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설 선생 100주기, 헤이그 밀사 사건 및 이준 열사 100주기를 맞아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과 지난 3월 31일 서울 인사동 인사고전문화중심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해가 가기 전에 묵은 숙제를 꼭 털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떠나지 않아 결국 올해 마지막날 마지막 기사로 이 인터뷰를 싣게 됐다. 다름 아니라 이상설 선생 100주기이자 헤이그 밀사 이준 열사가 분사(憤死)한 110주기인 올해를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은 여러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고서화 수집‧소장자이자 서지학자, 독립운동 연구자 등 여러 방면에 전문성을 갖고 있지만, 역시 이준 열사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연구가 돋보인다. 아니 이준 열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양재 이사장은 지난 3월 31일 서울 인사동 인사고전문화중심에서 긴 인터뷰를 가졌고, 이후 지난 7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준 열사 집터를 비정해 표지석을 세울 때도 다시 그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었다.

이 이사장은 올해 100주기를 맞은 이상설(1870-1917) 선생에 대해 “수학이나 한문 지식이나 이런 면에서 탁월한 사람이고 당시의 대학자다”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성립 2,3년 전에 권업회도 하면서 큰 조직을 하나 태동시키려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이상설과 연관성이 있거나 그 영향력 안에 있거나 한 사람들이 있었다”며 “우리가 기려야할 대표적인 사람을 꼽자면, 결코 여러 명에서 빠트릴 사람은 아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이야기는 항상 이준 열사로 귀결됐다. 특히 최근 우리 학계에서 정설로 굳어진 병사(病死)설에 대해 반박했고, 이상설 선생 주변과 이준 열사 주변과의 오랜 불화관계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는 “이준이 헤이그 회의장에서 자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설이 이준 열사를 발견했을 때 피를 흘리고 있다고 했고, 이상설이 관여하고 있던 당시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들었던 권업회의 <권업신문>에는 두 번에 걸쳐서 ‘이준 열사가 피를 흘린 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며 “이상설은 한 번도 병사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병사라기보다는 이준이 7월 14일날 사망하기 전에 1주일간 굶었다”며 “단식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혈압이 상승하고, 그 상태는 칼이 들어가면 그냥 몸이 터진다. 그때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단식 상태에서의 자결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아울러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로는 이준 열사가 헤이그를 갈 때 칼을 하나 가지고 갔다. 그것이 민영환이 자결했던 칼”이라며 “일본 외교문건, 그리고 같은 시대에 국내 대다수는 자결설을 이야기했고,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7월 14일 돌아가시고 16일 이상설로부터 전보를 받는데 자결했다는 전보가 온 걸로 알고 있다. 그것은 예전에 <동아일보>에도 그 기사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준 열사의 병사설이 제기된 과정에 ‘이상설 자손’들이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상설 쪽에서는 이준이 죽어야 이상설이 산다고 하면서 일본 자료들을 입수해서 퍼트리기 시작한다”는 것. ‘문중 독립운동사’를 경계하는 이유다.

이 외에도 그는 헤이그 밀사들이 지참한 고종 황제의 ‘특사증’의 진위 문제와 고종 황제가 하사한 ‘여비’의 행방 등 역사 속에 묻힌 세세한 대목들에 대해서도 관련 자료들을 파고들어 나름의 해답을 찾아나서고 있다.

지난 7월 14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준 열사 순국 100주기 추념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 이사장의 자료제공이 중요한 토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준 열사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152, 153번지 일대, 지금의 덕성학원 해영회관 쪽 자택에서 헤이그로 출발했고, 부인 이일정 여사는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 상점인 ‘일정상회’를 운영했다. [관련기사 보기]

그는 고려불화(佛畵)에 관한 논문을 썼는가 하면, 조선 초기 화가 이상좌와 혜원 신윤복의 가계를 처음으로 밝혀내기도 했고, 『동의보감』으로 널리 알려진 허준의 묘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는 “허준에 대해 잘못 알려진 신분적인 면, 출생연도, 스승, 사망지, 출생지 이런 열 몇 가지를 내가 다 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허준의 잃어버린 묘소를 내가 찾아냈다”며 “10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찾아냈다. 왜냐하면 거기가 민통선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발견자 이양재의 이름도 표기돼 있다고.

그가 허준에 대해 깊이 파고든 이유에 대해 “『동의보감』을 완성한 것이 홍익인간과 상통하는 것이고, 거기에 허준의 신분이 서자였다”며 단군이 바로 서자이자 홍익인간을 개국이념으로 삼았음을 지적했다.

그는 “내가 기독교인이라 우리 민족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며 “단군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우상이다 뭐다 문제시하고 있지만 실존인물이고 또, 우리 역사상에 우리 민족을 태동시킨 분이시라면 우리 옛 민족적 신앙에 관계돼서 하나님 영향 안에서 나타난 것”이라며 자신의 사상적 연원을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이상설 100주기, 이준 열사 110주기를 맞아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과 3월 31일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우리 민족에게도 하나님은 나타났을 것이다”

▲ 고서화 수집‧소장자이자 서지학자, 독립운동 연구자 등 여러 수식어를 가진 이양재 선생이지만 이준 열사에 대한 연구를 필생의 주요 임무로 생각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정유년 기획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소개해 달라.

■ 이양재 이사장 : 이번에 우리가 ‘정유자’(丁酉字)를 정조대왕이 만든 지 240주년을 기념해서 ‘정유년 안녕하세요’ 전시를 준비 중이다. 인사동 백상빌딩 지하 1층에 인사고전문화중심에서 여는데 전시장이 200평 가까이 된다.

여기도 이준 관계 자료도 하나 있고, 이상설 관련 자료도 있다. 4월 1일부터 시작하는데 20-30% 세일한다. 나도 두 권 샀다.

□ 선생이 작년에 이준 열사 전시를 한 것을 지켜봤고, <통일뉴스>가 지난해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기사를 연재하면서 선생의 자료 도움을 받았다. 올해는 이상설 선생 100주기로 진천군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오늘은 이준, 이상설 헤이그 밀사 관련해서 좀 더 알리고, 약간의 논쟁거리나 잘못 알려진 것, 현황을 짚어보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

먼저, 선생하면 떠오르는 게, 서지학자, 고서화 수집․수장자다. 고서화에 관련된 글도 여러 편 쓴 걸로 아는데, 고서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배경은?

■ 내가 만 스무살 되는 때부터 고서를 좀 수집했다. 딱 스무살 생일날 용돈을 좀 얻어서 인사동에 나와서 처음 산 책이 정조 때인가 나온 <이충무공 가승 李忠武公家乘> 목판본 두 책이다.

그리고 내가 기독교인이라 우리 민족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유태 민족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도 하나님은 나타났을 것이다. 과연 우리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났는가?’해서 자료를 수집했다.

