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이번 83회를 마지막으로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가 종료됩니다. 2년여에 걸쳐 매주 월요일에 장문의 연재를 보내주신 최재영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이 연재를 격려 호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평양 제3인민병원’을 가다
     
북한에는 각 구역별로 인민병원을 두고 운영하고 있으며 병원이름 앞에 아라비아 숫자가 붙은 유명한 인민병원은 모두 세 곳이다. 필자와 일행은 방북 일정을 소화하던 중 ‘평양 제3인민병원’을 방문했다. 곱슬머리에 서글서글한 성격과 후덕한 이미지를 풍기는 50대 초반의 병원 원장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며 참관을 시작했다. 병원 이모저모를 둘러보며 해설을 곁들인 브리핑을 들었으며 맨 마지막 순서로 원장실로 올라가 대담시간을 보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병원은 미국의 한인교포 의학박사인 박세록 장로가 주축이 돼 조직한 ‘북미기독의료협의회(북미기독의료선교회)’의 지원과 주도로 건축한 곳이라서 재미교포 목회자인 나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병원을 참관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임상부문 진료실은 현재 총 27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43개에 달하는 다양한 진료부서가 있었으며 각 부서에는 거기에 걸맞는 다양한 현대식 치료 장비와 기자재들을 갖추고 있었다. 복부초음파실을 지날 때는 결례인줄 알면서도 안을 직접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을 느껴 허락을 받은 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검사실에는 남성 환자를 눕혀놓고 여성 의사 두 명이 첨단장비를 다루며 이곳저곳을 검진하고 있었으며 문 밖에는 환자들이 순서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뇌기능 검사실, 위내시경 검사실, 산부인과, 뢴트겐 검사실, 심장기능검사실, 소생과의 집중치료실(ICU), 주사준비실, 입원실 등을 다양하게 참관했다. 그러나 과거 병원 설립 초창기에 ‘북미기독의료협의회’회원들과 박세록 장로가 방문할 때마다 예배를 드렸던 작은 예배실 공간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병원 화단에는 흰 돌로 제작된 조형물이 모두 4개가 세워져있었는데 그중에 3개는 역대 북 최고지도자 3인을 의미하는 조형물들이 정문 입구 좌측 화단에 세워져있었다. 먼저 김일성 주석을 의미하는 ‘수령복(首領福)’,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의미하는 ‘장군복(將軍福)’그리고 현재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의미하는 ‘대장복(大將福)’이라는 글씨가 돌 위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입구 우측에는 1995년 11월 22일 날짜로 ‘충성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 비문에는 “김일성 주석의 뜨거운 사랑과 배려에 의해 이 병원이 건설되었다”는 점과 “김일성 주석의 유훈 교시를 받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높은 뜻을 새긴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또한 “외국에 살면서도 조국의 부강발전과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북미기독의료협의회 성원들이 뜨거운 애국충정으로 이 병원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길이 전하기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원장의 설명에 “이 병원은 ‘만경대구역’을 포함해 ‘평천구역’, ‘보통강구역’, ‘광복거리’등 모두 62만여 명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진료활동을 한다”고 해서 나는 엄청난 업무량에 깜짝 놀랐다. 더구나 하루 평균 2천 5백 명의 환자들을 진료한다고 하니 의료진들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실은 250여개이며 환자 침실은 515개가 되었는데 워낙 출입하는 환자들이 많다보니 병원 기자재 지원과 의약품지원 그리고 입원실 확충 등이 더 시급하다고 여겨졌다. 병원 곳곳을 참관하고 난 후 필자와 일행은 원장 집무실에 딸린 회의실에 모두 모여 병원 운영상황과 미주동포들이 의료지원을 할 수 있는 방안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교환을 가졌다. 병원 측에서 요청한 지원 품목들은 의약품과 각종 장비들이었는데 우선  소화제, 구충제, 아스피린 등 기본적인 상비약과 구강과(치과)에서 필요한 여러 장비들이 시급하다고 했다. 또한 위내시경, 자동인공호흡기, 뢴트겐 검사기, 심장초음파 검사기, 근전도 등이 당장 필요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원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 병원이 자랑하는 의료기술중에 으뜸은 ‘복강경수술’인데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시술을 했으나 복강경수술만큼은 그동안 사고율 제로를 기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수술 경험과 축적된 의료기술들을 토대로 모의수술을 거듭한 끝에 복강경을 통한 ‘충수절제수술’에 성공을 거뒀으며 그 이후 적용범위를 넓혀 담낭절제수술, 정맥류 고위결찰술, 난소난종 적출술 등의 부문까지 창의적으로 적용되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는 복부외과와 비뇨기과, 산부인과에 이르기까지 더욱 확대됐다고 한다. 특히 ‘충수절제술’과 ‘정맥류 고위결찰술’은  전 세계적으로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의료기술이라고 한다. 류림 원장은 이야기도중 남측에서는 일반적으로 ‘항문(肛門)’이라고 부르는 단어를 자꾸만 ‘홍문(紅門’이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어감에서 발생하는 차이로 일행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 평양 제3인민병원 본관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병원 화단에는 김일성 주석을 지칭하는 ‘수령복’을 비롯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지칭하는 ‘장군복’그리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징하는 ‘대장복’을 새긴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병원을 설립한 ‘북미기독의료선교회’를 기념하는 기념비 앞면. [사진제공 - 최재영]

