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 성산고급중고등학교 방문.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사진제공-정찬열]

세포등판 가는 길

10월 16일(목) 맑음. 북한 방문 13일째다. 아침 6시경, 속이 좋지 않아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는 얘기를 듣고 김 참사가 내 방에 건너왔다. 어제 추운데 앉아 점심을 먹어 체한 모양이라며 마사지를 해준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문가에게 배웠다고 한다. 속이 한결 편하다.
 
오늘은 오전에 고산과 세포등판을 다녀 온 다음, 오후에 송도원 야영장을 둘러보고 나서 함흥에 도착해야 한다. 빡빡한 일정이다.  
 
식당 창가에 앉으니 원산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저쪽 길게 보이는 곳이 명사십리가 있는 갈마반도이며 등대가 있는 작은 섬은 장덕섬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티비에서는 ‘우리 김정은 장군’ ‘그날의 15분’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 등의 노래가 자막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아침은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때웠다.   
 
아침 산책 겸 원산항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 몇 척이 한가하게 떠 있을 뿐, 뱃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인데 시내도 사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숙소에 돌아오니 운전사 방동무가 차를 닦고 있다. 여관 앞뜰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익었다.

▲ 아침 해뜰 무렵의 원산 항구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고산을 향해 출발. 금강산 가는 길로 10여분쯤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신작로가 시작된다. 우둘투둘한 길을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가랑비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갑자기 길이 막힌다. 주민들이 신작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차를 되돌려 다른 길로 가야 한단다. “고산과수농지건설전투장”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고산 과수농장 지역인데 3천 정보가 넘는다고 한다. 오는 길에 들리기로 했다.   
 
차창을 통해 마을 풍경이 스친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농가 지붕 위에 콩대를 말리고 있다. 야트막한 뒷산은 개간하여 층층이 밭을 만들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들판은 한가하다.
 
빨강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군인들이 도로 포장공사를 하고 있다. 북한은 저렇게 군인들이 평시에는 산업전선에 동원되느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더니, 필요하다면 언제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군인들이 고생이 많다고 하니, 누구나 다 병사 시절을 거친다고 말을 받는다.
 

▲ 주민들이 길을 고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돌담으로 둘러싸인 농가 지붕 위에 콩대를 말리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군인들이 도로포장공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비가 그쳤다.  ‘풍산’이 들어간 간판이 여기저기 보인다. 풍산읍인 모양이다. 진도를 말하면 진돗개가 떠오르듯, 풍산 하면 풍산개가 생각난다. 풍산개 세 마리면 호랑이도 잡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사냥개로 유명하다는 얘기일 터이다. 옛날 이런 산악지대에서 개를 앞세워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모양이다. 당연히 좋은 사냥개가 필요했을 법하다. 그 좋은 혈통을 계속 이어와 오늘날 풍산개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진돗개를 길렀다. 녀석은 저녁이 되면 토방 앞을 떠나지 않았다. 눈보라 치는 겨울, 새벽에 일어나 보면 목덜미에 눈이 수복이 쌓인 채로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진돗개를 구해서 길렀다. 두더지가 뒷마당을 헤집어 놓아 애를 먹던 어느 아침, 진돌이가 두더지를 잡아 뒷문 앞에 물어다 놓았다. 어느 날은 새를 낚아채서 잡아놓기도 했다. 주인에 대한 충성과 사냥 감각은 비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       
 
소를 두 마리씩 묶어, 세 쌍이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쟁기질을 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모양이다. 남쪽은 쟁기로 논밭을 갈 때면 소 한 마리에 쟁기를 채워 부리는데, 북쪽은 두 마리를 함께 묶어 쟁기질을 하는 모양이다. 지나치고 나서야 사진을 한 장 찍어두면 좋았을 걸 후회가 되었다.
 