처음 산 것이 <이충무공 가승>인데, 충무공이 하루는 잠을 자는데 어떤 머리가 흰 노인(白頭翁)이 나타나서 충무공을 깨우면서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뭐하고 있는 거냐” 야단을 친다. 그래서 놀라서 깨어 나가 보니까 역시 적군이 멀리서부터 몰려오더라. 이런 기록을 봤다.

그래서 그걸 보고서 ‘야, 이런 존재야말로 그 시대 그 사람들이 기독교적인 하나님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우리 민족에 내재된 우리 민족의 호국신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 호국신의 존재를 마치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하나님으로 우리 민족 가운데 나타난 걸로 생각했던 거다.

그렇게 돼서 차츰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게 됐고, 그 가운데서 단군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우상이다 뭐다 문제시하고 있지만 실존인물이고 또, 우리 역사상에 우리 민족을 태동시킨 분이시라면 우리 옛 민족적 신앙에 관계돼서 하나님 영향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런데 보면, 단군도 본인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 당시 기원전 24세기라는 것은 기독교 성경의 아브라함보다 이전 시기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방식과 같이 우리 민족 단군에게도 역사할 수가 있었다. 그 당시는 족장시대였고, 초기 기독교적인 것과는 다르고 초기 유대교 상황과 약간의 신학적 의미에서 일치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우리 민족의 지난 5천년 역사를 주도하고 인도해왔던 정신적 존재를 생각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봐왔다. 따지고 보면 하나의 종교에 몰입돼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학문적 입장에서 관찰을 해온 거다.

□ 여러 시대, 여러 방면에 걸쳐 자료를 수집한 걸로 아는데, 특히 깊이 파고든 분야가 있다면?

■ 내가 깊이 들어간 면은 화가들에 대한 서지학에 대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특별한 나름대로의 성과가 있다. 겸손하게 말하자면 성과고, 좀 교만하게 표현한다면 업적이다.

10년에 걸쳐 DMZ 안에서 찾아낸 허준 묘소

▲ 경기도기념물 제128호 허준 선생 묘. 파주군청은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사진출처 - 파주군청 홈페이지]

□ 특별한 성과 내지는 업적을 한두 가지 소개해 달라.

■ 특히 허준 선생에 대해서다. 허준은 서자(庶子)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이 하느님 환인의 서자다. 세상에 뜻을 둬서 태백산 단목(神壇樹) 아래 내려와서 신시(神市)를 열었다 했다.

단군신화에서 서자를 이야기한 것은 나름대로 보자면 민중사상이다. 적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통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에 뜻을 두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 홍익인간(弘益人間)적인 면이다. 그것을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고, 단군이 그것을 위주로 삼아서 개국이념으로 삼았다.

허준이 바로 단군의 홍익인간의 입장을 계승한의 사람이다. 의학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완성한 것이 홍익인간과 상통하는 것이고, 거기에 허준의 신분이 서자였다.

이런 면으로 봤을 때 허준은 조선시대에 와서 민중적인, 또 민족적인 정신의 맥락을 잇는 사람이다. 허준은 불가(佛家)적 의술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봤을 때 도가(道家)적 의술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사람이다. 허준의 의학사상은 도가적인 의학사상이 대종을 이룬다.

허준에 대해 잘못 알려진 신분적인 면, 출생연도, 스승, 사망지, 출생지 이런 열 몇 가지를 내가 다 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허준의 잃어버린 묘소를 내가 찾아냈다.

1945년 해방이후 남북이 갈리면서 47년도까지는 (북쪽) 자손들이 파주 묘소에 제사지내러 왔다. 그런데 48년도에 남북이 고착화 되면서 휴전선이 그어지고 각각 남북 정부가 국가를 세우면서 자손들이 남쪽으로 못 왔다.

자손들은 거의 대부분이 황해도 해주군 대거면(현재 황해남도 벽성군) 은동리에 세거했다. 허준의 종손 허형욱이 거기 살았는데, 이 사람들이 남쪽으로 월남을 안 해왔다. 지금 허형욱의 자손을 찾으면 좋을 텐데, 증손자쯤 될 텐데 찾을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다.

남쪽에는 진짜 자손이 하나도 없다. 나중에 만든 가짜 자손은 있다. 그래서 허준 선생 묘소가 48년도 이후로 버려졌다. 그래서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아내 지금은 경기도 지방문화재가 됐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부분들, 출생연도부터 바로잡았다. 출생지가 경기도 파주다. (서울) 양천구 공암이 아니다. 공암은 양천 허씨 본고장이지만 허준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임진강 건너 북쪽이지만 옛날 장단 땅이다. 장단군 진동면 부근에 양천 허씨 집단마을에서 태어났다.

묘소도 진동면 하포리 광암에 있는데, 그 묘소가 족보에는 번지수가 없어 거의 10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찾아냈다. 왜냐하면 거기가 민통선 지역이기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거기 들어가려면 지주회장을 내 차에다 모시고 그렇게 1년에 몇 번씩 드나들었다. 여름철에 가면 풀이 우거져 못 찾고 지뢰지대다. 지금은 성역화 돼서 관광코스로 포함돼 있고, 묘소 앞에 가면 누가 찾았다고 이름까지 써 놨다.

허준에 대해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것을 거의 대부분 고증해 낸 것이다.

□ 개인적 궁금함이 있다. <동의보감>을 도가적 맥락이라고 평가했는데, 중국 쪽과의 독립성이나 연계성은 어떻게 보나?

■ 중국은 중의(中醫)라고 한다. 원래 ‘한나라 한’자 한의(漢醫)라 했다. ‘대한민국 한’자에서 한의(韓醫)라고 하는 것은 근 30년 밖에 안 된다. 허준은 동쪽 의학, 동의(東醫)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이미 동의학이라고 했다가 근래에 와서는 동의라는 것은 중국을 의식해서 동쪽이라 했기 때문에 동의학이니까 명칭을 고려의학이라고 바꿨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동의라는 명칭이 따지고 보면 주체적 명칭이다. 중국의 의학과 다르다는 거다. 의학이라는 것이 중국에서도 북의가 있고 남의가 있고, 의학의 범주가 지역마다 조금씩 차아기 난다. 그런데 허준의 의학은 중국의 도가적 영향을 받았고, 불가적 요소도 나오지만, 우리의 재래적 의학을 집대성해 정리한 거다.