 

▲ 병원을 설립한 ‘북미기독의료선교회’를 기념하는 기념비 뒷면. [사진제공 - 최재영]

 

▲ 질병예방을 위한 건강상식 게시판을 병풍식으로 만들어 병원 복도에 비치해 매우 이채롭게 보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무상의료 혜택이지만 각 진료과목마다 정해진 가격이 있는데 이 진료비는 모두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성 환자가 복부초음파실에서 검사를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병원 정문에 서있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현관에서 환자들과 방문객들을 안내하고 있는 여성 간호사. [사진제공 - 최재영]

 

▲ 병원 외곽을 돌며 병원 상황을 브리핑하는 류림 원장(좌측)과 함께 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병원 참관을 마친 후 간담회를 나누는 필자와 방문객들. [사진제공 - 최재영]


‘평양 제3인민병원’에 마련되었던 예배실
    
필자가 방문한 ‘평양 제3인민병원’은 미국 북미주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의사들이 주축이 돼 건립한 병원이기 때문에 설립 초기에는 병원내의 작은 공간에 예배실을 마련해 한동안 운영했으나 현재는 이 예배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병원설립과 더불어서 과감하게도 병원 예배실이 확보된 배경에는 박세록 장로의 공로가 매우 컸다. 1938년 원산에서 출생한 실향민 출신의 박 장로는 196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1966년 미국에 이민을 온 후 1966-1971 까지 미시간대학교의 William Beumont Hospital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1971년 산부인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또한 1973 미국 산부인과 학술회원 학위를 취득하고 1989-97까지 미국 웨인주립대학교와 1997-2003까지 UC DAVIS 대학교에서 산부인과 교수를 지내는 등 불임전문 분야의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그러던 중 1987년 12월 웨인주립대학 외래교수 시절 인도 봄베이대학 등 3개 대학에 교환교수로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며 현지에 의료봉사 활동을 하게 됐는데 이때 헐벗음과 굶주림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경험들을 토대로 미주 한국일보 칼럼에 연재를 했는데 그 기사를 북한 고위층이 직접 읽고 연락이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인 1988년 11월 북한 당국의 공식 초청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1월 첫 방북을 하게 되는데 이때 박 장로는 그동안 자신에게 형성된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불신 그리고 선입견 때문에 방북 중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부인도 데려가지 않고 동역자인 장현식 장로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북측은 박 장로 일행을 위해 북경공항에 전용 비행기를 보내올 정도로 각별히 환대해주었으며 그 이후 수차례의 방북을 이어가던 끝에 마침내 6년 후인 1995년 평양 중심가 광복거리에 ‘평양 제3인민병원’을 개원하게 된 것이다.
     
