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05년 당시 김정일 북측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돼 화제입니다. <주간경향>이 지난 17일 공개한 이 편지는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7월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김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내용으로 알려졌습니다.

게다가 지금 SNS 상에서는 이 편지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쓴 것으로 둔갑해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카페에 올려졌다가, 폭발적 반응과 함께 온갖 견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는 편지의 내용과 표현에 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이지만 몇 가지 민감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은 편지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과거 약속했던 사업들에 대한 성과와 함께, 앞으로 보완해야 할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김 국방위원장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이었으니 정치적으로는 쪼그라들었을 때입니다. 북측은 이런 처지의 박 대통령을 불러 ‘박근혜 녀사’라는 존칭과 함께 극진한 대접을 해줍니다. 이때 ‘박근혜-김정일’ 회동에서 합의했던 내용들의 이행 문제와 관련해 3년이 지난 2005년에 편지로 북측에 전한 것입니다.

편지는 모두에 “더운 날씨에도 위원장님은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하는 인사를 시작으로 계속 ‘위원장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어 정중하고도 겸손한 느낌을 줍니다. 어느 나라한테도 그렇지만 북측의 최고지도자에게도 이 같은 존칭을 쓰는 건 당연합니다. 그 지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일종의 배려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2002년 북남 통일축구경기”와 “북남이 하나되어 평화와 번영을 이룩할 수 있도록 저와 유럽-코리아재단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에서 보이듯 ‘북남’이라는 표현입니다. 통상 남측에서는 ‘남북’으로, 북측에서는 ‘북남’으로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굳이 남측에서 ‘북남’이라고 전도된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주체 91년’이라는 북한식 연도 표기법인 주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저자세를 두고 박 대통령이 철저히 김 국방위원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표현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과한 정도가 아니라 금도를 넘은 것입니다. 그냥 ‘남북’이라 하고, 또 ‘주체 91년’을 빼고 그냥 ‘2005년’이라 해도 북측에 대한 충분한 배려인 동시에 남측의 주체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 SNS 상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 ‘종북으로 몰릴 수 있는 사안’, ‘자기는 해도 되고 남이 하면 종북이라는 이중잣대’,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 등등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역으로 어느 진보적인 인사가 ‘북남’, ‘주체 91년’이라는 표현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면 답이 금방 나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탄핵 국면에 이 편지의 공개로 박 대통령이 더욱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됐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헌재 탄핵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불리한 자료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편지가 탄핵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가 아니더라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숱하게 드러났듯이, 박 대통령이 헌재에서 탄핵 결정을 받을 내용이 차고도 넘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의 표현이 아무리 금도를 넘었다 해도 박 대통령의 한없는 저자세를 △2005년 참여정부에서의 민족화해 분위기, △2002년 ‘박근혜-김정일’ 회동의 여운, 그리고 △민족문제를 잘 풀고 남북관계 개선에 이바지하겠다는 일말의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이랬던 박 대통령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대통령이 되자 과거 북측의 은혜(?)는 내팽개치고 ‘남북 대결론’과 ‘북 붕괴론’에 입각해 북측을 무릎 꿇게 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겉과 속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른 한 인간의 운명을 봅니다.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아 탄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편지의 진실은 박 대통령의 대북 저자세가 아니라 민족과 북측을 기망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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