마침 우리 단군 역사를 보면 웅녀와 호랑이, 마늘과 쑥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이야기에서의 마늘과 쑥은 당 시대의 의학적 이야기다. 그 이야기와 허준의 민중적 사상이나 의학적 사상에서 일맥상통하는 거다. 우리가 뜸을 뜰 때 쑥으로 뜨지 않나. 또 마늘은 항생물질로 인체에 살균효과가 많다. 그러니까 단군의 이야기에서 마늘과 쑥은 어느 면에서 보면 우리 의학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 등이 조선시대에 ‘동의’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동의보감>의 경우 우리 나라에는 없는 중국지역 약초를 수록하는 등 우리 고유의 의서는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 중국의 의학과는 서로 이웃에 있으면 영향을 주고받게 돼 있다.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중국 의학에서 긍정적인 것은 받아들이고, 우리 의학도 (중국으로) 들어가고 그런 면이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오기 때문이다.

많은 걸 참고했다. 중국 것뿐만 아니라 서역 것들도 아마 부분적으로 들어가 있을 거다.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보고, 특히 <동의보감>의 우수성은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약초를 많이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먼 지역에서 나오는 것을 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허준 선생 연구처럼 깊이 파고든 다른 분야는?

■ 다른 성과로는 이상좌의 계보를 찾아내면서, 이상좌의 4개 가계를 찾아냈다. 96년도에 쓴 글을 책으로 내기 위해 다시 검토하면서 이번에 이상좌의 아버지까지 찾아냈다.

이상좌와 이상좌의 아버지가 장록수의 종이었다. 이렇게 규명하면서 이자실이라는 화가가 이상좌의 아들이라는 걸 미술사학회에서 입증해냈다.

그리고 혜원 신윤복의 계보를 찾아냈다. ‘고령 신씨’ 가운데 족보에도 안 올라있는 사람이다. 고령 신씨 종친회에서도 나한테 고맙다고 하더라.

초등학교 때부터 <동아일보> <사상계> 탐독

▲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 준, 이상설, 이위종. [사진출처 -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고서화 분야도 많이 수집․연구했지만 근현대 독립운동사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인 것으로 안다.

■ 증조부님이 경기도 가평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감옥도 갖다오셨고, 할아버지도 불령선인으로 지목돼서 젊은 시절에 가평에서 살지 않고 고향을 떠나서 중국 만주지역으로 유랑하다 1930년대 후반에 강원도 철원으로 와서 사셨다.

증조부님 이전에 고조부님 때는 경기도 포천에 살았는데, 계속 십몇 대를 포천에서 살았다. 고조부님이 옥을 깨트려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시신을 못 찾았다. 그래서 황국협회에서 와서 도끼로 집을 다 찍어 넘겼다.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배경이고 독립협회와 대립했다. 그래서 가평으로 가서 가평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거다.

할아버지가 36년도에 국내 들어와 철원에서 아버지를 낳았고, 내 부모님이나 삼촌들은 그 당시 왜정 때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우리 집안 경우 증조부님이 독립운동 한다고 선산만 제외하고 다 팔았었다.

집안의 내력이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민족적인 상황이나 조상들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 이런데서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다. 또 할아버지로부터 광주 이씨 가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고 일찍이 고전에 대해서 눈뜨게 됐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천자문을 배웠다. 할아버지가 무릎에 앉혀놓고 4살, 5살부터 천자문을 가르쳤다. 그 당시 글자도 모르면서 달달달 외우는 거였다.(웃음)

일찍이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직장 따라 분가해 나왔지만 집안 분위기에 젖어있었고, 또 책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내 주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아일보>를 봤다. 그리고 <사상계>도 초등학교 5,6학년부터 단편적으로 봤다. <사상계> 마지막호도 내가 가지고 있다.

□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 근현대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고, 관련 자료도 모았나?

■ 역사자료를 하면서 제 집안이 그랬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독립운동가 자료를 찾아 수집했는데 특히 이준 열사와 우리 증조부님 대와 좀 연결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느끼고 그런 부분이 있다.

이준 열사가 상당히 일찍 돌아가셨고, 이준 열사가 북청에서 서울 가려면 포천 옛 금강산 길을 통과했다. 북청서 내려와 원산서 쭉 내려와서 우리집 앞을 꼭 지나갔다.

제 고향 이름이 팔야리다. 여덟배미라고 부르는데, 태조대왕이 거기서 8일간 잠을 잤다. 이방원이 함흥에서 자꾸 오라고 그랬다. 그때 가는 사람마다 죽이고, 죽이고 함흥차사란 말이 생겼잖나. 그래서 자기 아들이 어쩔지 모르니까 거기서 딱 멈춰서 8일밤을 자면서 상황을 봤던 거다.

그런데 팔야리가 둘로 나눠져 있다. 하나는 포천이고 하나는 남양주다. 태조대왕이 8일동안 머무른 곳이 남양주 팔야리가 아니라 포천 팔야리다. 거기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뒤로 진입로 하나, 남쪽으로 진입로 하나인 그런 지역이다. 그것이 금강산 가는 길이다.

□ 가문의 영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선생이 직접 이준 열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 팔야리 근처가 또 옛날의 효령대군 집단마을이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효령대군 자손들이 거기 많이 살았다. 나는 전주 이씨가 아니라 광주 이씨지만 이준 열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본명은 잊었고, 필명이 최인 선생인데, 최영 장군 후손이다. 동경대를 나왔는데 민족사학 단계에서는 안호상 박사와 가까워 이승만 박사 때는 붙잡혀 고문도 당하고 박정희 때도 여러 차례 붙잡혀갔던 것을 안호상 박사가 빼내 줬다.

최인 선생은 좌파는 좌판데 극좌는 아니고 유물사상을 좀 반대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이론을 내세우면서 했던 사람이다. 최인 선생 논리를 가만히 보면 민족주의적인 천손(天孫)사상을 처음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최인 선생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임승국이다.

지금 와서는 고구려사 하거나 발해사 하는 사람들은 천손사상이 일반사상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그걸 주장하고 평화통일 주장한 사람이 그 사람 하나였다. 평화통일을 자꾸 이야기하니까 잡아갔다.

그분을 잘 아는데, 그분의 책에 이준 열사의 할복 얘기가 나왔다. 또 그분을 내가 20살이 되기 전에 74년도에 알게 된다. 함경도 사람인데 “할복이 옳다”고 했다.

“할복자결이 아니더라도 자결설을 인정하고 있다”

▲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마련된 이준 열사 묘역. 네덜란드 헤이그의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서 1963년 이장해 모셨다. [사진출처 -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 이후 자료도 수집하고 연구해본 결과 이준 선생의 사인을 어떻게 보나?

■ 옛날 기록이 크게 나누면 두 가진데 할복 분사(憤死)인 자료가 있고, 병사(病死)인 자료가 있다. 그런데 일본이 공식 언급할 때, 출판물에는 전부 병사다.

