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을 버린 집단은 미래가 없다

 

음력 10월은 ‘상달’이다. 예로부터 1년 중 가장 신성한 달로 여겨 이처럼 칭했다. 이 때가 되면 천신(薦新)을 통해 사직(社稷)이나 조상에게 감사를 표하고 제천봉행으로 경천보본(敬天報本)의 예를 지극히 하였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상달제[十月祭] 등이 모두 시월에 있었다. 고려의 팔관재(八關齋)도 시월 망일(望日)에 행했다. 아직도 시월이면 민간에서 간헐적으로 행하는 마을의 동제(洞祭)나 집안의 가신제(家神祭) 역시 이 같은 유습의 잔영이다.

개천절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의 계승이다. 조선 숙종조 북애자의 『규원사화』에는 우리의 이러한 제천의 전통을 ‘오랜 세월 이어온 우리의 국가제전[東方萬世之國典]’으로 단정하고 있다. “태백산(백두산-인용자 주)은 신시씨가 오르내린 신령한 땅이며, 단군이 임금 자리를 계승하고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제사 또한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 이것은 오랜 세월 이어온 우리의 국가제전이 되었다. 때문에 옛 임금들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 그리고 단군삼신을 공경하여 섬기는 것으로 도를 삼았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따라서 개천절은 누가 만들거나 언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배태기(胚胎期)로부터 구원한 민속적 사실로 자연히 성립되고 발달해 나온 것이다.

국가가 시행하던 단군관련 제례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민간의 신앙에 대해 전하는 문헌에서는 10월 3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가 적시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염백의 신교(神敎) 교단도 10월 3일과 3월 15일을 단군의 탄생일과 선거일(仙去日)로 정하여 제례를 개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점 역시 단군관련 민간신앙 속에 10월 3일에 대한 전승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근대 개천절의 등장은 전래 단군신앙의 부활과 연결된다. 구한말 대종교 중광(重光)의 근거가 되는 「단군교포명서」(1904년)의 서두에 10월 3일을 ‘개극입도지경절(開極立道之慶節)’이라고 밝힌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대종교를 일으킨 홍암 나철이 이것을 계승하여 1909년 음 10월 3일 처음으로 개극절(開極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910년 9월 27일 의식규례를 제정발포하면서 ‘개천절은 강세일(降世日)과 개국일(開國日)이 동시 10월 3일이라 경일(慶日)을 합칭(合稱)함’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개천절의 명칭을 분명하게 했다.

개천절은 배달민족이라면 누구나 즐겁고 기뻐해야 할 날이다. 그래서 상달 상날 아닌가.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천명(天命)에 의해 최초의 인간공동체인 신시를 열고 첫 국가 조선을 건설한 사건을 권위적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천자신손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제천숭조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개천절은 ‘하늘이 열려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를 기념하는 날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하늘이 열린 날을 기념하는 나라도 드물 듯하다. 개국절이 아닌 개천절을 만든 우리 민족이 그 주인공이다. 나라 세움을 기리는 날을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분명 범상스럽지 않다. 건국이나 개국이란 말 대신에 '개천', 즉 하늘을 열었다는 뜻의 말을 쓴 것은 우리 조상의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웅변해 주고도 남는다. 따라서 개천절은 우리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예로부터 그 집단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 천제(天祭)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늘과 직접 교감하는 인간(혹은 집단)이 바로 천하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전통국가에서 제천권(祭天權)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주권을 잃어버림과 상통하는 의미였다. 중국이 조선을 제후국가로 한정시키면서 제천의례의 정당성 문제가 부각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까닭에 조선시대의 제천은 거의 중단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시기 제천의례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 도교적인 의례들이다. 고종 때인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의 황제등극의례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단인 원구단이 건축되고, 그 원구단에서 등극의례가 거행되었다. 고종황제가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황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원구단을 짓고 제천의례를 올린 것은, 세조 3년 이후 440년만의 일이었다.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는 사대주의를 물리치고 우리가 바로 하늘의 자손이며, 진정한 독립국의 백성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나철이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단군신앙 부활의 정당성으로 가장 먼저 행한 것도 제천이다. 제천을 통해 단절된 팔관의 도맥을 복원하고자 했다. 제천을 통해 과거 중화주의적 종속을 벗어나고자 했으며, 제천을 통해 기울어진 국권을 다시 세우려한 것이다. 따라서 일제하 개천절은 대종교로 국한되는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서 범민족적 기념일로 인식되었다. 망명동포들이 거주하는 곳이면 때마다 기념행사를 거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1912년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서 봉행된 개천절 축제가 그 대표적 사례다. 당시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자 독립운동지도자였던 나철, 현천묵, 백순 등이 주도한 이 행사에는 북간도 교민 1천여 명이 운집하였다. 이 개천축제의 봉행을 통해, 제천보본은 물론 독립운동의 에너지를 충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상해에서 발족한 첫해(1919)부터 국무원 주최로 음력 10월 3일에 「대황조성탄 및 건국기원절 축하식」을 거행하였으며, 중경(重慶) 등지의 임시정부까지도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행사를 봉행하였다.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을 자처한 임시정부가 10월 3일을 대황조성탄절이자 건국기원절로 정하여 공식적인 정부차원의 축하식을 거행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안창호와 이동휘도 「개천절송축사」와 「개천절축사」를 통하여 단군설교(檀君設敎)의 민족적 의미를 예찬하였다. 당시 개천절이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민족단합의 중요한 상징이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개천절 등장은 일제의 문화정책을 근본적으로 후퇴시키는 저항이기도 했다. 일본 황국주의자들에 의해 날조된 일본 역사의 기원에 대한 근본적 부정임과 아울러, 일제가 말살하려던 전래 신교(神敎)의 제전(祭典)을 공식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일본의 건국신화를 절대적인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킨 인물들은 19세기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다. 기원전 660년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야마도국을 정복하고 일본국을 세웠다는 『일본서기』의 건국신화를 근거로, 그 날짜를 2월 11일로 삼아 기원절(紀元節)을 제정한 것이다. 그들은 기원전 660년 음력 정월 초하루를 약력으로 환산하여 2월 11일을 기원절(紀元節)이라는 이름의 개국기념일로 공식화시켰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개국한 신라(기원전 57년 건국), 고구려(기원전 37년 건국), 백제(기원전 18년 건국)보다 그 개국연도가 500여년 앞선 선진국이기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와 한국과 만주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주장도 이러한 날조된 근거에서 찾고자 했다.

