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개봉한 <오빠 생각> 포스터. [사진출처-Daum영화]

영화가 끝나며 이 영화가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두 줄의 자막이 뜬다. 실화는 힘이 세므로 그 정도의 소개는 영화의 감동이 좀 더 여운을 남기는 데 효과적이다. 그런데 다시 한 줄의 자막이 덧붙여진다,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이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영화는 몇 컷의 자료 화면과 더불어 이 전쟁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해방과 더불어 미∙소의 점령으로 분단이 이뤄지고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어 전쟁에 이르게 되었다고. 문장은 시종일관 피동형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에서 오로지 살기 위한 본능으로 총검을 휘두르는 백병전의 참혹함이 화면을 채운다. 한상렬 소위는 살아남았지만 전쟁으로 가족도 동료도 모두 잃은 그에게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막막한 표정을 영화는 오래 주시한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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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한상렬의 가족은 인민군의 집단 학살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죄목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가 국군이 된 동기 역시 딱히 복수심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적군과 아군으로 구분되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한편이 되어야 하고, 어린 소년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총을 드는 마당에 한창 나이의 젊은 청년이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이 군인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순이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입에다 총구를 쑤셔 넣으니 살기 위해 한동네 청년을 밀고해 죽게 했다.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수시로 바뀌는 전황에 눈치껏 대처하며 살아남았는데, 철없는 순이의 실수가 그를 궁지에 빠뜨렸다. 자신이 살기 위해 죽인 청년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인다. 나와 같이 이 자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들도 다 빨갱이야! 이제 선량한 이웃들이 살기 위해 순이의 아버지를 죽일 차례이다.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 아니라, 전쟁에서는 이쪽 편이 아니면 저쪽 편이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팔을 잃은 빈민촌 대장 갈고리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다. 성한 사람도 살기 힘든 피란지에서 장애를 가진 그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살겠는가. 그는 버려진 고아들을 끌어모아 그들 위에 군림하며 고사리 손의 노동을 착취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당당하게 반문한다. 살아남아야 하는데 아이, 어른의 구별이 의미가 있냐고.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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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묻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왜 이 전쟁에 휩쓸렸는가. 이것이 우리의 잘못인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고아로 구성된 어린이 합창단의 존재가 실화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전쟁의 발발과 거기 휩쓸린 사람들의 비극이 그들 자신의 의지나 목적의 산물이 아니었음 역시 실화라는 것처럼 들린다.

좌익도 우익도 선택한 적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이념과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앞부분이 잘린 영화를 감상하게 된 관객들처럼 어리둥절한 채 동족상잔이라는 희대의 참상 한가운데 던져졌으며,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우고 서로를 죽였다.

그것이 이 전쟁의 본질이자 실제 이야기라는 영화의 인식은 적대감과 피해의식으로 얼룩진 이 전쟁에 대한 시각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 [사진출처-Daum영화]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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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고아란 진부한 소재이다. 거기다 휴머니즘의 깃발이라도 하나 꽂으면 손쉽게 눈물과 감동의 드라마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 착한 영화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전쟁터, 그곳에서 시작된 희망의 노래’라는 포스터 문구는 환상에 불과하다. 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희망의 노래가 아니다. 아이들은 애초에 인민군 선전대로 이용당했고, 이제는 국군의 위문공연단으로 위험한 전선을 누벼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전쟁이 집어삼킨 ‘모든 것’에는 미래의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 윤리나 도덕같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소중한 가치들도 포함된다. 생존 본능에 지배되는 전쟁터는 온갖 술수와 부정과 비리가 판치고, 아군 아니면 모두 적군인 생존 게임의 장에서 연민이나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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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은 아이들을 사지로 파견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수용한다.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처음엔 어른들이 시키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던 아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보호처인 이 어린이 합창단이 해체되지 않으려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 위험한 공연을 자원하고, 나중에는 자신을 짓누르던 트라우마의 벽을 넘어 자신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을 위해 노래할 줄 알게 된다. 즉자적 존재에서 의지적 존재로 아이들은 조금씩 성장해 간다.

다른 인물들도 전쟁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무력하게 가족을 잃은 한상렬은 눈앞의 비극에 가슴아파하되 개입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하는 순이와 동구를 그저 보기만 한다. 세상은 그의 힘으로 개선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의지 충만한 고아원 자원봉사 교사를 만나고 자신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보면서 그는 흔들린다. 그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합창단을 해체하려 할 때, 그 울타리마저 없으면 굶주림과 외로움이란 더 큰 공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에 맞서자, 그는 깨닫는다. 누군가를 보호해 줄 우산이 없을 때는 미안해하고 자책할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그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갈고리는 또 어떤가. 나라에 바친 팔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이 ‘병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그의 현실을 가려주지는 못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그악스럽게 불법과 악행을 일삼지만, 자기보다 더한 나쁜 놈, 생존이 아니라 탐욕과 향락을 위해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악인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현실이 제공하는 타자와의 교감 또는 대립은 때로 선한 의지를 북돋우기도 하고 때로 악행에 개심의 기회를 주기도 하면서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성장하게 한다. 이 영화의 착한 점은 전쟁고아 합창단의 현실을 미담으로 포장하지 않는 대신, 고난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 [사진출처-Daum영화]
▲ [사진출처-Daum영화]

전쟁은 끝났다. 이제 다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정말 전쟁은 끝난 것인가? 아니, 휴전이 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평화는 살얼음 위에 놓여 있으며, 전쟁의 역사는 민족 전체의 거대한 트라우마의 원천이 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의 의식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 원래 그 시작은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었으되 4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을 때는 이 전쟁은 우리들의 전쟁이 되었다.

영화는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는 한상렬의 입을 빌어 조금 다른 해법을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 걸 가지고 왜 자기들끼리 싸우냐고. 그렇게 이기고 싶으면 그런 의미 없는 싸움 대신 다른 걸로 경쟁하라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상대방의 노래를 신경 쓰고 의식하면 상대방의 음을 따라가게 되어 자기 노래는 망치고 만다. 아이들은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며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서로 다른 노래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화음이라고 한상렬이 말한다. 멋진 화음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싸움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이 말은 이렇게 들린다, 통일로 가는 길은 화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적의 미사일을 요격할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국방비를 쏟아붓고, 적이 긴장을 고조시켰다며 이에 지지 않을세라 확성기를 틀어대고, 또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인권법이니 뭐니 남의 훈수 두기에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나의 체제를 더 충실하게 다져나가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길이라고. 그리고 남과 북의 서로 다른 노래, 서로 다른 키의 음을 굳이 맞추려고 하지 말라고.

▲ [사진출처-Daum영화]

전쟁의 참상이니 하는 말은 이제 너무 식상한 것 아니냐고, 이런 감상적인 접근법 대신 이젠 좀 더 이성적인 연구와 탐색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북 경색 국면이 오래 지속되고, 대결 전략 위주의 호전적인 무리들이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이즈음의 상황을 볼 때, ‘전쟁은 미친 짓이다’라는 상식적 구호조차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격언이 되는 듯하다. 이 착한 영화가 전하는 아주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쟁 반대로 끝맺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찬찬히 곱씹어 본다. 조금 다른 것이 이렇게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내다니!

야비하고 비굴하되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려는 갈고리의 발버둥을 보여주는 이희준의 연기는 이 악인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연기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진심을 그대로 느끼는 듯한 임시완의 연기는 이 진지하고 단정한 배우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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