그런데 일본 내부 외교관이 보고하는 자료들, 1920년대에 상해라든가 광동이나 이런 지역에 있던 일본 영사관의 영사들이 본국에 보고할 때 ‘헤이그에서 자결한 이준의 아들 이종승’이렇게 쓴다.

이준 아들 이용은 본명 이종승이고 또다른 이름이 이객우다. 호는 추산이다. 독립운동 기록에서 자료마다 조금 다르게 나온다.

이준이 헤이그 회의장에서 자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설이 이준 열사를 발견했을 때 피를 흘리고 있다고 했고, 이상설이 관여하고 있던 당시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들었던 권업회의 <권업신문>에는 두 번에 걸쳐서 ‘이준 열사가 피를 흘린 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상설은 한 번도 병사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또 이준 열사가 돌아가시자마자 일본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고하면서 전문에 ‘현지에서 자결설이 퍼지고 있다’, 그리고 ‘병사’라는 얘기도 같이 쓴다. 병사했고 현지에서 자결설 퍼지고 있고, 또 그 시기에 매장할 때 사망증명서에 사인이 안 들어 있다. 병사는 대체적으로 사인을 병사라고 쓰는데.

여러 면에서 봤을 때 두 가지 중 하나다. 일본에 의해서 독살됐을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는 다른 데서 자결했을 수 있다. 회의장 못 들어가게 했기 때문에 밖에서 자결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일본 군함이 네델란드 헤이그에 기항한다. 그래서 일부 독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일본 군함에서 내린 해군들에 의해 그렇게 되지 않았겠나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준기념사업회나 추모하는 사람들은 나도 포함돼 할복자결이 아니더라도 자결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로는 이준 열사가 헤이그를 갈 때 칼을 하나 가지고 갔다. 그것이 민영환이 자결했던 칼이다. 민영환하고 가까워서 민영환이 자결한 후에 이준 열사가 민영환의 집에 가서 그 칼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그것이 그 집안에서 나오는 얘기다.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일본 외교문건, 그리고 같은 시대에 국내 대다수는 자결설을 이야기했고,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7월 14일 돌아가시고 16일 이상설로부터 전보를 받는데 자결했다는 전보가 온 걸로 알고 있다. 그것은 예전에 <동아일보>에도 그 기사가 나온다.

□ 이준 열사의 사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내막과 연관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 이상설과 이준, 두 분은 아주 친한 동지적 관계였다. 아주 둘이서는 가까웠다. 거기에 또 한사람 넣자면 민영환이 또 가까웠다.

헤이그 밀사로 갈 때 이상설은 길림성 용정에 있었고 이준 열사가 부산을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다음에 이상설에게 전보를 보낸다. 전보를 보내기 전까지는 이준 열사가 블라디보스톡에 왔다는 것을 일본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준 열사가 집을 나와서 용정을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을 가려면 기차를 타고 북행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부산으로 남행을 했다. 부산으로 남행해서 부산에서 배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이상설에게 전보를 치고서 용정에서 들통나기 시작한다. 이상설 주변에서 일본에 보고를 한다. 이상설 주변에 일본의 밀정이 하나 숨어 있어서 들통나기 시작해서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톡에 와서 만날 때 ‘이준이라는 자가 와서 이상설을 만나는 것’을 일본이 안다.

그리고 이준이 블라디보스톡에 갔을 때 여비 없이 갔다. 현지 한인들이 여비를 모아서 준 걸 가지고 간다. 국내에서 떠날 때는 헤이그나 이런데 가서 쓸 선물을 사가지고 갔지만 풍족한 경비가 없었다.

이상설하고 만나서 러시아 수도 페테스부르크에 가서 이위종을 만난다. 이위종이 외국어에 능통했으니까, 거기서 가담을 한다.

이상설은 탁월한 사람이다. 수학이나 한문 지식이나 이런 면에서 탁월한 사람이고 당시의 대학자다. 이준은 법률가였다. 당시에 일본 동경법률전수학교 법률학부(와세다대)에서 1896년부터 유학하고 동경에 3,4년간 체류한다. 그때 동경에 망명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준 열사 아들 이용과 부인 이일정 여사가 이준 열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시고 오겠다고 서울에서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체류하는데, 헤이그가 그렇게 먼 길인 줄 모르고 갔다. 그러니까 보름동안 기차를 타고 가는 먼길이라는 걸 알고 경비도 없고 해서 1년 만인가에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상설의 권업회 주변에서 이일정 여사하고 이상설하고 불륜이 있는 것처럼 그 밀정들이 퍼트린다. 그래서 이일정 여사가 1년 만인가에 되돌아온다. 자꾸 그런 말이 도니까 부인이 거기서 못 버티고 국내로 들어온다.

이상설이 유학이고 당대의 학자다. 있을 수 없는 말을 자꾸 하니까 이준 부인이 못 버티고 그냥 국내로 와 버린다. 이용은 거기 남아서 독립운동으로 들어간다. 그런 일까지 있었다.

이준-이상설 이간질, ‘이준 열사 병사설’ 퍼트려

▲  1920-30년대 광목에 그려 실전에서 사용한 태극기(오른쪽), 혈흔이 선명하다. 왼쪽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목 위에 찍어 100부를 제작한 태극기.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이상설 주변에 일본 밀정이 있었고, 이준 열사 사후에 가족과도 이간질을 시켰다니 놀랍다. 이것과 이준 열사 병사설이 연관이 있나?

■ 그 사람들이 해방 후까지, 1970년대 80년대까지 이준 열사와 이상설 관계를 이간을 시킨다. 거기서 나온 얘기가 ‘이준 열사 병사설’이다. 그 사람들이 퍼트린 거다. 이건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이상설이 살아있을 때는 <권업신문>이나 그런데서 한 번도 이준의 사인에 대해서 병사설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이준 열사 병사설이 언제 등장하느냐. 해방 후에 특히 박정희 5.16쿠데타 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상설 자손들이 과거 일본의 지방지 기록까지 다 찾아온다. 그걸 찾아서 윤병석 교수한테 준거다. 윤병석 교수의 책에 자료들이 다 들어있다. 컴퓨터가 없고 색인이 안 돼 있던 시대에 도저히 검색할 수 없는 자료들까지 일본에서 찾아내서 가져다 준다.

일본에서 준 자료들이다. 자기네들이 부정적으로 홍보하고 선전했던 것을 모아다 준 거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느냐? 해방 후에 이용이 와 있었고, 유자후가 1947년에 『이준선생전』을 낸다. 이준 열사를 위주로 해서 활동한 걸로 쓰니까 이상설 쪽에서는 이준이 죽어야 이상설이 산다고 하면서 일본 자료들을 입수해서 퍼트리기 시작한다.

