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방중 기간의 홀대로 중국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비등하다. 물론, 오해나 의도적 깎아내리기도 없지 않지만 국빈방문에 걸맞는 예우를 충분히 받았다고 보기에는 미흡함이 남는다. 사드(THAAD) 문제라는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해 보더라도 중국의 태도는 흔쾌하지 않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문대통령의 공식행사에 동행한 한국 기자들에 대한 폭행이다. 동행 취재를 하던 청와대 사진기자들을 중국경호원들이 집단 폭행한 것이다. 홀대의 문제를 넘어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기자들의 과도한 취재문화를 탓하기도 한다. 또한 낯설은 중국식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한국 언론들의 몰이해를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나 백 번 숙고해 보아도 용납할 수 없는 참사다.

문제는 그저 현상에만 반응하는 우리 언론이나 정치권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 쪽에선 굴욕외교라는 감정을 내세워 헐뜯기에 급급하고 또 한 편에서는 실리외교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사태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그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고 현상에만 대증적(對症的)으로 반응하는 한, 중국의 변화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어제와 오늘이 그랬듯이 내일도 마찬가지다. 사드 문제가 해결되면 중국이 바뀔 것인가? 다음 번 정상회담 때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고 해서 그들의 진심이 바뀌었다 할 것인가? 아니다. 그저 시류에 따라 판단하는 현상만이 변해 갈 것이다.

중국의 성어(成語)에 ‘강산이개 본성난이(江山易改 本性難移)’라는 말이 있다. 강산을 바꾸기는 쉬워도 인간의 본성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우리 속담에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나 ‘개꼬리 삼년 묻어도 황모 되지 않는다’는 뜻과도 흡사하다. 중국의 남북한관은 이러한 속어에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중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중국의 종속국이라는 역사적인 관점과 한국인은 가볍게 대해도 된다는 문화적 가치가 그것일 듯하다. 시주석이 트럼프에게 내뱉었다는 ‘역사적으로 남북한은 중국의 일부다’라는 정치적 수사(修辭)에 이러한 정서가 모두 담겨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어제 오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긴 세월 굳어온 화이의식(華夷意識)의 표출로서, 지금도 중국이 우리를 대하는 변함없는 본질이다.

중국의 화이분별(華夷分別) 의식은 주나라 무왕 시절 처음으로 등장한다. 춘추시대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나라의 임금을 높이고 四夷의 국가를 물리친다)의 가치로 이어졌고, 공맹의 시대에는 오직 덕성(德性)을 품은 중국[夏]만이 오랑캐[夷]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상으로 드러났다. 이어 한나라 때에는 기미론(羈縻論, 한나라 초기 화친론과 정벌론을 절충한 화이분별 의식)이라는 당근과 채찍의 가치로 재편되었고, 이 기미론은 당나라 때에 재등장했다.

당나라는 이민족을 회유하고 간접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미론을 동원했으며, 오늘날 중국의 국내외 정책의 기본전략도 기미론적 방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 주석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과정에서 수없이 외쳐대는 중국몽(中國夢) 역시 중화적 세계화를 꿈꾸는 기미론의 연장선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중국의 화이분별론을 긴 세월 가장 충실히 학습‧실천한 집단이 우리라는 점이다. 오죽하면 자칭 소중화 아닌가. 958년(고려 광종 9년) 첫 과거제도의 시행 이후 1894년(조선 고종 31년) 마지막 과거시험까지, 근 천년을 유교적 질서(유교경전) 속에 우리의 모든 것을 던졌다. 더욱이 고려말 정몽주가 성리학적 기반 위에 ‘주자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친다(尊朱子攘夷狄)’는 가치를 확고히 한 후, 조선건국의 정신적 설계자인 정도전이 동주조선(東周朝鮮)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후 조선의 주자를 자처하던 송시열이 존주대의(尊周大義)의 기치를 내걸고 주자가 주인이 되는 주자의 조선을 충실히 실천했다. 그에게 두려운 것은 조선의 임금이나 백성이 아닌 오직 주자였을 뿐이다. 더욱이 변화를 위해 외쳐진 모든 몸부림도 중화의 그늘 속에서 허우적댄 공허한 구호였다. 실학자 박지원이 제기한 ‘법고창신(法古創新)’(『연암집』제1권 「초정집서」)이나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 외쳐진 ‘위정척사(衛正斥邪)’ 그리고 온건개화파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드러나는 ‘법고’‧‘위정’‧‘동도’ 등이 모두 중화의 정신적 근간인 유교적 가치를 지키자는 의미라는 점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화의 탈을 쓴 조선은, 한마디로 통치이념에서부터 문화적 유희까지, 오직 유교의 유교에 의한 유교를 위한 나라였다. 그들의 정신적 고향은 중화에 있었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중화적 준칙에 의해 통제되었다. 중화의 아바타로 처세하면서 모든 사유 활동 역시 그 얼개에 걸리지 않음이 없었다.

