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DAUM영화]

헐레벌떡 의사가 도착했을 때 바닥에 뉘어진 한 젊은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옷이 벗겨진 상태인 젊은이의 몸에도 바닥에도 물이 흥건하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장소, 무엇을 하는 곳인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건물, 그리고 욕조가 딸린, 방의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구조의 실내. 갑작스레 불려온 의사는 이미 숨이 끊어진 환자의 상태보다도 자신이 불려온 의문의 장소와 자신을 둘러싼 험악한 공기에 더 숨이 막혔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는 공포가 어찌 그의 뇌리를 스치지 않았겠는가. 그때는 그러고도 남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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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작부터 단숨에 박종철 고문치사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그리고 사건은 일사천리로 숨차게 전개된다. 2시간 10분의 상영 시간이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겨를 없이 한 시대가 관객의 눈앞에 휘몰아친다. 영화는 사건으로 꽉 차 있다.

그 사건은 박종철의 고문치사로부터 시작하여 이한열의 죽음으로 절정을 이룬다. 두 젊은이의 죽음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1987년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역사의 해일이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시대적 고증에 철저한 자세를 견지한다. 마치 당대의 재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커다란 결례를 저지르는 것같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아무리 시대물이라 할지라도 다큐멘터리가 아닌 한 감독이 덧붙이는 허구적 이야기는 감독의 영역이자 권한일 수 있을 터인데, 영화 <1987>은 그 모든 것이 사족이 될까봐 극도로 경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영화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는 아마 감독이 그 시대에 표하는 예의이자 경외감의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대개 사소한 것이라도 그 내용이나 접근 방식을 두고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기 쉬운데, <1987>은 그 점에서 흠잡을 거리가 하나 없다. 단언컨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1987년이라는 시대의 무게를 생각할 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이 시대를 처음 스크린에 불러낸 감독으로서는 이런 태도가 응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감을 느낀다. ‘사실’은 모든 해석과 판단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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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얘기하면 영화가 너무 건조하거나 담백하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1987년은 어떤 허구를 더하지 않고도 이미 너무 많은 사건들로 차고 넘친다. 우리가 그 시대 한가운데 있을 때 신문은 매일 새로운 기사들을 실어 날랐고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져 이 시대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향신료나 조미료 없이도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과 분노와 열기와 설렘으로 한 시대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으며, 어떤 소설이나 연극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들이 시대의 내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승객을 가득 태워 입석까지 들어찬 기차가 달려가듯이 영화는 헉헉거리며 숨 돌릴 새 없이 직진하기 바쁘다. 감독이 무언가 이야깃거리를 덧붙이지 않고도 이미 시대 자체가 극적인 반전과 얽히고설킨 사건들의 열기로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있기 때문에 관객은 그 흐름을 쫓아가기 바쁘다. 이것이 영화의 두 번째 특징이다.

고문 중에 질식사한 박종철과 시위 도중 최류탄 직격탄에 머리를 맞은 이한열의 죽음은 그 시대의 야만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두 죽음이 얼마만한 파장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유신 시대는 어떠했으며 80년 쿠데타 이후는 또 어떠했던가. 억울한 죽음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마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 내부의 엇박자와 실수가 있었고, 진실을 알리기 위한 목숨 건 노력들이 있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처럼 어떤 진실들은 수면에 떠오른 순간 거대한 역사의 불길을 당기는 방아쇠가 된다. 김주열의 죽음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듯이, 미완의 혁명 4.19 이후의 억압과 질곡의 역사는 1987년 임계점에 이르러 박종철과 이한열의 야만적인 죽음이라는 도화선을 타고 전국적 항쟁의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모든 필연은 우연의 틈새를 뚫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87년의 일들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통제와 억압으로 감춰 왔던 정권의 민낯은 언젠가는 드러날 필연이었고, 침묵과 공포에 짓눌린 것처럼 보였던 민주화의 열망 또한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정권의 야만성이 다시 한 번 만방에 폭로되어 분노의 도화선이 되고 또 다른 젊은이의 희생이 불에 기름을 붓듯 시민적 저항이 끓어오르는 기폭제가 된 순간, 모든 우연은 필연으로 점화되었다. 그것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영화의 세 번째 특징이다.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의 이름을 호명한다. 그 중에서 주역에 해당하는 인물만도 여럿인데,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실존 인물들이다. 그들은 실명으로 영화 속에 호출되어 1987년 역사의 퍼즐을 맞춰나간다. 영화는 말한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었다고.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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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저게 사실이야?”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수천 명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의 집권 과정 자체가 상상과 상식을 초월한 것이니, 말해 무엇 하랴. 저게 실화였다.

요즘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하지만, 그 시대도 지옥이었다. 요즘 청년들은 진학이나 취업의 기회를 얻지 못해 고민하지만, 그 시대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 폭음해야 했다. 스물세 살 작은아들이 내 눈에는 어리게만 보이는데, 고문 끝에 죽은 박종철은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그 시대 우리는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겨우 스무 살 초입에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저런 촘촘한 시대적 복원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불과 수십 년 전 일인데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감독이 1987년을 영상으로 기록하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의 하나도 기록은 기억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영화의 네 번째 특징이다. 

영화가 기억을 복원시키자 나는 울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은 1987년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가 지켜지지 않았던 시절의 참혹함과, 그 끔찍한 시절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 위에서 이루어졌던가 하는 데 대한 목메는 숙연함이었다.

역사를 잊은 자는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역사의 한 걸음을 내딛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잃기는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가져다 준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그 위에 세워진 87년 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위태로운 것인지 지난 10년 간의 퇴행과 반동(反動)이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무덤 속에 들어간 줄 알았던 유신의 유물들이 부활하여 천지를 활보하고, 사회 구석구석 쌓인 적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깊이 뿌리를 내렸다. 심지어 1+1 대통령을 모셔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 보니, 1987년 그 해로부터 딱 30년이 흘렀다.

이한열이 쓰러지는 장면은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과 겹치고 박종철의 부검과 사인에 대한 거짓 발표는 백남기 농민의 사인에 대한 서울대 병원의 발표를 연상시킨다. 2017년이 1987년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아주 멀리 걸어 온 줄 알았던 2017년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1987년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그 시대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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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볼 때 엔딩 크레딧 끝날 때까지 꼭 보라고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죽은 열사들의 이름을 피토하듯 외쳐 부르는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를 꼭 듣기 바란다. 그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거는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교훈을 얻고,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특정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극적 긴장이 고조되는 묘미는 없지만, 영화를 꽉 채우고 있는 이야기 못지않게 쟁쟁한 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한꺼번에 보는 행운은 영화의 또 다른 재미이다. 누구나 꼭 한 번 보아야 할 영화, 이 영화 적극 지지 강추한다.
 
예고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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