거기에 경주 이씨 가문이 개입해 들어간다. 그래서 이종찬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최근까지도, 10년전까지만 해도 이종찬이 퍼트린 게 이준 열사의 병사설이다.

그리고 한국에 이상설 자손이 없다. 혈손이 없다. 전부 월북한 것으로 안다. 남북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연석회의가 열릴 시기쯤 돼서 이준 열사 아들 이용이 5월초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은 46년에 월남해 와서 남쪽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암살위협이라든가 여러 문제가 생겨 48년도 5월쯤 다시 북으로 간다. 아마 그 시기에 이상설 혈손들도 다 북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경주 이씨’라면서 자손 행세하는 사람들은 이상설의 직계라기보다는 가까운 친인척의 후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설 100주년이 되면서 이준은 기념관도 못 세우고 자기네는 이번에 기념관을 세우면서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윤병석 교수가 이준 열사에 대해 쓴 책을 보면, 위암 장지연이 이준의 병사설을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위암 장지연의 (『위암문고』 중) 「이준전」을 보면 자정(自靖)으로 나온다. 자정은 자결이라는 거다. 그런 걸 왜곡한 거다.

그리고 『장지연전서』에 나오는 「이상설 일기초」가 있다. 이위종이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한 장 반 정도로 돼 있는데 검토해보면 그건 가짜다. 왜냐하면 필체도 다르고 날짜가 틀린다. 헐버트가 헤이그에 와서 만나지 않고 갔는데 구체적인 날짜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틀린다. 그걸 보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나중에 조작한 거다.

이위종이 갖고 있던 것을 장지연이 베꼈다면 장지연 필체라야 되고 날짜가 틀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건 가짜 기록이다. 가짜 기록까지 만들어서 그렇게 해왔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준 열사 자손도 남쪽에 없고 이상설의 자손도 남쪽에 없는 상태에서 병사설을 대량으로 유포시켜버린 거다.

이상설 지사는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라 했다. 그런데「이상설 일기초」가 어떻게 나올 수 있나. 일기초는 후대에 만든 거다. 단순하게 만들었다. 복잡하게 만들면 들통나는데, 그래도 틀린 부분이 있다.

□ 이상설 선생 100주기인데 재조명 한다면?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성립 2,3년 전에 권업회도 하면서 큰 조직을 하나 태동시키려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1919년 임시정부 이전부터 국가의 태동, 형상을 잡으려면 결국 이상설 선생에게 귀착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분이 러시아령에서 했다는 지역적 한계는 있지만 거창한 그 밑그림이 결과적으로 돌아가신지 2년 후에 상해임정으로 태동된 거다.

내 생각에는 1910년, 11년 이때 이일정 여사를 모해한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엄청나게 좌절했다. 독립운동에서 좌절을 겪으면서도 상당히 공헌도 많고 애도 많이 쓰고 혁혁한 분인데, 이준하고 이상설의 공을 따질 상황이 아닌데, 요즘 따진다.

그러면서 결국 이준 열사 사인 문제를 잡고 있고, 헤이그 특사 하나로만 조명하려고 한다. 헤이그 특사 하나만 가지고 조명할 사항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준 열사의 법률가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준 열사가 헤이그 갔거나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그 배후에는 최재형의 동의회가 있었다.

동의회 이사장이 이위종이다. 이위종이 이범진의 아들이다. 이범진과 이용익이 동의회를 시작하는데 나중에 창립은 이위종하고 최재형이 한다. 처음에 헤이그 특사를 이용익이 가려고 했는데 1907년에 죽는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6년도에 하려다가 일본의 공작으로 1년이 늦춰진 건데, 원래는 이범진과 이용익이 가려고 했다가 이용익이 죽는다. 그래서 대타로 가게 된 것이 이준하고 이상설이다. 또 이범진이 자기 아들을 보낸 거다.

이미 이용익하고 이범진이 다 살아있을 때 동의회를 구성하기로 그때 결심을 했다. 그래서 일단 만국평화회의에 평화적으로 호소하자 했고, 그 선상에서 간 거다. 사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 간 돈을 준 사람이 최재형이다. 갑부였으니까.

그런데 고종황제가 이준한테 돈을 안 줬다. 그 돈을 누구한테 줬는가 하면, 내 판단에는 헐버트에게 준 것 같다. 헐버트는 헤이그에 와서도 이준 열사를 만나지 않는다. 찾지를 않는다. 그리고 하룻저녁 자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무책임하게.

그래서 이준 열사가 돌아가신 후에 이상설하고 이위종이 헐버트를 찾아서 미국으로 간다. 그래서 헐버트한테 고종황제가 준 여비를 얼마를 받은 거 같다. 그래서 상당한 오랜 기간 둘이서 미주지역을 돌아 다니다 간다. 헐버트가 고종황제한테 받은 경비를 본인이 많이 썼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면 사실은 떼먹은 것 같다.

그리고 헐버트는 이용 장군이 한국에 있을 때 한 번도 안 들어온다. 이승만이 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한 후에나 들어온다. 헐버트가 좀 그런 면이 있다.

□ 헐버트가 한글운동에도 상당히 공이 많다고 한글공원에 기념상도 세워 놓았던데.

■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띄어쓰기를 처음한 사람은 헐버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그건 규명이 됐다. 이젠 헐버트 기념사업회에서 그 말을 못한다.

“이상설, 상해 임시정부가 토대 닦은 사람 가운데 하나”

▲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세워진 보제 이상설 선생 유허비. 선생의 유골이 뿌려졌던 수이푼 강(솔빈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올해 이상설 100주기인데, 예전에는 이준 선생 연관해서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떠돌아 다녔는데, 지금은 거의 정리된 걸로 봐도 되겠나?

■ 지금은 정리가 됐다기 보다는, 그쪽에서 이상설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렇게 극렬하게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은 기념관도 세우고 생가도 복원하고, 이준 열사는 생가가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내가 안국동에서 이준 열사가 살았던 위치를 거의 알고 있어 이야기했는데 그 장소가 맞다는 걸 규명해냈다. 안국동 몇 번지인지. 그래서 서울시에 이준 열사 옛집터 표석을 요구했다. 박원순 시장한테 요구한지 20일 된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에게 연락했다.

□ 이상설 선생 100주기인데, 어떤 분이셨고 지금 시점에서 재조명하는 의미는?

■ 이상설이라는 인물은 시기별로 몇 개로 나눠볼 수 있다. 젊었을 때 상황과 헤이그, 국내활동과 해외망명 활동으로 중점적으로 나눠볼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되기 이전부터 그 토대를 닦은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이상설과 연관성이 있거나 그 영향력 안에 있거나 한 사람들이 있었다.

