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암 나철 100주기⑨> [인터뷰]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홍암 나철 100주기⑩>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권중현을 사격하였으나 맞히지 못했고...

▲ 홍암 나철의 자신회가 1907년 을사5적 처단투쟁을 벌였던 경복궁 동문 건춘문 전경. 을사5적 중 한 명인 박제순 참정대신은 저격을 모면해 이 문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당일은 아침부터 각자 예정한 장소에 이르러 길바닥에 머무르며 그 통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경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은 그 기다리고 있던 광화문 앞에 왔으므로 오기호는 인솔하는 바의 장사(壯士)를 독촉하여 “하라, 하라”고 재촉했지만 장사 등이 우물쭈물 주저하던 중에 박 참정은 문 안에 들어가 버려서 끝내 기회를 잃었습니다...”(통감부문서 9권)

1907년 3월 25일 오전 10시경, 조장 오기호와 지방에서 올라온 장사(壯士)들이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을사5적 중 한 명인 참정대신 박제순을 노렸지만 권총 사격을 해본 적이 없는 장사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박제순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 학부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이하영을 노린 조들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사동(寺洞) 길에서 권중현을 사격하였으나 맞히지 못했고 다른 곳들에서는 미처 손도 써보지 못하고 놀라서 흩어지는 통에 며칠간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거사할 작정을 하였습니다.” (고종실록 48권)

<일제가 파악한 을사5적 처단투쟁 명단>

 朴 參政大臣

 吳基鎬 이하 壯士 몇 명

 李 內部大臣

 金東弼 이하 壯土 몇 명

 權 軍部大臣

 李鴻來 이하 壯士 몇 명

 李 學部大臣

 朴大夏 이하 壯士 몇 명

 李 法部大臣

 徐泰云 이하 壯士 몇 명

 李根澤

 李容彩 이하 壯士 몇 명

* 통감부문서 9권, 一○. 南韓大討伐實施計劃其他 , (8) 政府 전복과 대신 암살에 관한 件


“오기호 일행이 매복해 박제순을 기다리던 곳이 바로 이곳 건춘문 앞일 겁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아니라 동문(東門)에 해당하는 건춘문(建春門)으로 당시 대신들이 드나들었다며 이곳을 지목했다. 110년전, 오기호와 저격수들은 이 근처 어딘가에 매복했다가 박제순을 노렸을 것이다.

거사 실패 이유는 권총 사격 연습을 해보지 못한 채 실행에 나선 준비부족이었다. 사격을 해보지 못한 저격수가 면전에서 사람을 권총으로 사살한다는 것은 장사들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에 앞서 맹렬히 사격 연습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905년 일본에 건너가 조선의 독립 보장을 요구하며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까지 벌였지만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요해 국권을 빼앗아갔고, 1906년 재차 항일외교를 펼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홍암 나철 일행은 을사5적 처단 투쟁에 나섰지만 실패한 것이다.

나라를 잃자 자결 순국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홍암 일행이 폭약이 장치된 궤짝을 “이것은 미국인 모씨가 보낸 것이다”라고 선물로 위장해 이지용과 박제순 자택에 보내 폭살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홍암 일행이 을사5적 처단을 위해 의혈지사들을 모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해왔고, 이들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거액의 거사 자금을 모아 의거에 나섰고, 의거는 비록 실패로 돌아가 홍암이 유배 10년형을 선고받는 등 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장거 소식은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예관 신규식은 “맹약 어긴 그 죄를 소리 높여 꾸짖고/ 조약 맺은 간당을 한 칼로 베려 했네... 요사 기운이 가득차 온누리 캄캄한데/ 이 사람 나지 않았으면 세상일 어이했으리...”라고 을사5적 처단투쟁을 기렸다.

“700년간 폐색되었던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 서울시가 지난해 12월 세운 대종교 중광터 표식. 나무에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아 나무를 치우고 촬영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단군교를 중광했던 서울 제동 취운정 아래 6간 초옥 자리에는 안국선원이 자리잡고 있다. 왼편 하단 화단에(붉은색 원 표시) 대종교 중광터 표지석이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0년 유배형을 받고 지도로 유배 갔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난 홍암은 마지막 4차 항일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단군교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켜세움)하게 된다. 항일외교와 을사5적 처단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뒤의 결단이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는 “4366년 기유(1909) 음 정월 15일 자시를 기하여 동지 오기호, 강우, 최전, 류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인과 함께 한성 북부 제동 취운정(翠雲亭) 아래 8통 10호 육간 초옥 북벽(北壁)에 ‘단군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祭天)의 대례(大禮)를 행하시며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시니 고려 원종 때 몽고 의 침입으로부터 700년간 폐색되었던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한말의 암흑풍운 속에도 일맥의 서광이 민족의 앞날을 밝게 비치었으니 이날이 곧 우리 겨레의 새 역사를 창조한 거룩한 날이오, 우리 교의 중광절(重光節)인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홍암 대종사는 하느님 신앙을 정통으로 이어받으신 분”이라며 “개천, 나라를 열면서 도를 세웠다는 뜻이다. 쭉 전해져 내려온 도를 홍암나철 대종사가 다시 중광시켰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대종교는 음력 1월 15일을 4대 경절의 하나인 중광절로 기념하고 있다. 대종교의 4대 경절은 중광절(重光節, 음력 1월 15일), 어천절(御天節, 음력 3월 15일), 가경절(嘉慶節, 음력 8월 15일), 개천절(開天節, 음력 10월 3일)이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홍암이 단군교를 중광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1900년대 후반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단군신앙이 강조되던 시대적인 분위기, △친구인 정교, 이기의 단군에 대한 해박한 지식, △동조동근론을 내세운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위기의식 등을 꼽았다.(「홍암 나철의 대종교 중광이전 활동과 대종교 유적지」. 2010.3.)

