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평화는 깨지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아는 것일까? 연일 ‘평양 진격’이니 ‘서울 해방’이니 군사적 갈등이 커져만 가는 상황에서 ‘평화를 만드는 길’(피스 메이킹)에 전념했던 한 인간에 대한 발자취가 출간돼 주목된다.

▲ ‘이봉조 유족회’가 2주기를 맞아 엮은 『이봉조의 통일 수첩 - 협력을 위한 평화, 평화를 위한 협력』(출판사 옹기쟁이) 표지.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봉조(1954~2014) 전 통일부 차관의 2주기를 맞아 ‘이봉조 유족회’가 『이봉조의 통일 수첩 - 협력을 위한 평화, 평화를 위한 협력』(출판사 옹기쟁이)을 펴냈다. 60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별세한 고인의 수첩 기록과 기고문, 연보를 정리한 것.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통일이 진전되어야 하고, 통일부에서 일하는 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에 통일부 직원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해서 근무를 시작하게 됐다.”

이봉조는 민화협 기관지 『민족화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통일부(당시 통일원) 입부를 이같이 설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흥사단 활동으로 사회의식이 싹텄고, 서강대학교를 다니면서 ‘데모’에 참가했던 ‘운동권 학생’ 전력의 그가 통일원에 들어간 것은 그의 말대로 ‘운이 좋았다’.

그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과 청와대 통일비서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정책조정실장 등 중책을 맡다 통일부 차관을 끝으로 통일부를 떠난 2006년까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이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다.

그의 상관이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추천사에서 “고인과 나는 ‘피스 메이킹’의 길을 함께 걸었던 동료였던 셈”이라며 “이 책은 1990년대로부터 2010년대까지 20여 년간 ‘피스 메이킹 시대’의 일부를 복원해주고 있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가 남긴 수첩에는 1990년대 초반 진행된 남북고위급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에 관한 메모들이 확인되며, 헌법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음’에 반해 현실은 ‘de facto(사실상) 국가로 승인’하고 있는 모순에 관한 메모는 이후 남북기본합의서에 남북한 특수관계로 표현돼 현실화 됐다.

그의 가장 화려한 활약은 아무래도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2005년 5월 제1차 남북차관급회담을 꼽을 수 있다. 남북관계에서 역사적인 이들 사건에 그는 청와대 통일비서관과 통일부 차관으로서 핵심적인 역할과 주역을 담당했고, 그 과정을 수첩에 메모했다.

그의 메모에 따르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과욕을 부리지 않겠다”, “1972. 2. 닉슨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 만남은 어떤 합의보다 중요했으며,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어렵고 심각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협의해갈 것” 등을 언급했음을 알 수 있고, 그는 평양 백화원 2호각 281호실에 천해성 청와대 행정관과 함께 묵으며 정상회담 일정을 소화했음이 확인된다.

그의 메모는 남북정상회담 분위기에 대해 “허심탄회, 오해 풀고 신뢰 조성에 역점. 성과는 덤으로 생각. 54시간 체류 기간 중 11시간 대화”라고 적었고, 김 대통령의 발언을 4개 분야로 요약하면서 ‘의제 주도’라고 기록했다. ‘이봉조 판 김대중-김정일 대화록’인 셈.

스스로 ‘가장 힘이 컸던 시기’로 회고한 바 있는 NSC 정책조정실장 때는 6자회담까지 관할했고, 2006년 제15대 통일부 차관에 취임해 1년 7개월간 직무를 수행했다. 차관으로서 제1차 남북차관회담에 나서 제15차 장관급회담 개최와 평양 6.15통일대축전 남측 정부 대표단 참가, 비료 20만톤 지원 등의 합의를 이끌어낸 과정도 기록됐다.

통일연구원장을 거쳐 야인이 된 그는 흥사단 도산통일연구소 소장 등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고, 공직을 떠난 후 본격적으로 여러 언론에 기고한 글들은 이 책의 2부에 고스란히 실렸다.