또 주목할 만한 인물이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의정원장이 손정도 목사다. 여기 정동감리교회 4대 목사인데 감리교에서 북만주로 파송했다. 거기서 목사하면서 그 분이 길러낸 게 김성주(김일성)다. 김일성이 학창시절 만든 혁명가극이 ‘혈분만국회’가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가 됐다. 항일무투(무장투쟁) 시절에 만든 계몽연극을 확장한 것이다.

이준 열사에 대해 손정도 목사가 알려준 거다. 손종도 목사는 감리교 목사였고, 이준 열사는 감리교 초기신자다. 감리교 내에서 이일정 여사를 만난 거다. 1896년경에 일본 망명가기 직전에 감리교로 개종한 것 같다. 그때 이준 열사가 법관양성소 출신이고, 한말에 법관, 검사를 지내면서 상동교회에서 활동하고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투쟁을 했다. 『백범일지』에 기록이 나온다.

그 시기 손정도 목사가 북만에서 활동하고 이상설이 러시아 쪽에서 활동하면서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나 이런 사람들이 계속 오갔다. 하나의 유기적 연관성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결국 나중에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주도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물론 상해임시정부라는 것이 여러 군데 세력들이 모여서 한 것이지만.

그리고 이용 장군도 초기에는 이상설한테 가 있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1910년도 이후에 일본의 조선강점 이후에 이용 장군도 초기에 이상설 계열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이동녕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다 그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상설 하나에게만 모든 공을 돌릴 수 없지만,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상당히 선두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또 1930년대 이후까지 산 사람도 있지만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한다고 할 때 한 특정인물만 떼내서 그분이 최고라고 하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이회영씨 집안에서는 자꾸 이회영이 모든 걸 다 한 것처럼 이야기 한다. 이회영이라는 인물도 6형제가 다 상당히 탁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독립운동의 모든 걸 다 한 게 아니다.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이준 열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다른 사람 것 눈에 띄는 대로 다 수집한 것도 그 이유다.

□ 왜 이준 열사에 집중했나?

■ 상황을 보니까 이준 열사가 계속 왜곡돼 있다. 『이상설전』을 보면, 자손들이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해 한 사람을 폄하하는 것, 이건 안 된다.

이준 열사에 대해서 너무 왜곡되고 있다. 일본에서 일본사람들 몇 번 만나보면 ‘한국에도 할복자살하는 사람 있냐’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민영환이 할복했다. 할복은 무관이 죽는 방법이고 문관은 약을 먹는다든가 목을 맨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식 할복이 아니다. 활복이라기보다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복(刺腹)이다. 우리는 치명적인 부위를 찔러서 죽는 거다. 일본은 할복을 하면 옆에서 칼을 들고 옆에서 목을 내리친다. 그러니까 고통을 크게 못 느낀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을 많이 느끼는 죽음이다. 보통 독하지 않으면 그걸 못 한다.

일본 사람 관점에서는 조선인은 나약하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이 일본 극우의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문제는 할복이 일본의 자결 방법인데 왜 이준이 할복했느냐는 식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결하는 방법이 많은데 나철처럼 숨을 멈춰 가는 것, 매천 황현처럼 아편을 먹고, 다른 독을 먹기도 하고 그런 분들이 많다. 투신하는 경우도 있고 목을 매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무관은 찔러 죽는 거다.

그래서 내가 독립운동가 자료는 인물들을 떠나서 이준 열사 주위 동지들, 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에 들어오는 대로 모으는 거다. 그러니까 시대적 자료들까지 따지면 자료가 350점이 넘는다. 국회에서 전시할 때 150-160점 전시했고, 제주에서 전시할 때는 200점 가까이 전시했다.

고종, 정식 ‘헤이그 특사증’ 헐버트에게 줘

▲  고종황제의 헤이크 특사 위임장. 영문으로 번역돼 <The Independent> 1907년 8월호에 게됐다. 고종 대황제의 수결과 어황보제라는 옥새가 찍혀있다. [사진출처 -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 고종황제가 헤이그 밀사에게 준 특사증이 진본이 맞나?

■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증, 그걸 정말 제대로 된 걸 만들어주지 않았다. 서둘러 떠나서 민간에서 가짜로 만들었다. 그런데 헐버트에게는 정식 도장이 찍힌 특사증을 줬다. 나중에 특사증을 헐버트를 통해서 줬을 수도 있다.

헤이그 특사증을 궁에서 가지고 나왔다는 사람이 세 사람이다. 특사증은 하난데 왜 세 사람인가. 헐버트가 갖고 나왔다는 설, 박상궁이 갖고 나왔다는 설, 또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가 갖고 나왔다는 설이 있다. 이은석 여사는 말도 안 된다.

헐버트는 자기 것은 받아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이준 열사가 헤이그로 출발하는 날짜가 딱 정해져 있는데 출발할 때까지 특사증이 안 나온 거다. 그래서 만든 거다. 도장을 그렸지 않나. 고종이 돈도 안주고 특사증도 안주고, 고종이 우유부단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특사증이라고 나와 있는 것들은 도장을 그린 거다. 궁여지책으로 만들었는데, 그 도장을 누가 그렸느냐. 내가 보기엔 이회영이 그렸다. 문장도 민간에서 쓰고 그래서 바란스가 안 맞는다. 헐버트에게 준 것은 영문까지 번역해서 도장 딱 찍혔다. 한문도 있고.

그런데 특사증에 나와 있는 수결은 고종황제 수결이 맞는 것 같다. 이준 열사가 만들어 간 것은 도장은 그린 거고 글씨가 조잡하다. 백지에다 수결만 해서 내보내 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수결도 그것이 원본이 안 남아있으니까 수결도 그렸을 수가 있다.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 도착해서 한 번도 특사증을 꺼낸 사실이 없다. 이준 열사는 그것이 민간에서 만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상설하고 이위종이 뉴욕에 갔을 때 비로소 꺼내서 보여줬다. 그래서 미국에서 사진을 찍어서 미국 신문에 나온 거다.

그러니까 이위종 하고 이상설은 그게 민간에서 만든 것이란 걸 상상을 못했다. 이준은 알고 있었고. 이게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헐버트가 헤이그에 딱 나타나니까 즉시 헤이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일본 외교부에 보고한다.

일본 외교부에 보고한 것이 이등박문에게 전신이 온다. 그래서 이등박문이 이완용을 시켜서 고종황제를 몬다. “보낸 사실이 있는가?” 고종 황제가 한 번도 시인을 안 한다. 그래서 그걸 빌미로 삼아서 일본이 황제를 바꿔버려 1907년도에 순종이 즉위한다.

이준 열사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으면서 미스테리한 부분들, 몇 가지 이런 것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추적하면서 극영화를 만들면 상당히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 제대로 된 특사증이 나왔는가? 제대로 된 특사증이 나왔다면 왜 남아있지 않는가? 누가 빼돌렸는가?