첫 방북 이후 ‘평양 제3인민병원’이 건립되기까지 6년간의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 방북을 통해 북한의 의료현황 실태와 내부 사정을 직접 목격한 박 장로는 대북 의료선교사역을 굳게 결심하고 귀국한지 3개월만인 1989년 4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북미기독의료선교회’라는 단체를 발족했다. 또한 기존에 ‘북미기독의사선교회’라는 단체가 존재했기 때문에 더욱 단합된 힘과 효율적 사역을 위해 두 단체를 통합하기까지 했다. 통합 이후에는 미주 전역에 거주하는 크리스찬 한인 의사들이 결집하며 대북 의료선교 운동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통합된 ‘북미기독의료선교회’는 초창기 보스톤, 아틀란타, 시카고, 마이애미, 로스앤젤레스, 씨애틀 등지에 각각 지부를 두었으며 약 50명의 회원들이 박 장로의 리더십 아래 10차례에 걸쳐서 북한을 정기 방문하였으며 매번 방문할 때마다 정성을 다해 의약품과 기자재들을 운반하며 ‘사랑의 의료품 나누기 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첫 방북 이듬해인 1990년 7월 북 당국으로부터 평양에 병원건립 제안을 받았고 그 후 병원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승인받아 몇 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 마침내 북 의료당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94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해 이듬해에 완공할 수 있었다. 1995년 11월 22일에 역사적인 개원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완공 당시 병원은 500병상, 분만실 2개, 수술실 3개 등을 갖췄다. 뿐만 아니라 1997년 9월 29일에는 박 장로가 남측 출신의 의사로서는 최초로 북한의 환자를 직접 시술을 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맞이했는데 이는 북 당국의 신뢰가 얼마나 전폭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뿐 아니라 박 장로의 집요한 협상력과 요청으로 새로 건축된 제3인민병원 건물에 예배실까지 확보하는데 합의하여 가까스로 병원 안에 예배실 공간을 마련해 박 장로와 북미주기독의료선교회 회원들이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주일예배를 드리거나 공식적인 종교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병원 원목 사역(Hospital Chaplain Ministry)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남측이나 서방세계와는 달리 아직도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북측 사회이다 보니 예배실 운영이나 병원에서의 선교적 활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또한 병원 예배실 운영은 쉽사리 용인되지 않았으며 이 일로 인해 박 장로 일행의 동포애와 의료사역에 대해 북 의료당국과 정보당국이 순수성과 저의를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그 후 연속으로 발생한 대가뭄과 대홍수, 냉해 등으로 인해 발생한 식량난 등  ‘고난의 행군’시기를 거치면서 외국으로부터 많은 대북지원 물자가 반입되고 아울러 선군정치 아래서 군부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결국 박 장로의 병원 예배실 운영을 포함해 대북의료사역 전반에 걸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북 당국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박 장로에게 ‘포교를 통한 체제 문란자’라는 혐의를 내리고 ‘종교를 통한 체제 전복세력’으로 규정짓게 된다. 북 당국은 당사자인 박 장로와 ‘북미기독의료선교회’측에 경고하고 그들의 활동을 “병원과 의료지원을 빙자한 선교활동”으로 판단해 모든 관계를 중단시키고 말았다. 박 장로는 병원이 개원하던 1995년부터 경고를 받은 1999년까지 거의 5년 동안 ‘평양 제3인민병원’의 명예원장 직책을 맡아 20여 차례 북을 왕래하며 불철주야 노심초사 물심양면으로 크게 헌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 사회와 체제를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의 차이와 그의 선교적 가치관 그리고 무리한 선교적 성취욕 때문에 결국 순수한 의도로 시작된 대북의료지원 사업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 의료계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고 적용된 병원 원목 사역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컸다.
  
의료지원사역이 중단된 여러 가지 원인들
     
박 장로를 비롯해 그가 주도해서 설립한 ‘북미주기독의료선교회’는 제3인민병원 개원을 앞두고 필요한 장비와 기자재를 신축건물에 채우기 위해 ‘사랑의 의료품 나누기 운동’을 전개해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마침내 병원 침대 500개를 포함해 기초적인 의료기재들을 서울에서 남포항으로 운반해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등 그 수고와 헌신이 매우 컸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반으로 병원은 예정대로 무사히 개원할 수 있었으며 병원에서 개원예배도 드릴 수 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신 의학교과서, 세계의학연구보감 등 700권과 세계 최신 의학문헌 등 총 2000여권의 책들을 평양에 보냈는데 이때 운송된 책에는 일일이 ‘북미주기독의료선교회’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이처럼 ‘기독’혹은 ‘선교’라는 단어가 들어간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이 책들은 3천석 규모의 평양 인민대학습당의 중앙도서관 코너에 진열되었으며 북한 전역의 의사, 간호원. 약사 그리고 의과대학교 학생들에게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헌신적인 지원과 의료봉사에도 불구하고 북측 당국은 왜 이들의 의료지원사역을 중단시켰을까? 그 원인은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한 북한체제하에서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에 있는 북한사회의 특수성을 소홀히 한데서 발생했다. 북한은 자신들의 사회주의 체제와 주체적 정서가 위협될 만한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 종교행위 등은 일절 수용하지 않는다. 북미기독의사협의회와 박세록 장로는 병원 설립 이후 최소 10년 이상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시도하지 말고 묵묵히 의료지원 사업에만 집중했어야 했다. 박 장로의 입장에서는 병원이 개원된 후 북녘의 환자들이 모여들어 치료받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고 증언한 적이 있었다. 특히 병원 안에 예배실을 마련했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첫 방북이후 6년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과 복잡한 세계정세와 남북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함없이 정성을 쏟아 부은 결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북지원은 복음을 전제로 해야 하고 마음을 담아서 전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북 인민들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가 대북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지요. 나는 지금까지 북한 정부 관리들의 마음을 열려고 목숨을 바쳐왔는데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는 관리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술 몇 번 해주고 그들의 마음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고 이는 북한의 현실 상황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대북의료지원 사업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 왔던 박 장로의 이면에는 북한선교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으나 이와 더불어 언론 인터뷰나 교회 강연 등을 통해 평소 북한 당국과 정서가 맞지 않는 자신의 대북관과 선교관을 과감히 드러내기도 했다.

