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6일 북한의 수소탄 시험 전에 북한과 미국이 비밀리에 평화협정 논의를 진행했다는 보도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현지시간) 미국 고위급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북한의 핵실험 며칠 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북한이 한국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한 협정을 논의하는 데 비밀리에 동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WSJ에 따르면 북한의 평화협정 요구에 미국은 협상에서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중단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후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인해 이 같은 외교적 논의가 중단됐다고 합니다.

다 알다시피, 6자회담이 중지된 이후 북한은 미국과 평화협정 회담을 하자고 주장해 왔고 미국은 비핵화 회담을, 보다 정확하게는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조치를 먼저 취해야만 평화협정을 위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기에, 양자는 줄곧 평행선을 그어 왔습니다.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귀결된 이후부터 불안한 평화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려는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사실 평화협정 문제는 북한이 보다 적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최근에는 지난해 10월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에 응해 나설 때가 되었다”라고 공식 제안했으며, 같은 달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서도 “하루빨리 낡은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새로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하는 등, 본격적인 평화협정 공세를 펼쳐왔습니다.

지난 17일에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병행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해 주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위성 발사 이후 대북 성토와 ‘북한 비핵화’ 일색에서 평화협정을 꺼낸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WSJ 보도를 보면서도 몇 가지 의미 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미국의 선(先)비핵화 입장에 변화가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선 비핵화를 수용하면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비록 북한에 의해 거부되긴 했지만 이번에 평화협정 논의 안에 비핵화가 포함되면 괜찮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는 미국이 비핵화라는 전제조건에 얽매지 않고 조건이 충족되면 북한과의 평화협정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에, 미국이 기존 대북 정책 기조에서 한 발 물러선 것입니다.

또 하나 의미 있는 점은 그동안 북한과 미국 간에 물밑 대화가 지속돼 왔으며, 그 내용도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북한과 미국이 ‘뉴욕채널’이든 아니면 중국 등 제3국에서든 비공식 회담을 해왔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이번 북.미 간의 소통은 북한의 유엔대표부와 미 국무부 사이의 뉴욕채널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핵심은 한국전쟁 종식 논의까지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전쟁 종식이란 곧 북.미관계 정상화로 이어지고 북.미관계 정상화는 평화협정의 전단계로 되기에, 한국전쟁 종식 논의란 평화협정을 향한 매우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출발점이 되는 셈입니다.

딱한 건 우리 정부입니다. 정부 당국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정부는 비핵화 논의가 우선”이라면서 “평화협정은 미국과 북한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국이 주도적으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라고 밝혔지만 왠지 공허해 보입니다. 북한과 미국 간에 비밀리에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남북 간 연락채널이 모두 끊긴 지금 우리 정부는 미국만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딱해도 이만저만 딱한 처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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