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민족의 영웅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종대왕은 조선이 융성할 때, 즉 성세(盛世)의 영웅이라면 이순신 장군은 난세(亂世)의 영웅이라는 것. 그러나 이 두 영웅이 없다면 그렇잖아도 어둡게 인식되는 조선시대의 이미지가 얼마나 쓸쓸할까?

우리 민족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암흑의 시기에 또 한명의 난세의 영웅이 우뚝 솟아 있으니 다름아닌 안중근 의사다. 그러나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척살하고 처형당한 지 벌써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녘에 묻힌 그의 부친 묘소 역시 찾아가 볼 수 없는 분단의 세월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같은 <중앙일보> 출신으로 친형제처럼 이름과 경력이 비슷한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 정창현 전 <민족21> 대표가 3대에 걸친 안중근 일가의 족적을 기록한 『안중근家 사람들』(역사인)을 내놓았다. ‘인간 안중근’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안중근 일가가 남긴 위국헌신(爲國獻身) 정신을 새롭게 조명하는 출발점을 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정운현.정창현, 『안중근家 사람들』, 역사인.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과 두 동생 정근, 공근, 사촌동생, 명근, 경근, 봉근, 다음 대로 내려와 아들 분도, 준생, 봉근의 아들 호생, 민생, 공근의 아들 우생과 낙생, 지생, 그리고 안중근가의 ‘묻히고 잊힌’ 모친 조마리아, 부인 김아려, 동생 서여, 딸 현생, 조카 미생 등 여성들까지. 안중근가의 주요 인물들의 애국과 변절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저자들은 “이 가문의 무수한 ‘별’들은 안중근이라는 위대한 영웅에 가려 그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며 “2016년까지 안중근 가문에서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사람은 방계인사를 포함해 15명에 달한다. 단일 가문으로 이보다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일가는 없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근현대사에 전문성을 가진 기자 출신들답게 두 저자는 이 책에서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과 백범 김구의 불화설이라든지 안정근의 사망 장소 등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았고, 안중근의 5촌조카인 안민생이 사촌동생 ‘안경옥에게 보낸 편지’ 등 새로운 자료들도 발굴했다. 이 자료들을 토대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참모장 안광훈이 안중근의 조카 안호생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사촌 안봉근이 독일에서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축하연을 열어준 사실도 확인했다.

더구나 한중근 의사와 함께 하얼빈역 의거에 함께 했던 우덕순이 변절해 안 의사 집안에 사기를 치고 과거의 동지를 배신하는 친일행적을 벌였다는 사실도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 또한 안중근 일가가 살았던 청계동의 현재 모습을 담은 북녘의 사진과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 후손들의 모습을 담은 북녘 사진 등도 수록됐다. 오랜 시간을 발로 뛴 저자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저자들은 안 의사의 유지를 제대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안중근 의사 사당 및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시하고 “안 의사 뿐만 아니라 3대에 걸친 안 의사 집안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해방은 됐지만 안 의사의 딸 현생은 “변변한 거처도 마련하지 못한 채 전구를 팔아 근근이 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안중근 일가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고, 김구 서거 후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중근 일가는 또 다시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미국과 홍콩으로, 또는 월북을 택해야 했다. 더구나 4.19시기 통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살이를 하는가 하면 일부는 박정희 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설가 이문열은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불멸』을 통해 “여러 종류의 봉인으로 심하게 왜곡되거나 축소 은폐된” 안중근에 대해 “불멸의 노래를 인출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문열이 실제로 세세하게 묘사한 대목은 부친 안태훈과 안 의사가 동학군(東匪)과 벌인 전투 장면이고, “중근은 죽을 때까지도 일진회(一進會)를 동학의 후인(後人)으로 믿고 있다”(불멸1, 47쪽)는 식이었다. ‘영웅’ 안중근을 부친까지 끌어들여 ‘부조리한 한 인간’ 안중근으로 봉인하는 또다른 시도는 아니었을까?

이에 반해 이 책은 영웅의 숨겨진 가족이야기를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우리 근현대사의 자화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또 다시 남북으로 나뉘고 해외로 흩어져 여전히 해방 조국에서조차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보여주고 치유의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과 격을 달리하고 있다.

저자들은 “서로 다른 삶 속에서 안중근 일가는 한 번도 자리를 함께해서 안 의사의 추도식을 거행하지 못했다”며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안중근 일가 사람들을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해 ‘평화와 통일의 한마당’을 마련하는 일”을 제안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안중근의 유적은 남과 북의 소통과 협력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며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을 계기로 “남과 북, 해외에 산재한 안중근 일가가 모두 참가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통일 축전’을 연다면 한반도에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의 묘가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남아있고, 전쟁 때 북으로 간 안우생의 장남 안기철이 1965년부터 안태훈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가 하면, 안 의사가 교장으로 활동했던 삼흥학교도 남포시 남흥중학교로 남아있다는 것.

저자들은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남북 공동 추모행사가 중국 뤼순에서 열렸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중단된 남북 공동 추모행사를 다시 추진하고, 정기적으로 안 의사 유적을 탐방하는 행사를 연다면 남과 북이 소통하고,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자유주의의 외피를 쓴 서구식 개인주의가 난무하는 시대에 ‘영웅’은 신화로 전락하고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 산산이 흩어졌지만 “고난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저자들의 반문처럼 시대의 영웅과 그 주변 인물들의 숭고한 삶은 오늘도 별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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