반대편 쪽에서 오던 버스 한 대가 스쳐 지나간다. ‘원산-관산’ 행선지가 앞 유리창에 붙어있다. 원산과 관산 사이를 운행하는 노선버스인 모양이다. 평양 아닌 지역에서 노선버스는 처음 본다. 차에 탄 사람은 많지 않다. 열 명 쯤이나 될까
 
밭에 배추가 싱싱하게 여물었다. 이곳에서 김장은 공동으로 하는지 세대별로 하는지를 김 참사에게 물었다. 배추와 양념을 나누어 주면 가정마다 따로 김치를 담근다고 한다. 공동으로 김치를 담가 나누어 먹는 게 시간도 절약하고 효과적인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각 가정마다 식구들이 좋아하는 맛이 있을 텐데 거기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게 좋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막대기로 콩타작을 하고 있다. 남한의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남쪽에서도 이맘때쯤이면 들에서 콩을 거둬들여 햇빛 좋은 날 마당에 널어놓은 다음, 바삭 하게 마르면 저렇게 막대기나 도리깨로 콩타작을 했다. 콩은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다. 마루 밑이나 고무신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수채구멍으로 숨어버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눈여겨 본 시인이 시 한 편을 썼다. 김용택 시인이 쓴 <콩, 너는 죽었다>란 시다.

“콩타작을 하였다 /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 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 콩 잡으로 가는데 / 어, 어, 저 콩 좀 봐라 /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 / 콩, 너는 죽었다.”  

그랬다. 사면팔방으로 튀어 달아난 콩을 쓸어 모아 놓으면 마당 가운데 수북이 쌓였다. 그 콩이 콩나물도 되고 콩가루도 되고, 우리들의 공책도 연필도 되었다. 저기 저렇게 콩을 두드리는 아주머니도 그런 오지게 좋은 순간들을 생각하며 콩타작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방송선전차 한 대가 지나간다. 차에 마이크가 설치되어있다. 이곳저곳 다니며 공지사항을 알려주는 차인 모양이다.

세계 제일 목장을 꿈꾸는 세포등판 

▲ 세포군청. 지붕에 농산물을 말리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세포등판이 멀지 않았다고 운전사 방 동무가 말한다. 세포등판은 휴전선에서 직선거리로 1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니 남쪽의 철원지방과 가까운 곳이다.
고원지대라서 눈과 비가 많고 바람이 워낙 심하게 부는 곳이라서 세포, 즉 눈포, 비포, 바람포, 세 가지 포탄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세포군청에 들렀다. 트럭 한 대가 마당에 서 있고, 지붕 위에는 농산물을 말리고 있다. 김 참사가 안에 들어간 사이 부근을 둘러보았다. 읍내거리는 비교적 조용하다. 자동차는 보이지 않고 3층 아파트가 길 따라 늘어서있다.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를 포함한 주민 몇 명이 곡식자루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외지사람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건설지휘본부 설계책임자가 차에 동승하고 안내를 시작한다. 정혁삼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풀밭이 조성된 언덕에 올라갔다. 사방의 경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세포등판은 강원도 평강군, 이천군, 세포군 세 곳에 걸친 넓은 지역인데, 5만 정보의 땅에 대규모 목축장을 건설 중이라고, 개요를 얘기해준다. 해발 620미터인 이곳은 바람, 비, 눈이 많고 땅이 척박하여 풀이 자라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지만, 토질을 개선하고 이곳에 알맞은 품질의 풀을 심어 4만 정보의 자연 풀판과 1만 정보의 인공풀판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만든 풀판에 비육우, 젖소, 염소, 등의 가축을 길러 세계 제일의 축산 농장을 건설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표란다. 인공풀판은 건초를 만들어 겨울철 풀이 없는 동안 가축을 먹일 사료를 준비하는 것이고, 자연풀판은 풀이 자라는 계절에 방목할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현재 세포군 인구는 3만정도인데 2만여 명의 돌격대원들이 지원하여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돌격대가 무얼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각 지방, 직장 단위로 이 일에 자원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2012년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2015년 10월 10일 이전에 마칠 예정이라고 했다. 이 사업이 완공되면 2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길러 고기와 우유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각종 축산가공제품까지를 이곳에서 생산해낼 것이라고 한다. 현재 가축은 몇 마리정도 기르고 있냐고 물었다. 양이 만 마리 정도, 소가 천 마리정도라고 한다. 축산 연구소, 축사, 종축장, 종업원 살림집, 학교를 포함한 후생시설과 지원시설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제일 큰 목장은 뉴질랜드에 있는 마운트 펨버 스테이션(Mt, Pember Station) 목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규모가 272,420,000평방미터(824,070,500평)으로 세포등판 490,000,000평방미터(148,225,000평)의 반 정도란다. 세포등판 목장이 완공되면 명실상부한 세계 제일 목장이 된다. 남한의 대관령 삼양목장이 6백만 평으로 동양 최대 규모인데, 그것의 25배 넓이다.
 
