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4일 제1차 민중총궐기에서 살수차(살수차는 목마른 대지와 작물을 적시는 스프링쿨러가 아니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대포이다)의 공격에 의해 쓰러진 백남기 농민은 2016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사망 1주기가 지나면서 사망사건을 둘러싸고 국정감사장은 여전히 뜨거웠다. 올 들어 설치된 경찰개혁위원회는 백남기 농민의 사망사건을 1호 사건으로 비중있게 다루었다. 이어서 위원회는 시위진압과 물대포 사용에 대한 인권친화적인 지침을 내놓았다.

이 지침에 따라 시위대응이 이루어진다면 평화적인 항의시위자가 사망하는 사고는 앞으로 발생하지 않을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권고의견을 따르는 것만으로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다.

농민은 여름농사를 마치면 가을추수는 아스팔트에서 거둔다고 한다. 이 쌀값 투쟁을 ‘아스팔트 농사’라고 부른다. 지난 3-40년 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은 정부정책에 의해 체계적으로 왜소화되었다. 그들은 전망 없는 산업에 종사하는 사멸해야할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현재 농민의 빈곤과 권한박탈은 그러한 정부정책의 결과물이었다. FTA 이전에도 녹두장군 말달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른바 살농정책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특정한 산업 종사자를 그림자집단으로 파악하는 정책과 사상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다면 농민과 소외된 사람들의 정치적 권한박탈과 타살은 지속될 것이다.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그 진보적 대안으로서 연대에 입각한 경제와 참여적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구축하기를 기대한다.

아직 그 전망을 찾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은 지난 10여년의 악몽을 끝낸 것만으로도 안도하며 신정부의 미래를 주목하고 있다. 어쨌든 새로운 정치가 낡은 정치를 타파하며 기층의 삶에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다시 정치적 절망감에 찌들 것이다.

물대포의 투입에 의한 백남기 농민의 사망은 피상적으로는 ‘경찰의 범죄’이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적 사회정책이 바로 범죄이기 때문에 이를 국가의 범죄나 정치의 범죄라고 해야 맞다.

그러한 범죄를 경찰의 범죄로 규탄하는 행위는 정치권의 기만술이다. 지속교육, 신용배정, 기술지원, 역량강화 등에서 보통사람들을 배제하고 전망 없는 삶 속에서 자멸하도록 방치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언어로 특정한 부류에게만 기회와 재원을 몰아주는 정책이 바로 재앙의 씨앗이었다.

정치는 격차와 벽을 허무는 행위기술이고, 격차를 해소할 때에만 정치의 본령에 이른다. 경찰개혁위원회의 지침은 평화적인 집회시위권을 보장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 내용은 지당하다. 그러나 기성질서가 농민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농민을 사멸할 집단으로 전제할 때, 보통사람들이 도통 정치에서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할 때, 평화적 시위의 보장은 어디에다 쓸 것인가? 약자들의 시위는 청원의 백일장이 아니라 생사를 건 투쟁이다.

이전 정부처럼 생존과 평화를 외치는 민중에게 폭력을 난사하고 폭도나 도시게릴라로 매도한다면, 현재의 개헌논의 과정처럼 민중이 개헌의 주도자임을 망각한다면 민중배제는 또 다시 고착화된다.

수많은 개혁의 징검다리를 건설해야 하는 정치의 계절에 특별히 하자 없는 헌법을 탓하며 국민의 관심을 개헌문제에 집중시키는 정치권과 정치계급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없지 않다. 정치적 비난을 피하려면 개헌논의 이외에도 다양한 제도적 수준에서 개혁의 발판을 지금 당장 구축해야 한다.

용산, 쌍용차, 강정, 밀양, 민중총궐기, 사드사태에 출현한 항의자들의 목표는 집회시위권의 보장이 아니었다. 백남기 농민이 총궐기집회에 참석한 목적도 집회시위권의 보장이 아니었다. 백남기 농민의 목표는 경찰청장이 보장해줄 수 없는 것이다. 정부나 국회가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을 개정함으로써 그 목표의 실현을 보장해줄 수도 없다.

백남기 농민과 민중의 요구는 소외된 사람들을 시혜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파악하는 정치이다. 인권친화적인 시위대응지침을 만든다고 해서, 경찰지휘계통의 주요인물에게 사태의 책임을 지운다고 해서 정치는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100년도 넘은 방식이고 합리적 보수파들도 일상적으로 행하는 기술이다. 민중이 요구하는 것은 경찰에게 장비사용의 인간화가 아니라 정치권과 대표자들에게 국가정책의 근본적인 개혁이다.

촛불항쟁을 광장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광장민주주의는 일상적인 제도가 아니다. 광장민주주의는 고유한 출몰 법칙을 가진다. 광장민주주의는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불러낼 수도 없으며,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학자 월린은‘탈주적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라는 용어로 민주주의의 본성을 포착하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안정적인 제도형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생업에 바쁜 보통 사람들이 광장에 등장했다가 흩어짐으로써 유령처럼 출몰하는 정치로 불렀다. 기성체제로부터 소외된 대중들, 제도정치 안에서 자신의 대변자를 확보하지 못한 민중들은 임계점을 넘어서면 정치계급의 지배를 중단시키게 된다.

백남기 농민의 1주기를 보내며 다시 한 번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서 정치 자체를 재구성할 때라고 생각한다. 바로 정치의 재구성이 그를 향한 애도의 정치이기도 하다. 민주정치에서 시위는 유희가 아니며, 동시에 전쟁도 아니다. 그것은 투쟁과 대화의 연쇄이고 교환이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 정치의 장에서 체계적으로, 장기적으로 배제될 때 그들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고 예쁘장한 탄원자에 머물지 않는다. 민중에게 몫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정치가 지속된다면 민중은 체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항의행동을 시작한다.

며칠 전에 개헌의 구체적인 일정이 발표되었다. 민중은 이제 아스팔트에서 헌법농사를 새로이 시작해야 할 때이다.

 

 

서울대법학박사

전 국민대, 전남대 교수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1년 <국가범죄>로 임종국상 수상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2012)> 야스퍼스 <죄의 문제(2014)> 번역
국가폭력 및 인권문제에 관한 논문을 민주법학에 규칙적으로 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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