬 대답을 해 남조선 대표단과 우리 일행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안내원은 필자에게 “그 소녀의 말대로 이제는 두 분 수령님의 동상을 높이 받드는 모심돌의 무게는 남북 7천만 민족의 심장을 합친 무게는 될 것입니다. 우리 수령님들께서 온 민족의 심장 속에 함께 계시면서 온 나라 인민들의 마음에 받들려 높이 서 계시니 우리는 언제나 대미 결전에서 최후 승리를 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부연 설명을 해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 동상의 무게와 관련된 갖가지 일화들이 원래의 이 이야기에 보태져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저 소녀의 일화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북 인민들에게 있어서 두 지도자의 동상은 곧 자신들의 심장이라고 여긴다. 심장은 곧 생명이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그 이상이 바로 이 만수대 동상인 것이다. 또한 필자가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하여 인민들의 염원을 담은 조작가들이 전신의 힘을 다해 땀과 정성으로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는 것을 참관하고 나니 사회주의 조선은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남북적십자회담 남측 대표단이 만경대 생가를 방문하는 모습. 선그라스를 낀 사람이 이범석 단장이다. 훗날 외무부장관을 지내던 중 아웅산 참사로 운명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만수대 동상들의 변천사
    
만수대언덕의 동상들은 자세히 확인하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의 변화들이 있었다. 지난 1972년 4월, 당시 김일성 수상의 탄생 60돌을 맞아 제막된 김일성 동상은 한 자리에서만 정확히 40년을 견고히 지키고 있던 중 김일성 탄생 100돌을 맞은 2012년 4월 13일, 기존 김 주석의 동상 우편에 같은 크기와 재질로 제작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도 세워졌다. 40년을 인민복 차림으로 서 있던 기존의 김 주석 동상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새 동상은 말끔한 양복 위에 정장 코트를 걸친 멋진 신사 차림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한편, 제막식 당일의 김정일 동상을 자세히 보면 인민복 차림 위에 양복 코트를 걸친 형상이었는데, 10개월의 시간이 지난 2013년 2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일인 광명절을 맞아 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코트에서 모자가 달린 점퍼 차림의 형상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 동상의 얼굴 표정이나 포즈, 헤어스타일, 손동작 모양 등은 바뀌지 않았고 겉옷만 바뀐 것이다. 그 점퍼는 서거 직전까지 입었던 소위 ‘야전솜옷’이라 불리는 외투를 의미한다.

북 기록영화를 보면 김정일 위원장이 입고 다니는 점퍼는 부인 고영희 여사가 직접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모친 고영희는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야전 반외투들을 마련해 주면서 “이 야전 반외투를 조선 역사에 남기자”라는 어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로 김정일 위원장은 현지 지도를 갈 때는 항상 점퍼 차림을 선호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상은 점퍼를 입은 모습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어 김정은 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10개월 동안 다시 제작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필자가 볼 때 기존 코트 입은 동상을 리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 제작한 것으로 보였다

생전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대 김일성 주석의 동상을 만들 때, 가장 앞장서서 발의하고 주도했듯이, 세월이 흐른 후 이제 김정은 위원장도 선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 건립을 위해 만수대창작사와 동상건립 전투장을 여러 차례 찾아다니며 세부적인 현지지도를 했다고 한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불과 10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최상의 수준에서 건립될 수 있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동상 제작이 초단시일에 계획되어 속전속결로 실행됐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만수대 동상들은 이런 변천사를 지닌 채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 만수대 동상이 최초로 제막(1972년 4월)된 이후 단체로 찾아와 참배를 하는 평양 시민들 모습. 김일성 주석의 동상은 이때부터 40년간 인민복 차림이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두 번째 동상 제막식(2012년 4월) 행사 직후의 모습. 기존 김일성 동상 우측에 김정일의 동상을 세웠으며 김 주석 동상은 40년 만에 인민복에서 양복 위에 코트차림으로 교체됐고, 손은 기존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갔다. 한편 처음 선보인 김정일 동상은 인민복 위에 정장코트를 입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양복코트를 입은 김정일 동상은 제막식 10개월 만에(2013년 2월 16일부터) 모자 달린 점퍼를 입은 동상으로 전격 교체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김일성 탄생 100돌을 맞아 동상제막식 행사를 위해 하루 전날 모여 연습하고 있는 인민군 의장대의 모습. 뒤로 흰색 휘장으로 덮여진 동상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김일성 탄생 100돌을 맞아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는 장면. 테이프 커팅과 함께 동상을 덮은 흰색천이 벗겨지면서 본체가 드러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거대한 동상이 북 인민들에게 주는 의미 