특사증에는 정사 부사라는 말이 없다. 다 특사다. 후에 일본 사람들이 만들 때는 이상설이 정사 나머지가 부사라고 한다. 그건 일본사람들 기록에 일부가 나오고 절대 다른데서는 정사 부사가 없다. 단 3명이 가는데 정사 부사가 어디 있나.

그리고 이상설, 이위종, 이준 세 사람 외에 또 동행했던 사람 두 명이 더 있다. 여러 가지 편의상 그렇게 동행시켰던 것 같다. 이준 열사가 묻힌 후에 아마 1년 후인가 이준 열사 때문에 고종이 왕위에서 몰려났다고 그 묘소를 파헤치러 헤이그로 온 사람도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항시 행사를 할 때마다, <용진가> 3절에 이준 얘기가 나온다.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 군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 쳐보세.” 임정에서 선서를 하거나, 광복군에서 선서를 할 때 헤이그에서 배를 갈라 피를 뿌린 이준에 대해서 꼭 얘기가 나온다.

그 정신을, 그 계통을 해방 후에 일본은 죽이려고 든 거다. 그걸 가장 교묘하게 죽이기 위해서 이상설 자손들한테, 자손이라기 보다는 방계라고 볼 수 있는 혈족들한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문중 독립운동사’적 입장에서 왜곡해 버린 거다. 학자들 통해서 사인을 병사로 하고 그걸 정설로 만들어버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병사설 자료와 자결설 자료를 다 모아서 같이 책을 한번 내고 싶다.

이준 아들 이용, 북한 초대 도시경영상

▲ 지난해 이준 열사 전시회를 가진데 이어 올해에는 이준 열사 집터 표석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에 참석한 모습(맨 왼쪽).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작년에 이준 열사 전시회를 가졌는데, 올해는 특별한 계획이 없나?

■ 금년이 110주기니까 순회전 하고 싶은데, 그것이 제대로 안 된다. 1907년도 국채보상운동 초기에 이준 열사가 깊이 개입돼 있다. 1907년 헤이그 출발하기 이틀 전에 국채보상운동 상주지역인가 거기 지역에 편지를 쓴 것이 한 2년 전에 발견됐다. 또 이준 열사 부인이 여성국채보상운동기성회 비슷한 조직이 있는데 상당히 관여했다.

대구에서부터 국채보상운동이 불붙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관계했던 김광재라는 사람이 대한자강회 회원이다. 대한자강회는 이준 열사가 만들었던 헌정연구회의 후신이다. 헌정연구회를 일본이 해산시키니까 대한자강회로 이름을 바꾼 거다. 대한자강회 회원들이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바로 김광재, 서상돈이다.

금년이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이다. 그래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대구에 기념관이 있는데 제주에서 4월 15일부터 공동 전시회를 한달 가까이 하기로 했다. 그런데 탄핵 인용이 되고 대선 일정이 잡히면서 대구시에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자금을 지원하는데 대선 끝날 때까지 모든 행동을 중지하라고 내려왔다.

그리고 기념관이라든가 이런 게 서야 할 텐데 그게 안 된다. 기념사업회를 극우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안 된다.

일본에서 정신대 문제나 독도 문제 나오면 성명서 하나 발표 못하는 기념사업회가 수두룩하다. 거의 대부분이 성명서 하나 발표 못 한다. 광복회나 한두 번 얘기하는 정도고, 백범과 안중근 기념사업회 정도다.

안중근기념사업회도 두 개가 있다. 숭모회가 있고 기념사업회가 있는 것 같은데 한 군데는 거의 지리멸렬이다. 똑 같다. 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은 극우인데 박근혜 지지하는 사람들이니까.

이상설 이라는 인물을 전체적인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사로 본다면 상당히 탁월한 인물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기려야할 대표적인 사람을 꼽자면, 결코 여러 명에서 빠트릴 사람은 아니다. 일찍 돌아가시기는 했어도.

□ 이준열사기념사업회는 상당히 전통 깊은 단체인데.

■ 백범의 영향이다. 상해 임정에서는 항시 민영환, 이준에 대해서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1919년 4월에 상해 임정이 생겨, 그 시점에서 봤을 때 독립이나 순국과 관련된 인물로는 민영환이나 이준이 추려진다. 그 이후에 무장투쟁 세력이 주로 활동한다.

1946년도에 해방되자마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울에 와서 동대문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데 그때는 애국자 네 사람을 이야기한다. 민영환, 안중근, 이준, 윤봉길을 이야기한다.

해방후 만들어진 첫 번째 조직이 이준 열사를 추모하는 일성회(一醒會)라는 조직이다. 45년 7월에는 이준 열사 추모제를 못해서 해방후 첫 번째 추모제를 위한 조직이 만들어지는데 좌우가 다 모인다. ‘한 일’자 ‘각성할 성’자 이준의 호다. 북쪽 김일성과 최재형(최일성)이 한자가 다 다르다.

해방후 첫 번째 사회단체 일성회가 지금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된다. 사단법인도 제1호였다. 그런데 지금 엉망이 돼 버렸다. 2007년도 100주년 기념사업 때 회장한테 좌우가 다 모여서 기념사업해야 한다고 했고, 그 양반이 오케이 했는데, 내려오면서 극우가 장악하게 돼 버렸다.

지금 기념사업회 전재혁 회장이 옛날 중앙정보부 출신이고 그 전에는 황장엽 씨를 한국으로 데려온 이연길 씨다. 이연길 씨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북파부대 역할 모델이다. 이영길 씨 집안이 독립운동과 관계된 집안이다.

□ 이준 열사 아들 이용도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것으로 안다.

■ 1930년을 중심으로 해서 이용이 잡힌다. 연변 국자감가에서 일본 헌병에게 잡혀서 국내로 이송돼 들어온다. 그때 <동아일보>의 기사가 ‘고려공산당의 수괴 이용’으로 나온다. 당시 이용은 공산당이 아니었다.

이용이 재판받다 1936년인가 석방돼서 북청에 거주제한을 당한다. 그때 북청으로 찾아온 사람이 바로 김정일의 엄마 김정숙이다. 김정숙이 조국광복회의 북청지구에 왔을 때 비밀접촉한 것이 바로 이용이다. 이용이 1937년부터 해방 때까지 조국광복회 비밀활동을 한 것으로 북쪽에서는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그걸 주장을 안 한다.

1930년, 31년 이때 잡혀오면서 이용 장군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북만에서의 항일무투 세력이 궤멸되면서 등장하는 세력이 북한의 김일성 세력이다. 그러니까 북한 김일성 세력에서 초기 사람들은 이용의 세력이 많이 넘어갔다는 얘기다. 1930년대를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나눠진다.