대관령 삼양목장에 년 평균 50만 명의 관광객이 온다고 한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주위의 금강산 등과 연계한 관광단지로 개발을 해도 좋겠다.
 
‘성산원’이란 건물로 안내한다. 이발소와 이용소, 그리고 목욕탕이 있는 건물이다. 새 의자가 들어와 있는데 아직 개소식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목탄차를 보다  

▲ 드넓은 벌판에 목초를 조성해 놓았다. [사진제공-정찬열]

 

▲ 목초지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 목탄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안내자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저만치 신작로에 트럭이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목탄차다. 얘기도 듣고 책에서도 읽어보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저렇게 나무를 태워 자동차를 움직일 수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목탄차를 보면서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가 중학교 시절, 시골 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 병원비며 약값이며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새마을 작업장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채석장에서 돌을 담아 머리에 이고 신작로에 나르는 일이었는데, 하루 일당 밀가루 한 포대를 준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사모님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려느냐”고 하자, 젊은 어머니는 “행팬 따라 살아야지, 사모님이 뭐 밥 먹여주나요”하며 여러 날을 공사판에 나가 돌을 나르며 밀가루를 받아 오셨다. 그런 억척스런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우리 일곱 남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이따금 돌이켜보곤 한다. 
 
개인이건 국가건 스스로 살 길을 찾으면 어떻게든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목탄차 얘기는 여러 번 들었다. 1993년 출판된 조광동 씨가 쓴 북한 방문기에 “농촌길을 갈 때 보기 드문 달구지를 본다든지 자동차가 대용연류를 썼기 때문에 높은 데 올라갈 때 힘들어 한다든지 이런 사소한 것을 과대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라는 북한 관료의 발언이 소개되었고, 근래 출판된 신은미 씨의 책에도 그 얘기가 나와 있다. 그 외 몇 분으로부터도 들은 적이 있다. 
 

▲ 주민들의 살림집을 포함한 각종 부대시설. [사진제공-정찬열]

성산고급중고등학교 방문  

세포등판에 있는 성산고급중고등학교를 방문했다. 학교를 방문하고 싶다는 내 의견을 수용하여 이 학교를 찾아보도록 주선한 모양이다. 양쪽 벽에 크게 쓴,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 “모두다 최우등생이 되자”는 글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본관 앞에 “우리는 하나를 배워도 조선혁명을 위하여 써먹을수 있는 산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 김정일”이라는 글이 적힌 석판이 서있다.
 
학교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신재선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50대 후반 정도의 영락없는 교육자 모습이다. 소학교, 초급중, 고급 중학을 함께 가르치는 학교라고 했다. 학급당 인원이 몇 명쯤이냐고 물으니 15명부터 20명 사이라고 한다. 교육 현장을 보고 싶다고 하니, 소학교 2학년 교실로 안내한다. 여교사가 담임으로 산수 과목을 수업중이다.
 
교실을 살펴보았다. 책상이나 의자가 새 것이다. 난방장치도 설치되어있다. 그러고 보니 교실도 새로 지은 건물인 성 싶다. 이 지역에 축산기지를 건설하면서 세운 학교인 모양이다.
 
교사 탁자 위에 소학교 2학년용 산수 교과서가 펼쳐있다. 잠깐 훑어보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도 저만한 나이에 이런 정도의 산수 문제를 풀었는지 모르겠다. 
 
교사용 지도서도 보인다. 탁자 귀퉁이에 선생님 손전화가 놓여있다. 지방에서 손전화를 본 것은 처음이다. 책상 위에 붉은 색과 푸른 색 수성 펜이 보인다. 이제 북한에서도 더 이상 백묵을 쓰는 칠판은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수업 중에도 칠판 닦기를 털어가며 공부를 하던 때가 그리 오랜 옛날이 아니다. 
 