“우리는 남북대화에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북대화의 재개 이것만이 그나마 우리가 11월의 날씨마냥 우울한 갈등과 고립에서 벗어나 2014년 새해를 밝은 마음으로 맞게 하고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통일뉴스>의 경우 20013년 11월 4일자 칼럼 ‘최근 한반도를 둘러 싼 정세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끝으로 그해 12월 ‘간암 판정’을 받고 “더 이상 기고를 이어갈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해왔고, 2014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문제의 근본을 직시하고 신중한 실리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남북관계의 안정을 위해 항상 대화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나아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구체적인 행동계획으로 옮겨 동북아 갈등 구조의 해결에도 기여해야 한다.” 그가 <국제신문> ‘시사프리즘’에 남긴 마지막 공개 기고문의 마지막 구절이다.

임동원 전 장관은 “내가 아는 고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바로 이러한(통일 업무 공직자의) 요건과 자질을 고르게 갖춘 뛰어난 통일 관료였다”며 “오늘날에도 그가 나와 함께 일하며 보여준 전문성과 정책 입안 능력, 협상 능력, 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대해서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회고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역시 추천사에서 “상아탑 속에서 이론적으로 쓴 글들이 아니고 통일 문제 최일선에서 복잡다단한 문제들과 부대끼면서 느낀 점, 아쉬웠던 점, 개선점들을 정리해 놓은 글들”이라며 “그저 그런 한 사람의 유고집이라고 쓰-윽 한번 훑어보고 말 일이 아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엮은 필자는 “분단의 역사에 가장 우선되는 시대정신은 통일”이고 “자주적인 평화 통일을 향해 실천한 시대정신이 바로 햇볕정책”이라면서 “그 성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뜻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떠난 고 이봉조 차관, 고인의 유지에 따라 생전의 가까운 지인들이 살아온 행적을 모아 훗날을 위한 자료집을 발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상사와 동료는 물론, 부하 직원들에게도 사리에 맞지 않거나 무리한 보고 또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거나 “이봉조 스스로는 배경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열심히 노력할 뿐이라고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는 등 연보를 비롯한 책 내용 곳곳에는 ‘인간 이봉조’의 면면도 녹아있다.

▲ 2009년 11월 13일, 임동원, 정세현,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이 재일 삼천리철도 도상태 이사장 일행을 초청해 도라산역과 판문점을 둘러봤다. 사진 맨 왼쪽이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 맨 오른쪽이 이봉조 전 차관의 파트너인 남상삼 삼천리철도 부이사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사족으로 이 책을 소개하는 기자 역시 재일동포 통일단체인 ‘삼천리철도’(이사장 도상태)를 취재하며 이봉조와 파트너인 남상삼 삼천리철도 부이사장의 교류를 지켜본 적이 있다.

남북철도 연결을 위해 해외에서 성금을 낸 삼천리철도가 정작 남북철도 개통식에 초대받지 못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임동원, 정세현,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삼천리철도 간부들을 초청해 도라산역을 둘러보았고, 삼천리철도는 이들을 일본 나고야로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이후 삼천리철도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봉조 전 차관과 남상삼 부이사장은 이 과정의 실무책임을 맡아 빈틈없이 일을 추진했고, 이봉조 전 차관은 나중에 한국을 방문한 남상삼 부이사장 부부를 안내해 서울 구경은 물론,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걷는 등 개인적으로도 도타운 친분을 쌓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상삼 부이사장이 2012년 6월 먼저 세상을 등졌고, 이봉조 전 차관 역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대북 밀사역을 담당했던 박철언 특보의 『역사를 위한 바른 증언』이나 임동원 전 장관의 『피스 메이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칼날 위의 평화』 등이 모두 남북관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들의 자필 원고라면, 이봉조 전 차관의 『이봉조의 통일 수첩』은 유고집이라는 점에서 아픔이 남는다.

‘이봉조 유족회’와 지인들은 고인의 2주기인 오는 15일 오후 5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메모리얼파크(포레스트헤븐 1계단 4-10)에서 추도 및 『이봉조의 통일 수첩』 헌정식을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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