▲ 홍암 나철과 함께 했던 해학 이기는 단학회를 결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자료사진 - 대종교]

특히 홍암과 항일외교를 같이 펼쳤고 단군교 중광에도 참여한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는 홍암보다 15살쯤 연장자로 운초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할 때 「태백일사」를 제공하는 등 단군 관련 역사에 밝았다. 그러나 이후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해 홍암과는 다른 갈래의 길을 걷다 1909년 절식(絶食) 자결했다.

계연수의 제자 한암당 이유립은 평소 “침략자의 마수는 뻗쳐오고 독립운동은 급하다고 본 홍암 나철은 단군교라는 종교를 내세워 민족운동에 나선 것이고, 해학 이기는 역사와 학문의 기본원칙과 계통을 바로잡지 못하면 결국 사상적으로 허약한 과거로 되돌아갈 뿐이니 더디 가더라도 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면서 단학회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고 이유립의 제자 전형배 창해출판사 대표가 전했다.

일제는 1942년 임오교변 당시 기소장에서 “대종교는 그 전 이름을 단군교(檀君敎)라 칭하고 명치 42년 음력 정월 15일 조선 경성부에서 나철이 자고로 조선민족간의 신앙에 있어서 조선민족의 시조이며 국조라고 전승하여 온 단군을 숭봉하며 이에 귀일함으로써 조선민족정신의 순화통일과 조선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함과 동시에 조선민족 결합의 강화에 의하여 독립국가로써 조선의 존속을 목표로 하고 다수동지와 함께 결성하여 스스로 제1세교주라고 한 단체”라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단군을 내세워 조선민족의 독립국가를 추구했다고 본 것이다.

홍암은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나인영에서 나철로 개명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09년 중광 이후는 유교주의에서 전래 신교주의(神敎主義),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이야기하는 신교주의자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주의자로 변신한다”며 “중광 이전의 관료주의 모습에서 중광 이후의 모습은 철저하게 수행주의의 모습이다”고 평가했다.

김동환 연구위원의 설명을 들으며 찾아간 단군교 중광 장소인 ‘한성 북부 제동 취운정(翠雲亭) 아래 8통 10호 육간 초옥’은 현재 서울 안국동 안국선원 자리로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표지석 하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국선원이 중광터로 확인된 것은 육담 최남선의 후손이 간직한 유품에서 발견된 나철의 친필 중광가(重光歌) 머리말에 ‘가회동 14번지 이봉춘 현거(嘉會洞 十四番地 李逢春 現居)’라고 적힌 주소를 실마리로 추적해 찾아낸 것이다.

단군교를 중광한 1909년 음력 10월 3일, 첫 개천절을 맞아 제천행사를 거행한 서울 계동 터에도 역시 서울시가 세운 ‘개천절 행사 발상지’라는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홍암이 백봉신사 집단으로부터 삼일신고 등을 전달받았고, 마지막 순교의 결심을 안고 구월산 삼성사로 떠날 때 이용한 서대문역은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대종교 실무를 관할하고 있는 윤승길 전리(典理)는 “가칭 ‘홍암 나철 대종사 조천 100주년 위원회’를 구성해 9월 10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홍암 나철 대종사 추모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며 “100주년 위원회에서 대종교 중광터에 기념관을 세우는 문제도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비의 인물 백봉신사와 도통 전수

▲ 백봉신사의 사자 백전 두암 노인이 『삼일신고』 등을 건네준 곳이자, 1916년 순교를 결심한 홍암 나철이 신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구월산 삼성사로 향했던 곳인 서대문역은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염천교 위에서 내려다본 서대문역 자리로 추정되는 철길엔 아직도 기차가 오가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백봉신사의 사자 미도 두일백이 나타나 영계식(靈戒式)을 거행한 일본 도쿄 소재 개평관은 이후 태영관으로 바뀌었지만 이번 기획취재 과정에서 그마저 재개발에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이 단군교 중광에 이르는 과정도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적들이 놓여있다. 주로 백두산 백봉신사(白峰神師)를 비롯한 단군교를 신봉하는 집단과의 연결이 그것이다.