16명 책상이 놓여있는데 오늘 출석학생은 13명이다. 모두들 교복을 입었고, 겉옷은 뒤쪽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있다. 교실 뒤쪽에 현황판이 붙어있다. 큰 글씨로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 라는 구호 아래 충실성, 학습, 조직생활, 좋은일, 상식, 등으로 구분하여 그 아래 잘한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1등은 우리의 것- 학교적인 국어학과 경연에서 김룡심, 리설경, 홍령도, 최윤설, 남선경, 김현일 동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5점’의 성적을 쟁취하였습니다.” 5점이 최고점수로 남쪽의 수우미양가 ‘수’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나도 한몫-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축산기지건설구상을 충성으로 받들어갈 애국의 한마음으로 풀씨채집에서 남보다 2배,3배 수행한 김송, 김룡선 동무들을 높이 자랑합니다.”는 내용도 보인다.

교실 바닥 한쪽에 밥통이 보인다. 전기코드가 연결되어 있다. 학교에서 점심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이는지 모르겠다. 건축 중이라 아직 식당이 마련되지 못한 모양이다.   
 
환영하는 의미로 음악 한곡 선사하겠다며 선생님이 풍금을 치면서 아이들과 합창을 한다. 미국에서 왔다며 소개를 한 다음, 아이들에게 인사를 겸한 간단한 얘기를 했다. 바라보는 눈망울들이 또릿또릿하다.  
 
교장선생님이 컴퓨터 교실을 비롯, 어학실습실, 각종 학습 자료실을 차례로 안내한다.

컴퓨터실에는 컴퓨터 구성원리, 컴퓨터 문제해결 과정을 해설해놓은 자세한 그림과 표가 벽에 붙어있다. 자료실에는 ‘함수의 그라프 변환 설명기구’, ‘전자석의 세기와 리용’, ‘편의회로’, 등 각종 자료가 빼곡이 들어차있다. ‘국어 문학’ 교과서가 보인다. 고급중학교 1학년용이다. ‘학업성적평가종합표’가 자료실 한 편에 놓여있다. 어느 담임교사가 작성한 표인 모양이다. 국어, 수학, 자연, 체육 등 과목별로 5점 만점을 기준으로 작성해 놓았다. 
 
학교 방문을 마쳤다. 교장선생님이 밖에까지 나와 배웅해준다.  

▲ 교장선생님과 함께. [사진제공-정찬열]

 

▲ 교실 뒤 벽에 붙어있는 현황판. [사진제공-정찬열]

 

▲ 북한 아이들의 산수 책. [사진제공-정찬열]

 

▲ 컴퓨터 실습실. [사진제공-정찬열]

고산 과수농장 가는 길, 내리막길에서 목탄차를 또 만났다

축산기지 본부가 언덕 높은 곳에 지어져있다. “세포등판을 세계 제일 축산기지로!”라는 큰 사인판이 보인다. 풍력발전기 모델이 세워져 있다. 바람이 센 곳이라니 풍력발전기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젊어지라 복 받은 대지여”라는 글이 멀리서도 보인다. 비스듬한 언덕 파란 잔디 위에 돌멩이를 박아 만들어 놓았다.
 
세포등판을 출발하여 고산 과수농장을 들려 원산을 향해 가는 길이다. 올 때도 이 길을 왔을 터인데 가는 길이 더 가파르다. 내리막길이라 더 위태로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언덕 길을 내려가는데 길 가운데 트럭 한 대가 서있다. 목탄차다. 길이 좁아 차가 옆으로 비켜갈 수가 없다. 차가 멈췄다. 트럭이 고장을 고치는 동안 기다려야 한다. 
  
“기런 건 왜 찍으려 하십네까.”
 
목탄차 모습을 사진 찍으려 하자 김 참사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한다. 잠깐, 어색한 순간이 흘렀다.
 
“리용 당할까 렴려되어 하는 말입네다.”
 