“제3인민병원은 분명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이지만 이것이 북한선교의 교두보가 되고 요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특히 병원 안에 있는 예배실이 앞으로 교회가 되고 이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을 믿으며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사역도 함께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된 아름다운 조국의 금수강산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병원 예배실이 정식 교회당이 되게 하려는 그의 염원은 결국 달성되지 못했다. 첫 방북 이후 ‘북미 기독의료선교회’를 설립한 그는  1989년에 별도로 자신의 의료사역을 왕성하게 펼치고자 SAM(Spiritual Awakening Mission) 의료복지재단을 창설해 국제총재를 맡아왔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는 ‘한민족복지재단’설립을 주도해 이끌어왔으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미주본부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대북지원사업에는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 또한 평양에서의 대북 의료사역이 중단된 이후에는 북방의료사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2004년 서울에서도 SAM 의료복지재단을 설립했고 박 장로가 총재, 박은조 목사와 이상택이 이사장에 선임됐다.
   
그리고 그해 7월 22일  외교통상부 산하 법인설립 허가를 기념해 100여 명의 후원이사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연을 개최했는데 이때 박 장로는 평소 자신의 시국관과 이념적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내가) 한국에 오면 민주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비전향 장기수가 석방되고 간첩들이 진실된 정치가를 비평하고 판단하는 나라가 됐다. 한국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의 이 같은 발언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의 관용적인 대북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의중이 내포돼 있었는데 이는 북한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쾌한 발언이었다. 또한 자신이 작성한 평양 제3인민병원에 대한 ‘미래 비전문 1항’을 보면 “최고 권력자들을 치료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북한선교가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는 취지를 두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 미국 의료선교사로서 고종의 어의로서 복음을 전파했던 애비슨(Avison) 선교사의 일화를 근거로 북한의 최고지도부와 권력자들을 치료해서 전도하겠다는 의도였으나 의료센터 기능을 갖춘 후 최고 권력자들을 치료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북한 선교가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는 목적을 북한 당국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계속해서 미래비전문 조항에는 “북한에 20개의 이동진료차를 보급해 의료봉사자들이 북한 전역 시골곳곳까지 방문해 의료봉사를 하고 교회당을 설립한다”고 되어 있으며 “의료기술학교나 간호학교는 물론 제약회사, 치과기공, 재활원등을 설립하고 더 나아가 나진선봉 지역에 교회와 병원을 설립한다”는 조항도 명시되어있다. 이런 여러 가지 그의 대북관과 선교관은 결국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북한 당국에 의해 의료사역이 중단된 박 장로는 2000년 북한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신의주와 중국을 잇는 관문도시인 단동에 단동기독병원(CMWM)을 건립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의료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평양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대륙을 거쳐 세계를 향한 복음의 관문이 되는데 신의주와 인접하고 있는 단동지역은 북한선교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라며 자신의 단동사역 이유를 밝혔다. 
   
