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북미 평화협정, 관계정상화 되면 핵문제 해결됩니다"

10월 20일(월) 맑음. 북한 방문 17일째. 아침 일찍 산책을 나섰다. 대동강둑을 따라가는데 학생들이 길가 난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걸어가는 젊은이도 보인다.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하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닙네다.” 동문서답을 한다. 남한에서는 학원에 다니거나 가정교사를 두는 등, 과외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이쪽도 그런 경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없습네다.” 간단히 대답한다.
 
“소년단을 선발할 때부터 경쟁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제도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네다. 우리 아이들은 조국을 위해 공부한다는 사상이 투철합네다.” 김 참사가 강조하여 말한다. 그러고 보니 학교마다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라는 구호가 정문 부근에 크게 붙어있던 기억이 난다. 개인이 아닌 ‘조국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개인의 연구 성과가 즉시 공유 된다고도 했다.
 
“그렇게 연구한 결과로 핵실험도 하게 되었나 보지요?”
다소 민감한 문제를 언급했더니만, 김 참사가 약간 긴장한다. 얘기가 나온 김에 화제를 이어갔다.

“그런데 핵실험 때문에 한반도 정세가 얼어붙지 않았습니까.”  
“선생님, 기건 모두 미제국주의자들 때문입네다. 생각해 보시라요. 남북이 함께 유엔에 가입한 후, 남조선은 소련 중국과 수교를 하고 북조선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나란히 국제사회 일원이 되기로 했지 않았습네까. 지금 남조선은 중국이나 소련과 잘 지내는데 미국은 아직까지 북조선을 적대시하고 있지 않습네까.”

“미국은 핵 문제가 해결 되면 북한과 수교를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거짓말입네다. 핵이 없던 시절에 그들은 다른 구실로 우리 북조선을 따돌리고 하지 않았습네까. 우리 조국은 누가 욱박지른다고 무릎을 꿇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닙네다.”
“ .....”

“ 기러고 말입네다. 우리는 미국에게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서 전쟁상태를 종식시키자고 하지 않습네까. 기런데 미국이 반대하고 있지 않습네까. 우리가 틀렸습네까?”
“ 평화협정은 이해가 되지만 남한 주둔 미군철수 요구로 이어질까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요.”
“기러니까 협상이 필요한 거 아닙네까.”
“결론적으로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하고, 관계정상화 되면 핵문제는 해결되는 겁니까.”
“기렇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게 기거 아닙네까.”

정책결정권자는 아니지만, 북미 평화협정과 관계정상화가 핵심과제라는 김 참사의 얘기는 우리가 북한 측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한겨레신문 인터뷰기사를 보았다. 제11회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서 진창이 중국 연변대학 국제정치연구소장도 핵문제의 해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북핵과 관련한 장기적인 해법을 생각할 때도 이제 남은 길은 하나다. 핵심은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지 않으면 핵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같은 강압정책을 계속하면 김정은 정권은 핵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수백 가지도 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개혁개방으로 나오면 북한도 경제적 발전을 위해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고 타협해야 한다.
 
북한에 시장경제의 영향력이 커져 사유방식과 생산양식이 바뀌고 있다. 경제협력으로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피동적인 김정일 시대와 달리 김정은은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선물관 관람

9시에 국가선물관을 향해 출발했다. 국내외 동포들이 김일성 김정일에게 준 선물을 전시해놓은 곳이라 했다. 전에는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선물을 함께 전시했는데, 그곳에 있던 물건 중 ‘동포’들이 준 선물을 전시할 전시관을 따로 평양 인근에 만들었다고 한다.
 
선물관에 도착. 안내원이 앞장선다. 전소향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김 참사가 시인이라고 덧붙이기에 문학공부를 했냐고 물었더니 김일성대학 문학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문학대학 전체 학생 몇 명이냐고 물었다. 800명 정도 된단다. 나이는 26살. 시집을 냈다고 하기에 한 권 얻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기만 한다.
 
선물관 건물은 2006년에 짓기 시작하여 2012년에 개관을 했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다.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고 미리 주의를 준다.
 