노영민 주중대사가 신임장 제정 당시 방명록에 적은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는 문구가 문제가 되었다. 선조의 소중화적 가치를 담은 글귀라는 것이다. 지나가듯 내뱉는 우리의 언어적 수사(修辭)에서도 유교적 동문의식(同文意識)에 함몰된 중화적 얼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 대통령이 베이징대 연설에서 인용한 ‘인생락재상지심(人生樂在相知心, 서로를 알아주는 게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시의 한 구절도 찝찝하긴 마찬가지다. 이 시는 왕안석(王安石)의 「명비곡(明妃曲)」 가운데 한 구절이다. 흉노왕(匈奴王) 호한사(呼韓邪)에게 볼모처럼 시집 간 왕소군의 한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인용한 구절의 바로 앞부분 ‘한은자천호은심(漢恩自淺胡恩深, 한나라 은혜 얕고 오랑캐 은혜 깊으니)’을 떠올린다면, 이 시 역시 중화적 그늘을 지우기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우리를 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천년 이상을 지탱해 온 화하의 질서(君臣‧主從‧上下關係) 의식이 어디 한 순간에 무너지겠는가. 중국 지도자들이나 청와대 기자들에게 몰매를 선사한 중국경호원들의 심사에도 혹여 이러한 중화의식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괴감만이 앞설 뿐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한 사건을 떠올려보자. 명나라의 경략찬획(經略贊畫, 작전참모)으로 조선에 온 정응태(丁應泰)의 만행과 관련한 내용이다. 정응태의 직급은 정6품 병부주사(兵部主事)였다. 우리의 임금(선조)과 신료들을 닭 보듯 했던 정응태는 그의 요구에 의해 남행을 떠났다. 그는 충주에 도착하여, 지공(支供)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충정감사의 종사관(從事官)인 송영구(宋英耉)의 볼기를 쳤다. 또한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러 그의 횡포에 못이긴 인부(人夫)들이 도망을 치자, 화를 내며 연기현감(燕岐縣監) 이문빈(李文薲)과 문경현감 홍함(洪涵)을 불러 자신의 가마를 메게 하고 갔다. 중국(인)이 우리를 대하는 단적인 일화다. 당시 조폭 앞잡이처럼 행세한 정응태의 뒷배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천조(天朝, 명나라)에서 파견된 천사(天使, 사신)였기에 가능한 행태였다. 시대를 넘어, 정응태의 후예들이 천조를 방문한 하인배들에게 맴매한 것이 무어 그리 놀랄 일인가? 적어도 중국(인)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인식을 바꾸어 놓을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쉽지 않은 고민이다. 천년 이상을 화석처럼 굳어 온 중화의 굴레를 벗는 일 아닌가. 나라 걱정으로 잠 못 자는 듯이 행세하는 정치인들이나, 합리적 학문으로 진리추구에 여념이 없는 듯한 학자님들, 그리고 지식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현학가‧호사가들 중, 누구 하나 이 본질을 붙잡고 고민하는 이 있을까? 복잡하고 착잡하다. 그러기에 더욱 답답하다.

『표해록(漂海錄)』(1488년)에 담긴 내용이 떠오른다. 조선 성종 때 최부(崔溥, 1454~1504)가 쓴 이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수당(隋唐)을 물리칠 수 있었던 중국 관료들의 고구려에 대한 흠모가 그것이다. 즉 중국 관료가 “고구려가 무슨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자, 최부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했다. 그런 까닭으로 오히려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라며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피력하고 있다.

임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의 지휘관들이 조선의 신료들을 꾸짖는 언사 중에 “지금이 수당시대로 알면 오산이다”라는 표현이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군사 강국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쇠약해졌느냐?”고 의문을 표시하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왜란이나 호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이 고구려 후예로서의 조선의 기개를 무시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변해야 중국이 바뀐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두려워한 중국(인)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가치지향도 어렴풋 잡히지 않을까? 망각해버린 고구려의 천손의식과 상무적 기상에 대한 미련이 새삼 와 닿는다. 그러나 고구려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유전자 속에 숨어있는 그 정신에 대한 각성을 외연화해 보자는 것이다. 억눌려온 역사인식의 제고가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과거가 아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와 고구려를 끊어놓으려는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에 있어 고구려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선택 역시 그러한 역사의식의 고양과 맞물린다. 신채호나 박은식이 천년 동안 중화의 노예로 살았음을 탄식하면서도, 그 해결의 열쇠로 제시한 것이 탈중화적 역사정립임을 상기해 볼 때다.

문 대통령의 이번 방중에 대해 굴욕외교가 아닌 감성외교라는 칭찬이 있다. 더불어 사드로 불거진 갈등을 봉합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평가도 한다. 그럼에도 상쾌한 감정이 치솟지 않음은 무엇인가.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밥그릇 갈등이라 하기엔 설득력이 없다. 중국과의 단순한 이해충돌 문제는 더더욱 아닐 듯하다. 망각의 역사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똑똑한 인간들 중, 박은식이 질타한 다음의 절규에서 자유로울 자, 과연 누군인지….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 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이 조선일 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다.…(중략)…어릴 때에 벌써 머리 속에 노예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모두 노예의 학문이고 평생 사상이 모두 노예사상이다. 이와 같이 비열한 사회에 처하여 소위 영웅자(英雄者)가 누구이며, 소위 유현자(儒賢者)가 누구이며, 소위 충신자(忠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공신자(功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명류자(名流者)가 누구인가? 필경 노예의 지위일 뿐이다.”(박은식 『몽배금태조』 일부)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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