이뿐 아니라 SAM복지재단을 재창설해 1998년 9월부터 압록강 두만강을 잇는 단기 의료봉사 루트 개척을 시작해 매년 10여 차례의 단기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는데 이는 하루 평균 200명, 연 평균 5,000명 진료하는 규모라고 한다. 또한 중국 심양사랑병원을 개원해 병원장을 지내면서 외래 진료소 사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탈북자를 돕기 위해 심양사랑병원 외에도 집안진료소, 장백진료소, 우스리스크진료소를 개설해 탈북자 대상 위주의 의료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SAM의료복지재단이 룡천 폭발 당시 긴급구호품을 보내거나 비타민보내기운동, 사랑의왕진가방보내기운동, 겨울나기운동, 분유보내기운동 등 매년 북녘동포들을 돕기 위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북측 당국이 매우 싫어하는 사역들과 좋아하는 사역들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시골에 ‘왕진가방 보내기’운동이나 신의주 모자강남병원 설립 등 의료지원에도 앞장서 왔고 한민족복지재단을 통해 1997년 나진선봉지역에 로뎀제약공장 설립을 시작했고 선봉인민병원 현대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 어린이돕기 5대사업으로 어린이병원 현대화, 어린이 심장병센터설립, 어린이 급식, 어린이 집단구충, 사랑의 의료품나누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한국의 유명제과업체인 고려당을 통해 북한 노동자 32명에게 제빵 기술 훈련을 시킨 후 ‘평화의 빵’공장을 라선시에 설립해 매일 1만 5천개의 빵을 자체 생산해 북녘의 어린이들을 먹이게 했다. 이처럼 북녘 동포들과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보건 복지 의료사업은 분단의 깊은 골을 메우고 민족의 화합과 협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선한 의도라고 해도 북 당국과의 불화와 적대적 관계에서의 지원활동은 매우 위험을 초래하고 기독교의 입지를 약화시킨다.
 

▲ 평양 제3인민병원 설립을 주도하고 한동안 병원 예배실을 운영했던 재미교포 의사 박세록 장로가 강연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북미기독의료선교협의회’를 비롯해 여러 해외동포들과 단체들이 기증한 도서들이 평양 인민대학습당 도서관 특별 코너에 꽂혀 있다. 현황판에는 기증자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북미기독의료선교협의회’가 기증한 의학서적들이 보관된 평양 인민대학습당 서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해외동포들이 기증한 다양한 서적들이 꽂힌 인민대학습당 특별코너에서 책들을 열람하고 있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평양인민병원은 제1, 제2, 제3병원이 운영 중
   
앞서 밝혔듯이 평양시내 인민병원들 중에 가장 규모가 튼튼하고 역동적인 곳은 평양 제1-제3병원이다. 평양 제1인민병원은 1945년 평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병원이며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평양 시민들을 무상치료해왔다. 병원 옆에는 계월향이 살던 집을 개조해 ‘월향전시관’을 만들어 놓고 이곳에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고 바로 인근에는 개선문이 위치해 있다. 특히 외과병동은 3층 건물인데 소생과(응급실) 1곳과 수술장(수술실)이 6곳, 병실이 75개(4인실, 6인실 포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너무 오래되다보니 건물 외관과 내부시설이 노후되어 2009년도에 남측의 ‘하나됨을 위한 늘푸른삼천(이하, 늘푸른삼천)’이라는 단체를 비롯해 몇몇 대북지원단체들이 이 병원에 대한 개건사업과 의료지원사업을 시작했다. 특히 ‘늘푸른삼천’은 외과병동 리모델링과 의약품, 의료장비 지원사업을 해왔는데 2009년 당시 병원 보수공사는 1억 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 병실과 모든 출입문을 교체하고, 천정과 지붕 공사는 물론 병실 바닥과 내외장 공사를 모두 마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5천만 원을 더 투자해 환자용 침대 200개를 교체하고, 각종 의약품 5천만 원을 추가 지원했다. 이뿐 아니라 엑스레이(X-ray)와 초음파(복부용 초음파 등), 내시경, 알약 제조기 등이 긴급히 필요해 1억 7000만원 어치의 의료장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악화되어도 북녘 동포들의 건강을 돕기 위한 순수한 민간차원의 의료지원사업에 찬사를 보낼 뿐이다. 또한 ‘늘푸른삼천’2008년도에는 평양에 ‘상원통일양묘장’을 조성해 나무종자와 양묘자재를 보냈는데 그 나무들이 지금은 ‘통일나무’들이 되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당시 이 단체가 내세운 구호는 ‘삼천리 금수강산‘이었는데 그 발상이 탁월하고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양 제2인민병원도 그동안 남측의 여러 단체들이 의료지원을 해왔는데 특히 2003년에는 ‘이웃사랑회(goodneighbors)’측에서 심장초음파 진단기 소모품과, 골밀도 진단기 부품, 뢴트겐 부품, 위내시경 인화지, 핸드피스, 전압안정기 등을 선박으로 운송해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3곳의 유명 인민병원들은 남측이나 미주의 동포들로부터 지원과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종교적인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무난하게 아름다운 관계가 지속되리라고 여겨진다.
 