선물에는 기증한 사람의 이름과 날짜가 적혀있다. 한겨레신문 창간호 동판이 있고, 김우중이 준 전자제품, 정주영이 선물한 999그램 금송아지, 그리고 1998년 6월에 기증했다는 리무진 한 대가 놓여있다. 전두환, 노태우가 준 자기도 전시되어있고 김대중이 선물한 ’실사구시‘ 글씨가 쓰인 접시도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 아래층으로 옮겨 다니며, 차근차근 돌아가면서 관람을 한다.
 
노무현 부부가 선물한 다기, 문선명 교주가 금으로 된 조선지도, 동아일보 김병관 사장이 ‘보천보전투(37년) 원판 동판’을 금으로 만들어 기증했다. 구본모, 이건희 등 기업인이 보낸 선물이 보인다. 정몽준은 핑 골프채를 선물했다. 박정희가 보낸 선물도 있고, 박근혜가 2002년 5월에 선물한 귀중품 함도 보인다.
  
단체로 온 군인들, 아주머니들이 줄을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다니고 있다. 
  
여러 계층의 인사들이 보낸 선물들이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보냈을 물건들이다. 먼 훗날 좋은 사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국 대통령도 내외국인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을 성 싶다. 그런데 그런 선물을 전시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   
 
관람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건축현장에 붙어있는 ‘천년책임’이라는 구호가 눈에 띈다.

▲ 국가선물관 안내원 전소향. 시인이라고 했다. [사진제공-정찬열]

 

옥류관에서 쟁반국수를 먹다

점심을 먹으러 옥류관에 갔다. 북한 방문 17일째인 오늘에야 옥류관 국수를 먹게 되었다. 건물은 함흥에 있는 신흥관과 비슷하게 전통 기와집 모양이다. 모양이다, 는 말은 우리 전통기와집 모습을 갖추었지만 목조 건물이 아니라 시멘트와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라는 얘기다.

식당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김 참사가 옥류관에서 하루에 1만 명이 국수를 먹는다고 설명해준다. 1만 명? 사람들이 몰려오는 걸 보니 과장이 아닌 모양이다. 평양 물냉면의 원조가 옥류관이 아닌가. 그 명성만으로도 사람이 몰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적이는 옥류관 앞. 섯! 표지판이 보인다. STOP, 대신에 사용하는 푯말이다.
 
2층으로 안내를 한다. 바닥은 나무로 깔았고 천정에 샹데리아가 달렸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먹는 방이 다르다고 한다. 2층 홀이 꽉 차있다. 우리 일행이 앉은 바로 옆자리에 미국에서 온 동포가 고향에 있는 가족과 상봉하여 함께 점심을 먹고 있다. 서로 많이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아도 서로 혈육인 것을 알아볼 수 있겠다. 피는 못 속인다거나, 씨 도둑질은 못한다, 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김 참사와 방 동무, 그리고 나, 셋이서 자리를 잡았다. 차 한 잔과 녹두지짐 한 접시가 나온다. 그 옆에 ‘위생저가락’이 놓인다. 젓가락이 아닌 저가락이다.
 
음식을 주문할 순서다. 안내 아가씨가 다가와 “냉면은 메밀로 만든 국수이고, 쟁반국수는 메일과 녹말을 섞어 만든 국수”라고 소개한다. 녹말이 뭘 의미하느냐고 물었더니 감자가루라고 한다. 어떤 게 더 맛있냐고 물었다. 안내원이 빙긋 웃는다. 둘 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쟁반국수를 주문하기로 했다. 김 참사가 나에게 쟁반국수 2백 그램이면 충분할 거라고 한다. 자기네들은 쟁반국수 300그램씩을 주문한다. 
 
쟁반국수가 나왔다. 쟁반에 담아 나온 국수다. 국수 위에 소고기와 돼지고기 몇 점이 놓이고, 닭고기 대여섯 점, 계란과 오이 몇 점을 놓은 다음, 배를 썰어 고명을 얹었다. 자르지 않고 먹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쯤은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는 터였다. 쟁반에 그득히 담긴 국수 분량이 많아 보여 다 먹을 수 있을까 싶다. 국물을 한 모금 맛보았는데 맛이 그만이다.

국수 한 젓가락 맛을 보니 입에 척 감기는 느낌이 독특하다. 음... 이 맛이다. 머리를 숙이고 먹기 시작했는데 그 많은 국수를 금세 비웠다.
 