일제의 기원절을 넘어서는 우리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의 중요한 감시 대상이었다. 당시 항일운동의 중추였던 대종교가 주도하는 행사였으며, 민족적 정체성 확인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동력이 바로 개천절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동원‧수탈정책과 민족말살정책 등이 심화되던 만주사변 이후에는 국내에서의 개천절 행사 개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관련 보도가 일제의 핍박에 의해 언론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음이 대표적 방증이다.

한편 개천절은 이러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넘어 다가올 민족의 단합과 통일에도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찍이 안재홍은 “국가적 의미에서 개천절이요 민족문화적 의미에서 한글날이니, 한글날은 국경절 아닌 국경절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국조이신 단군의 성적을 옹호하고 유지하는 사업은 문득 민족정기를 똑바로 세워 독립과 자유와 통일 단합을 재촉하는 기본조건의 하나로 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우리 민족이 단군의 개천 건국 이래 동방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다는 조소앙의 주장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정인보 역시 시월(十月) 개천절의 철학적 의미를 단군이 하늘의 부탁을 받아 홍익인간의 뜻을 이 땅에 새긴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천자신손(天子神孫)으로서의 자부심과 문화민족으로서의 유구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국경일 가운데 개천절만큼 뜻 깊은 날도 찾기 힘들다. 우리의 역사성과 철학성 그리고 문화성을 융회할 수 있는 기념일이 개천절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로부터 만주벌의 독립군, 그리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독립의 당위와 명분을 개천절에서 찾은 이유를 상기해 보자. ‘우리는 한민족 단군의 자손’이라는 상투적 구호 이전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시(通時)할 수 있는 정체성의 상징이 개천절 아닌가.

얼마전 문대통령이 부산영화제에 참석한 것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개천절 행사에는 불참한 지 며칠 후다. 개천절 외면이 역대 대통령의 전통이나 되는 듯 문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대통령도 정치인이다. 정치인은 민심과 여론으로 부침하는 생물체다, 그러나 대통령은 시류(時流) 이전에 국가집단의 정체성을 유전자로 승계하고 이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지도자의 역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정치는 순간의 환호라는 허상을 넘어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다.

개천절을 외면하는 지도자, 개천절을 망각한 국민, 이것은 역사의 배신이며 문화의 파괴다. 모두 상기하며 환호해야 할 ‘상달 상날’이, 모두의 망각 속에 소일하는 날로 전락한 이 이율배반에 대해,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정체성을 망각한 집단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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