미안했던지 설명을 덧붙힌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다. 때로 침묵이 말보다 강하다. 순간,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떠오르고 어릴 적 일이 또 생각났다. 눈바람 속에 젊은 어머니가 작업장에 나가 돌을 이어 나르던 모습.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시리다. 가난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숨겨야 할 일도, 숨기려 해서 숨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날이 가고 해가 가고.., 어느 날 뒤를 돌아보니 우리 집 지붕위에도 밝고 따뜻한 해가 떠있었다. “죽으면 썩을 삭신, 애껴서 뭐 한다냐”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어머님 덕택이었다. 
 
의외였다. 김 참사의 얘기도 수긍 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렇게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우리 공화국이 국내외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기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하여 이 난관을 극복하고 있다. 보라, 저렇게 나무를 태워 차를 운행하지 않고 있느냐. 언젠가는 이 시대를 추억으로 얘기할 때가 반드시 올 테니 두고 보십시오.” 이 정도의 얘기라면 훨씬 당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실 좀 전에도 세포등판을 지나오면서 수십 명 사람들이 어울려 집을 짓는 모습을 보았다. 곡괭이로 땅을 파고, 등에 벽돌을 져 나르고, 한쪽에선 시멘트를 섞으며 공사를 하고 있었다. 순안 비행장 활주로 공사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자신들의 방법으로 현실을 극복해가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많은 사람이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가슴 아팠던 기억을 반추해보면서, 아 이제 어두운 질곡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용트림치고 있구나 하는 반가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목탄차는 비밀스런 얘기가 아니다.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번호판까지도 식별할 수 있다는 시대다. 숨겨야 할 일도, 숨길 수 있는 사안도 아니고, 부끄러워 할 일은 더욱 아니다.
 
내 형편을 극복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데 그게 무슨 흉인가. 왜 당당하지 못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김종삼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장편(掌篇)2> 전문이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 청계천변 10전 균일 밥상집 문턱엔 /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 이끌고 와 서 있었다 /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 태연하였다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 “젊어지라 복 받은 대지여” 언덕에 만든 글씨. [사진제공-정찬열]

고산 과수농장을 둘러보다  

다시 출발. 운전사 방 동무의 운전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군복무 중에도 최고의 운전사였다고 한다. 그런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외 손님을 모시는 게 아니냐고, 김 참사가 은근히 치켜세운다.
 
길은 여전히 신작로다. 먼지가 일고 군데군데 웅덩이를 피해서 차를 운전하고 있다. 시간이 좀 지체되었다며 약간 속도를 높이는 성 싶다. 그 때, 갑자기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선다. 바로 앞에 커다란 트럭이 동시에 멈춘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커브를 돌아가던 참이라 반대쪽에서 오는 차를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와 보니 차선도 없는 신작로에 직각으로 산모퉁이를 도는 곳이다.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 동무 같은 운전 고수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농담을 하면서 다시 출발했다.        
 
고산 과수농장 전망대에 올랐다. 농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고산군 일대의 땅이 과일재배에 적합하여 2009년부터 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활한 땅이다. 3천 정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방문했던 세포등판은 5만 정보, 이곳의 다섯 배다. 그 곳이 얼마나 넓은 땅인지 알 것 같다. 이곳에서 일꾼 2만여 명이 일을 하고 있고, 살림집은 약 2천 세대라고 했다.
 
농가 지붕위에 드문드문 노랗게 옥수수를 말리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가, 줄을 맞춰 심어놓은 과일 농장, 추수가 덜 끝난 들판에 노랗게 보이는 다락논의 나락, 푸르른 남새밭, 집 뒤에 쌓아놓은 옥수수대, 지붕 위의 옥수수와 깻단들. 이런 것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저 풍경과 함께 사람들이 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농장에 사과를 주로 심고, 복숭아, 배 등도 심었다고 한다. 현재도 상당량은 수확하고 있지만, 오는 2016년부터 본격적인 수확이 가능할 것이란다. 그 때를 대비하여 과일저장소, 가공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도로 포장도 머잖아 완공될 예정이라고 설명을 이어간다.
 
전망대에 서 있기 어려울 만큼 바람이 세다. 으스스 춥다.

▲ 고산 과수농장 전경1. [사진제공-정찬열]

 

▲ 고산 과수농장 전경 2. [사진제공-정찬열]

 

원산, 송도원 야영장 방문

원산을 향해 출발한다. 김 참사가 이쪽 고산 부근에 석왕사가 있다고 얘기한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왕이 되는 꿈을 해몽해준 장소란다.
 