▲ 정문에서 바라본 평양 제1인민병원.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 제1인민병원 본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 제2인민병원 본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동포 방문객들이 평양 제2인민병원 외부를 참관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선교보다 먼저 평화통일에 집중하고 기여하는 사역을 해야
   
필자는 여러 가지 대북지원사업 중에 왜 의료지원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다. 어떤 사회이든 질병과 병고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런 인간 사회생활에 가장 기초가 되는 치유와 의료행위는 사상이나 이념 혹은 정치적 환경에 관계없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매우 절실하고도 현실적이다. 특히 기독교의 사랑을 바탕으로 둔 의료봉사는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북한과 제3세계지역에 들어가도 전혀 무리가 없고 손색이 없다.
    
북한은 그동안 대도시는 물론 면 단위와 시골 농어촌 마을까지 무상치료 혜택을 시행해왔으나 아직도 시골 낙후 지역은 경제적,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그 실효성이 약해 영양 부족과 어려운 생활환경 등으로 인해 간염, 폐결핵, 기생충병 등의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고 장마철에는 장질부사, 콜레라 등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도 빈번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도시를 벗어날수록 의료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보건 복지 식량 의료등의 지원사역이야말로 가장 절실하고 시급하다.
   
국제법상으로 볼 때 아무리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는 적군도 부상을 당하면 치료를 해주고 의료봉사를 해주는 것이 적십자정신이다. 이는 의료봉사의 중립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신을 실현하는 루트가 되기도 하며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굳이 기독교의 십자가의 정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적십자정신만으로도 남북의 평화통일에 충분히 기여하고 북한 동포들을 감동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대북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지원사업을 통해 종교적 목적 달성과 조급한 선교적 결실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포교와 선교에 최종 목표를 두고 무리한 계획을 강행하다보니 자신들의 순수성은 퇴색되고 마침내 그 사역마저 불미스럽게 중단되는 경우가 지금까지 반복되었다.
    
특히 제3세계의 선교는 항상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들은 사역단체와 교회들 간의 경쟁적인 소모전과 과잉선교 열풍, 그리고 물량공세를 동반한 물질선교, 빤짝선교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일시적 행사에 불과한 이벤트성 선교 등 수많은 폐단을 발생하며 선교허영에 들떠있다. 이로 말미암아 현지 북녘 사회는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모되고 있으며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연속으로 체포되거나 억류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는 대북사역자들의 정책과 전략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 누구보다 더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이다. 이는 후방이나 측면에서 지원하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대북관과 신앙적 가치관이 기독교 근본주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이다.
    
대북사역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민족관, 역사관등이 변하지 않는다면 통일의 날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며 북한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기르지 않고 북한이라는 특수한 체제의 현지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면 대북사역을 중단하는 것이 옳다. 북한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고 단순하게 자신들의 선교적 열망을 충족하거나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뛰어든다면 모닥불의 불나방 신세가 되고 만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를 내세우며 순교도 각오하고 있으면서도 선교 대상국가와 대상자들인 우리 북한 동포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교정책만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이런 모습들은 북한 당국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무모하고 거만한 종교꾼들과 중세 십자군 같은 위협적인 점령군의 모습으로 비쳐질 뿐이다. 대북사역자들이 북한에 대해 매우 편협되거나 몰이해에 가깝다면 파송해서도 안 되고 자원해서도 안 된다.
     
또한 경제적, 생활적 측면만을 보고 현지 북한동포들을 너무 불쌍하게 여기거나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빈곤은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는데 북한은 남한보다는 생활수준이나 경제적 격차가 현저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리 생활수준이 낮다고 해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행복지수가 있다. 또한 북 인민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이 완고하게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억지로 기독교적 삶의 가치관을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북한동포들을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타문화권 대상자로서 지극히 존중하며 차분하게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겸손하게 무릎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낮아짐과 섬김의 자세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하다해서 거만하거나 우월감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선교의 본질과 목적을 무시하고 자신의 만용과 독선으로 선교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조건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북한 인민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혼란해지고 기독교의 입지가 약화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대북사역자들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순수하게 그들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면 된다. (끝)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