점심을 끝내고 나니 옆 자리가 비었다. 꽉 차 있던 자리가 빈 걸 보니 점심시간에 손님이 함께 몰리는 모양이다. 쟁반국수를 먹었으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옥류관 냉면을 먹으러 다시 와야겠다. 만약 들르지 못한다면 평양을 다시 방문해야 할 이유 하나를 남겨놓은 셈이 될 성 싶기도 하다.

복도를 내려오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애가 날 보더니 방긋 웃는다. “아이가 몇 살 먹었나요?” 물었더니, “돌 반 입네다”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니, 이쪽 사람들의 보통 말씨인데 그렇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 옥류관 앞.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차 한 잔과 녹두지짐 한 접시가 나온다. 위생저가락이 놓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옥류관 냉면. [사진제공-정찬열]

 

▲ 옥류관 2층 식당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 북적이는 옥류관 앞. 섯! 표지판이 보인다. STOP, 대신에 사용하는 푯말이다. [사진제공-정찬열]

   
평양악기점 방문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악기점이 보인다. 김 참사에게 한 번 들어가 보자고 했다. 퉁소나 피리, 대금 같은 게 있으면 하나 사가지고 갈까 싶은데 그런 악기는 없다고 한다. 이북에는 대나무가 없기 때문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거문고가 보이기에 가격을 물어보니 180달러라고 한다. 이북에서 창안하여 개량한 거문고인데, 줄이 더 많아진 거문고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음악성이 높고 정교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한다. 통상 가야금은 열두 줄 거문고는 여섯 줄이라는데 줄이 많아지면 소리가 가야금에 가까워지는 걸까? 청아한 듯 둔탁하고 어두운 듯 상쾌한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벽에 ‘주간공연일정계획’이 붙어있다. 평양대극장, 동평양대극장, 인민극장, 평양교예극장, 모란봉 극장 등, 각 극장에서 어떤 단체가 어떤 공연을 어느 요일에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안내하고 있다. 피바다 가극단, 만수대 예술단, 국립연극단, 평양교예단, 국립교양악단, 국립민족예술단, 보통강교예단 등의 단체 이름이 보인다. 공연 제목은 혁명가곡, 종합교예, 음악회, 음악무용 종합 등이다. 악기를 취급하는 곳이라 각 공연에 맞춰 악기를 보급하거나 준비해주는 일을 하는 모양이다.
 
악기점이지만 한국이나 미국처럼 많은 악기를 비치해 놓고 고객이 와서 사갈 수 있는 곳은 아닌 모양이다. 악기의 종류도 많지 않고, 준비되어 있더라도 몇 개 되지 않아 보인다.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아이들 몇이 깡충깡충 뛰어간다. 저희들끼리 뭐라고 장난을 치면서 한 녀석이 놀리는 아이를 쫒아 가면 다른 녀석들은 도망을 간다.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아이는 노랑색 자켓에 빨강색 백팩을 맸다. 미국 우리 마을에서 보았던 어린애와 옷차림이 비슷하다.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이 참 귀엽다. 

▲ 주간공연일정계획. [사진제공-정찬열]

 

▲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 집에 가는 모양이다. [사진제공-정찬열]

 

창전거리에 있는 살림집을 방문하다

오후에는 창전거리에 있는 살림집을 한 번 가보자고 한다. 사리원 부근 협동농장 주민 아파트를 방문한 후, 도시 주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터였다.
 
창전거리 아파트면 지은 지 오래지 않은 고급아파트다. 이곳 아파트가 어느 정도 규모냐고 물었더니 3천 세대 정도라고 한다. 3천 세대? 꽤 큰 마을이다.

2층 1호다. 주인 김혁 씨가 맞아준다. 나이를 물으니 서른 다섯이라고 한다. 아내는 아이가 아파 병원에 데리고 갔다고 한다.
 
거실에 소파가 놓여있고 바로 위 벽에 표창장과 사진이 걸려있다. ‘로력영웅표창장’이다. 평양방직공장 직포공 문강숙, 이라고 되어있다. 문강숙이 아내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두 부부가 김정숙평양방직공장에 함께 근무한다고 했다. 아이는 한 살 일곱 달인데, 이름이 김복동이라고 한다. 이름이 좋다고 말했더니 빙긋 웃는다. 전화기 한 대가 거실 바닥에 놓여있다. 
 