1906년 초, 홍암이 1차 항일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부산역에서 서대문역에 도착해 집으로 향할 때 백전 두암(90)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건네준 일이나, 1908년 4차 방일 시기 숙소인 도쿄 청광관에 미도 두일백(69)이 나타나 『단군교포명서』 등을 전달하고 숙소 개평관에 다시 나타나 영계식(靈戒式)을 거행했다.

특히 지금도 대종교의 3대 경전 중 하나로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취급되는 『삼일신고』는 백봉신사가 백두산에서 10년 수도 끝에 묵계를 받고 석함에서 찾아내 백전 두암을 통해 홍암에게 전달했고, 홍암은 이를 해설한 『신리대전』을 저술하는 등 대종교의 근간이 되고 있다.

『단군교포명서』에는 백봉신사가 ‘본교 대종사’로 등장하고 실제로 홍암 나철도 자신을 2세 교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단군교포명서에서 백봉신사는 “본교는 4천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본래 있던 종교다... 본교가 흥하면 천지가 다시 새롭고 산천이 다시 빛나며 인민이 번창할 것이고, 본교가 쇠하면 상하의 지위가 바뀌고 음양의 질서가 어그러져 만물이 흥왕치 못한다”고 밝혔다.

백봉신사 집단을 연구해온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 소장과 김탁 배달사상연구소 소장 등은 백봉신사 집단이 다섯 차례의 계기를 통해 홍암 나철에서 단군교 중광을 가능토록 도와 줬다며, 백봉신사 집단의 실존을 확언했다.

나아가 ‘백봉과 그 비의 교단의 존재를 실증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1903년경 백봉이 펴낸 경전 성격의 유일본 문헌’이라며 『대종교신원경』을 발굴, 출판했다. (『대종교신원경』, 선인, 2011)

그러나 신운용 외국어대 교수는 『대종교신원경』에 대해 “이 책은 중국 도교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점, 서지학적 모호성 등에서 앞으로 학계의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문제점을 짚었다.

수십만 피로 아로새긴 동학과 대종교의 이상

▲ 대종교는 홍암 대종사 조천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을 계획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홍제동 대종교총본사 주일 경배식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선생이 태어날 당시는 조선이 안팍으로 무너져가던 시기로 앞선 수운 최제우(1824~1964)가 동학의 도를 펴던 때고, 홍암과 비슷한 시기의 증산 강일순(1871~1909), 뒤에 온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증산교와 원불교를 열던 민족종교의 융성기다. 그만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가 컸으리라.

오정윤 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조선후기 토지개혁과 상공업 진흥을 주장한 실학이 대두되고, 서양학문에서 방법론을 구하는 서학도 등장했다”며 “박제가의 후학인 이서구, 그의 제자인 이운규를 통해 민중의 기대와 정서에 기반한 비주류의 사상이 불타올랐다”고 당시 흐름을 정리했다.

이운규로부터 불교적 색채를 띤 김광화의 남학과 최제우의 동학, 김일부의 정학 등의 갈래가 나왔고, 주류에서 밀린 남인과 소론 계열의 지식인들이 주축이 돼 단군을 통한 민족부흥을 꿈꾸는 단군교도 이때에 일어난 사상적 흐름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제우 강일순, 박중빈이 민족종교를 창시한 교주라면 나철은 기존의 민족종교를 다시 일으킨 부흥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 고유 종교인 신교(神敎) 내지는 천교(天敎)를 계승하고 스스로 교주가 된 것이 아니라 단군을 첫 교주로 내세워 1909년 단군교(1910년 대종교로 개칭)를 중광(重光)한 것이다.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끊기다시피 한 우리 전통 종교의 맥을 잇고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기치를 내건 홍암 나철의 절규는 당시 나라를 잃은 우국지사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을사5적 처단 투쟁을 호소하자 전국에서 애국지사들이 몰렸고, 단군교를 중광하자 입교자가 불과 1년만에 2만을 넘어섰다. 만주지역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의 초상화 사진을 가슴에 품고 항일운동에 나서자 30만 신도가 뒤따랐고 10만의 순교로 피바다를 이뤘다.

동학의 30만 순교에 이은 대종교의 10만 순교는 우리 근현대사의 큰 물줄기로 그 중요성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특히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과 순교는 거의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

▲ 홍암 나철 대종교 대종사가 순교 조천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대종교는 100주년 위원회를 구성, 올해 가경절(음 8.15)이나 개천절에 이곳에서 제를 올릴 예정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윤승길 대종교 전리(典理)는 “홍암 대종사가 조천한 음력 8월 보름 추석인 ‘가경절’에 구월산 삼성사를 방문해 예를 올리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며 “남북관계 경색으로 어려울 경우 10월 3일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평양 단군릉에서 가진 뒤 삼성사를 찾을 예정”이라고 밝혀 성사 여부가 주목된다.

또한 오는 24~27일 중국 화룡현 대종교 3종사묘역과 백두산을 방문, 100주기 제례를 지내고, 추모문집 발간과 기념우표 발행도 추진한다. 개천절인 10월 3일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추모문화제를 갖고 각계 대표 초청 만찬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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