방북기간 중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평양을 비롯해 이북 각 지역에는 두 지도자의 동상과 대형초상화, 영생탑(永生塔)들을 간혹 접한다. 특히 도시 한복판에 높이 세워진 영생탑에는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행사장에는 “영생”이라는 장식물과 구호문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형물을 대하는 인민들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마치 살아있는 수령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해서 건국된 미국은 ‘성경책’을 정신적 유산이나 상징물로 여긴다면, 일본은 ‘천황’이 정신적 구심점이며, 영국은 대영제국의 상징적 군주로서 자신들의 ‘여왕’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북 사회는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의 동상들이 그런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만수대 동상만큼은 살아있는 수령과 다름없이 간주하는 매우 특별한 장소로 유명하다. 심지어 만수대창작사 주관 하에 동상 제작이 완성되어 대형 운반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국가보위성과 인민보안성에서 총출동해 동상 운반에 대한 안전과 보안을 철저히 경호하고 있으며, 도로에 주행 중인 차량들과 보행자들도 방해할 수 없도록 철저히 통제되며 혹시 운전자나 보행자들은 흰 천에 덮힌 형상물이 지나는 것을 목격하면 즉석에서 경의를 표한다.

또한 북에서는 도시를 계획하거나 시설물을 건축할 경우에는 꼭 사적지나 혁명관이 아니더라도 건축법상 가장 도시 중심부에 모든 인민이 바라볼 수 있는 상징물을 세우게 되어 있다. 동상이든, 초상화이든, 영생탑이든 사적관이든 북 인민들은 자신들의 수령이었던 두 지도자를 향한 소위 혁명적 사랑과 그리움들을 단순한 감성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이런 상징물을 통해 정신무장으로 승화시킨다. 특히 성인들이 정복을 입고 외출할 때마다 가슴에 부착하는 초상휘장(배지)를 보면 “두 분 수령님들을 항상 우리들 심장 가까이 모십니다”라는 고백을 한다. 이런 인민들의 마음을 서방세계는 이해 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이다.

이런 사회주의국가 조선을 지탱해오는 주체사상은 인간을 육체적 생명 그 이상의 의미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을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고 있다. 비록 육체를 지닌 개인의 한 생애는 죽음으로서 끝이 나지만 그가 속한 사회와 집단은 영원히 존재하고 발전한다고 믿는다. 이웃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며 자기 목숨까지도 인민 대중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때 그 사람은 영원한 사회적 생명체와 함께 영생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민중과 혁명의 이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헌신과 투쟁에 자기 목숨을 바칠 때 비록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나지만 그가 지닌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정치적 집단과 더불어 영생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평양과 이북지역 곳곳에 높이 세워진 영생탑에 기록된 문구와 동상들도 그런 맥락과 의미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 관점으로 대입해 광신도나 이단종파의 교리를 보듯 판단하면 안 된다.   
진정한 부활과 영생의 삶이란 ‘나’는 사라지고 ‘세상’과 ‘사회’를 살리는 것인데 보수 한국교회 신자들은 정반대로 ‘세상’은 사라지고 ‘나’만 살려는 부활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더구나  예수의 시체가 다시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믿으면서 자신들도 죽으면 언젠가 다시 예수처럼 육체가 부활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부활이란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자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마저도 그분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서 항상 일어난 일들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 평양을 비롯한 북 전역에는 ‘영생’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영생탑과 동상은인민대중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때 누구든지 사회적 생명체와 함께 영생하게 된다는 원리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천리마동상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만수대동상과 대군상조각탑의 상단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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