아파트는 방 다섯 개, 화장실, 부엌, 식당 거실로 되어있는데 140평방미터라고 한다. 평수로 치면 몇 평이나 될까. 방을 좀 돌아볼 수 있냐고 묻자 앞장서 안내를 한다. 아이 방은 작은 침대가 있고, 그 옆에 놀이기구들이 놓여있다. 비행기, 오뚜기, 꼬마 인형 같은 장난감이 정리되어 있다. 침대 위 벽에 아이와 엄마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서재는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책상 위에 사전 몇 권과 라디오가 보이고, 그 위로 김일성 사진과 함께 어록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방 하나에는 “당이여 그대는 어머니”라는 족자 하나가 달랑 걸려있다.  
 
부엌, 안방, 화장실, 등을 돌아보았다. 단촐하고 꾸밈없는 소박한 살림살이다. 방이 다섯 개라 하지만 모두 자그마한 넓이다.
 
김정은 부부와 이집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거실 벽에 걸려있다. “2012년 원수님이 래방하셨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소개한다. 원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고 물었다. 원수님께서 아들이면 좋겠나 딸이면 좋겠나 물으셔서, 아들이건 딸이건 건강한 아이면 좋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내 얘기를 꺼낸다. 어릴 적 고아로 자라 중학을 졸업한 후 입사했는데, 직장에서 영웅칭호를 받을 만큼 열심히 일했고, 지금은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이라고 한다. 남한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자리다. 어떻게 그런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얘기를 시작한다.
 
본인은 함경남도 북청읍 출신이라면서 북청을 아시냐고 묻는다. 그곳 출신이 생활력이 강한 분들이 아니냐고, 남한에서는 북청하면 ‘북청물장수’가 떠오를 만큼 많이 알려진 지역이라고 대답했다. 이준 열사의 고향이라고 덧붙인다. 그 사실은 처음 알았다.
 
북청에서 중학을 졸업한 다음 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후, 김책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여 2005년 졸업했다고 한다. 대학생 때 신문기사를 보고 지금 아내를 공장으로 찾아 갔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을 보고 “나를 만나러 온 남자는 많다, 그리고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결혼할 수 없다”며 돌려보내더란다. 그러면서도 “기다릴 수 있으면 기다리라”고 한 가닥 미련을 남기더란다. 그 후,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3년 간 교제한 다음 정이 들어 결혼을 했다고 한다. 재미있지 않는 연애담이 있겠는가마는 사연이 재미있다. 용자취미(勇者取美), 용기 있는 사람이 원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방문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문짝에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있다. “확인 합시다! 가스 불, 전기, 물?” 집을 떠나기 전에 다시 확인하라는 의미일 터이다. 
 
나오면서 보니 복도에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안내판이 걸려있다. 안내판 중앙에 “평양시가 모든 면에서 전국의 모범이 되자!”라는 말이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혀있다. 새소식, 란에는 “20층 2호 리종기 할아버지! 잔디밭 물주기 사업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일반인의 자랑, 란에는 해당 아파트 호수가 소개되어 있다.
 
바로 옆에 ‘선군생활 문화 모범가정 수여기준’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사회의 세포인 가정을 철저히 혁명화 하여야 한다. 시대적 요구에 맞게 살림집을 문화적으로 꾸리고 거두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살림살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원숙하게 풀어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옷차림과 몸단장을 바로하고 다니도록 하여야 한다. 언어생활의 문화성을 높이고 례의도덕을 자각적으로 기켜야 한다. 식생활의 문화수준을 높여야 한다. 유휴자재수매사업과 저금사업에 적극 참가하여 세대앞에 맞겨진 경제과업을 100% 수용하여야 한다. 혁명적경각심을 높이고 거주, 퇴거, 숙박 등록질서를 잘지켜 한 건의 사고도 없어야 하며 민간반 항공훈련에 적극 참가하고 가정의 반화학가방을 지참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기준을 정해 놓고 절차에 따라 모범가정을 선정하는 모양이다. 하나씩 살펴보니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 전반에 관한 규범이다. 상을 수여하는 기준이니 강제조항은 아니겠지만 큰 소리로 부부싸움을 한다거나, 눈에 거슬리는 옷차림을 하고 나다닐 수는 없겠다. 경우 없이 떠들고 이웃의 불편이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는, 일부 남녘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사리원 부근 농촌에서 협동조합원의 집을 방문했던 얘기는 이미 전해드렸다. 생각해보니, 그 곳과 이곳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성싶다. 농사짓는 집과 도시 살림집은 그 환경부터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 창전거리는 평양에서도 알아주는 지역이니까. 남한도 마찬가지다. 시골집과 서울의 고급 아파트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 창전아파트 2층 1호 주인 김혁 씨와 함께. [사진제공-정찬열]

 

▲ 복도에 걸린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안내판. [사진제공-정찬열]

 
평양방직공장 방문
 
평양방직공장은 대동강변에 있었다. 오늘 우리가 방문했던 살림집 주인 김혁 부부가 근무하는 공장이다.
 