이용 장군이 1945년 해방되자 뭘 했냐면 북청에서 초대 인민위원장을 지낸다. 그러다가 46년도 1월에 남쪽으로 월남을 해온다. 왜 그때 북청군인민위원장을 지냈냐면 1921년 흑하사변이라고, 자유시참변에도 이용이 관계된다. 러시아 말을 잘하고 러시아 쪽 관계가 있었다.

초기 북쪽에 진주해왔던 러시아 군인들이 좀 질이 낮아서 북청에서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이용이 초대 인민위원장을 한다. 북쪽의 『조선백과사전』에 의하면 1946년도에 이용을 김일성이 임무를 줘서 남파한 걸로 나온다. 성시백과 비슷하게.

이용이 남쪽에 신진당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48년도 연석회의가 열릴 때 북으로 가버린다. 가서 48년도 9월 9일 정권수립할 때 초대 도시경영상(장관)이 된다.

이준 열사, “사망하기 전에 1주일간 굶었다”

▲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은 이준 열사의 자결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문중 독립운동사’에 유감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종찬, 이재정 정도 되면 우리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는 분들인데.

■ 이재정이 이준 열사 100주기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는데, 보훈처장에게 압력을 가해 자기가 회장인 이상설기념사업회 쪽에 더 많은 예산을 가져가 버렸다. 이준이 죽어야 이상설이 산다고, 문중 독립운동사를 생각했던 거다.

이종찬은 공식적인 강연에서 이준이 단독(丹毒), 종기로 죽었다고 한 사람이다. (단독은) 간단히 페니실린 주사 한 번 맞으면 끝나는 거다. 약 처방으로 금방 끝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인터넷에 기가 막혀서 썼다. “이종찬은 대한제국의 국정원장이었는가?” 대한제국의 국정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걸 알았느냐는 거다.

이준 열사의 사인이 병사설도 여러 가지가 있다. 단독으로 죽었다. 심장마비로 죽었다. 사인을 다 달리 이야기한다. 병사설도 제각각 이야기한다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는 의미다. 심지어 최근에는 독살설까지도 일부에서 이야기한다.

병사라기보다는 이준이 7월 14일날 사망하기 전에 1주일간 굶었다. 단식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혈압이 상승하고, 그 상태는 칼이 들어가면 그냥 몸이 터진다. 그때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 1주일간 단식 상태에서 칼로 자결했다는 것인가?

■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러 상황을 보면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런데 죽은 후에 발견됐으니까.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이상설이 그 호텔에서 찾았으니까.

□ 자결하는 것과 피를 흘린 상태는 다르지 않나?

■ 이상설은 상징적으로 피를 흘린 거라고 표기했다. 그 대신 장지연의 「사행서일기초」라는 가짜기록에도 자정(自靖)이라고는 나왔는데, 자정이라는 표현 자체를 윤병서 씨가 모르더라.

그래서 한말에 현채가 만든 당시 교과서에까지 자결로 나온다. 일본인 교사가 학교에 공급하는 교과서는 그걸 빼고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는 그걸 넣고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더라. 내가 두 가지 다 구해가지고 있다.

□ 이상설 자료도 있나?

■ 이상설이 다 불태웠기 때문에 자료가 적다. 나한테 있는 것은 이상설이 문과급제한 것과 그 분 수학저서, 한말 산술에 대한 교과서 『산술 신서』다. 나머지도 찾아야 된다.

□ 진천군에서도 이상설 100주기 기념사업을 한다는데 자료요청은 없었나?

■ 없었다. 작년 국회에서 전시할 때는 (진천군 관계자가) 봤었다. 이준 열사 이름을 내걸었지만 인물과 자료들이 방대하니까.

태극기도 상해임정 태극기도 있고 광복군 태극기도 있다. 북한에서도 해방 직후에는 태극기를 사용했다. 우리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남한이 태극기를 국기로 삼으니까 북한에서 인공기를 새로 만든 거다. 태극기도 각 시대별로 나한테 많이 있다. 3.1운동 때 쓴 것도 있고.

‘이준 만국평화 기념관’을 국내에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다. 기념사업회와는 같이 못 하고 독자적으로 해야 한다. 묘소 관리권은 기념사업회에서 갖고 있어 제3의 장소에다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2019년이면 3.1운동도 100년, 상해임시정부는 100주년이니까 101년이 된다. 3.1절 관계된 것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성북에 만해집이 있고, 성북구청장이 전시할 때 왔다. 상당히 관심이 있더라.

□ 자료 구입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나?

■ 할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다. 자유롭게 훌훌 털고 다니고 싶은데 자료를 보면 자료에 매이는 거다.

□ 자료 보관은 어떻게 하나?

■ 서재에도 있고 습도, 온도 조절해서 보관한다. 손상되는 것들도 있고, 수리하는 것들도 있다.

□ 한가지 궁금한 것은 이유립 선생의 『환단고기』 위서 여부다. 우리 고대사의 사료를 어떻게 봐야 하나?

■ 이유립의 자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천재다. 조선왕조가 아무리 사대적이고 못마땅해도 세종대왕 때문에 한글이 있게 된 것 아니냐. 아무리 사대적으로 갔어도 조선왕조를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다.

다른 측면에서 청나라도 따지고 보면 북방민족의 한 갈래라고 보는 것도 곤란하다. 심양에 누루하치가 있던 고궁에 내가 90년대 처음 갔을 때 거기다 노상방뇨해 버렸다. 형제국은 둘째 치고 병자호란 때 조선민을 죽이고 수십만을 포로로 잡아간 사람이다. 심지어 이성계도 왕건도 중국에서 건국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나간 사람들이 그렇게 좀 있다.

민족사학의 테두리가 어느 정도 범위냐 정해놓아야 한다. 최진 선생은 뭐로 정했냐면 사상적인 것으로 정했다. 천손사상, 중물(重物)사상(물질이 중하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상)이다. 그리고 친 인본주의다. 사상적인 맥락에서 따져야지 영토적인 개념으로 따지면 큰 문제가 생긴다.

□ 북한에 있는 자료를 수집하거나 협조를 해봤나?

■ 그거는 없다. 북쪽에서 나온 역사책들은 일본에서도 많이 구했다.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 가면 친일파 그림들도 걸어놨다. 이쾌대가 숙청당했지만 작품은 그대로 다 있다. 절간을 많이 허물었어도 남아있는 절간도 있다. 전쟁 때 왕조실록을 실어간 사람들 아니냐. 그러니까 역사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사상과 제도를 떠나서 존재하는 거다.

□ 소장 자료 중 유일본이나 가장 귀한 것은?

■ 이것이 미수 허목 친필 원본이다. 집에 가면 많다. 삼국지는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병자자본 1567년에 나온 것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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