안내원이 홍보관에서 안내를 시작한다. 1948년 세워진 이 공장은 현재 종업원이 8,500명, 3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북한의 5대 방직공장 중 가장 큰 곳으로 국내 의류의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공장의 역사, 생산량 등의 통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1967년 홍수피해가 심각했으나 곧 복구되었고, 86년 서해갑문이 완공 된 후 홍수로부터 안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시된 사진 가운데 김혁 씨 안방에 걸려있던 것과 같은 사진이 보인다. 김정일을 비롯 김혁의 부인 문강순과 공장 직원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 바로 옆에 문강순 인터뷰 기사가 액자에 넣어 걸려있다. 2011년 11월 11일자 로동신문이다. 전면 기사다. 경공업 전선의 미더운 새 세대 선구자, 라는 제목 아래 ‘평양방직공장 직포공 문강순 동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사진이 함께 나와 있다.
 
기사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4만 2,710m! 이것은 직포공 한 명이 2년 동안에 짜야할 천이다. 그러나 평양방직공장의 한 처녀는 그것을 단 1년 동안에 짰다. 그녀는 그렇게 지난 13년 동안 해마다 년간계획을 두 배로 완수하여 총 555,234m의 천을 짜냈다. 이처럼 많은 천을 짜고도 처녀는 자기가 한 일이 크다고 생각할 줄 모른다...”

신문 한 면이 그녀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 신문 기사를 보고 김혁 씨가 아가씨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홍보관 귀퉁이에 “그이 없인 못살아”란 시 한 편이 걸려있다. 다가가 읽어 보았다.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가사이다. 1절부터 3절까지인데 매 절마다 후렴이 있다.

“친근하신 그이의 정 가슴에 흘러 / 자나깨나 그 숨결로 따뜻한 마음 / 하늘같은 인덕과 믿음에 끌려 / 우리 모두 따르며 사네 // (후렴) 그이 없이 못살아 김정은 동지 / 그이 없인 못살아 우린 못살아 / 우리의 운명 김정은 동지 / 그이 없으면 우린 못살아....”
 
안내원이 기숙사를 둘러보시겠냐고 묻는다. 공장건물과 떨어져 있는 7층 건물이다. 침실, 식당, 도서관, 병원, 매점, 옷수리점, 목욕탕 등 부대시설을 둘러보았다. 꽤 넓고 쾌적한 휴게실 한쪽에 아까 보았던 “그이 없으면 못살아”라는 노래가 걸려있다.
 
직공은 중학을 졸업 한 처녀들이 많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본인이 원하면 계속 근무할 수 있고, 남편이 지방출신이면 평양으로 불러서 함께 생활할 수도 있다고 한다. 6개월 정도 교육을 시킨 다음 현장에 배치한다고 했다.

▲ 문강순 직포공의 전면 인터뷰 기사가 실린 로동신문. [사진제공-정찬열]

 
청춘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숙소로 돌아와 7시경 저녁 식사를 마쳤다. 혼자서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잔디밭가 시멘트 블럭에 관리원 이름들이 써 있다. 그 부근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의 이름인 성 싶다. 젊은 남녀 둘이 지나간다.
 
 “야, 내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압네? 혈압치기 직전이라!”
 “혈압치긴... 이기나 좀 무어라.”

전화를 받지 않아 화가 났다는 청년에게 시치미를 뚝 떼면서 ‘이거나 좀 먹어라’고 처녀가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 청년에게 건넨다. 저렇게 은근히 감싸주는 여인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녹아나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청춘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뭐라 소곤거리며 나란히 걸어가는 두 젊은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누군가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시절이. 장갑을 한 짝씩 나누어 끼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잡고 찬바람 부는 거리를 추운 줄도 모르고 밤새 걸었던 추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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