주민들이 신작로를 보수하고 있다. 달구지로 모래를 싣고 와 퍼 놓으면 삽으로 고루 펴는 작업이다. 굴삭기 한 대가 냇가에 서있다. ‘현대’라는 상호가 멀리서도 똑똑히 보인다. 어린 병사가 달구지를 한가히 몰고 간다. 어디로 무엇을 실러 가는 걸까. 신작로 가에 매점이 보인다. 
 
다시 원산에 돌아왔다. 송도원 부근이다. 바다에서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다. 고기가 제법 입질을 하는 모양이다. 뒤쪽으로 멀리 하얗게 건물이 보인다. 군인 휴양소라고 했다. 전에 들렸던 송도원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명성호텔에 가서 미국에 전화를 했다. 시내 통화처럼 음질이 좋다. 전화방 안에서 여인들이 주패놀이를 하고 있다가 손님이 오니 얼른 판을 치운다. 괜찮다고 해도 좀 머쓱한 표정들이다. 쉬는 시간에 놀이하는 게 뭐 잘못된 일인가.  
 
‘송도원 국제 소년단 야영소’를 찾았다. 1993년 개원했는데 1,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한다. 매년 여름 7,8월에 해외 청소년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를 개최한다고 했다.

10살부터 13살 사이의 국내 아이들, 그리고 7살부터 18살 사이 외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수련회란다. 국내학생은 당연히 무료이고, 국제학생은 2백 유로씩 경비를 부담한다고 한다. 이 수련회에서는 물 없이 밥 짓는 법, 야영하는 법, 기타 여러 가지 집단생활에 필요한 일을 배운다고 한다.
 
실내체육관이 현대식 건물이다. 농구장, 암벽 오르기 등을 실시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다. 축구장, 수영장도 국제규격에 맞도록 잘 만들어졌다. 연못에는 물놀이 기구들이 갖춰있고, 바로 지척이 동해바다라 여름 청소년 훈련장소로 그만 이겠다.   

▲ 원산 앞바다에서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송도원 국제 소년단 야영소’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함흥 가는 길

함흥을 향해 출발한다. 원산시내를 벗어나자 넓은 들판이다. 북한은 산이 많아 밭이 대부분인 줄 알았는데 다니면서 보니 의외로 논이 많다. 왕복 2차선 길이다. 자동차는 드문드문 달리고, 자전거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학교를 파한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 모양이다. 경운기를 몰고 가는 농부도 보인다. 저만치 밭에서 아내가 소 코뚜리를 잡고 앞에서 끌고, 남편이 쟁기질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린 소에게 쟁기질을 가르치는 모양이다. 소가 머리를 위로 치올리며 고집을 부리는지 여인이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이삭줍기를 하고 있다. 우리도 초등학교 시절 농촌에서 저렇게 노력동원에 나가 이삭을 주운 적이 있다. 논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논에서 옥수수를 기르는 모습은 또 금시초문이다. 올해 가뭄이 심했다는데 다랭이 논이라 물이 부족해서 모내기를 하지 못해 옥수수를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농사를 짓던 어느 해, 가뭄이 심해 모내기를 못하고 산두 씨를 뿌렸던 적이 있었다.
  
전탄강 다리 앞에 도착하여 잠깐 쉬었다. 함경남도 고원군과 강원도 천내군 경계다. 위대한 주체농법 만세!, 라는 표어가 보인다. 북한식 농법이라는 얘기인 모양이다.  
 
함경남도 금야군을 지나간다. 함흥이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부근이 이성계의 고향이라고 한다. 너무나 유명한 ‘함흥차사’ 이야기의 본고장이다. 남한의 전남 영암에서 매년 ‘왕인박사 축제’를 열듯이, 시절이 되어 금야군에서 ‘함흥차사’ 축제를 개최한다면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간다.
 
달리는 트럭에 사람이 한가득 타고 있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떨까,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은데 모두들 행복한 표정으로 트럭을 타고 가는 중이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생각해 보아도 그동안 묘지를 본 기억이 없다. 김 참사에게 묘는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더니, 보이지 않는 깊은 산에 모신다고 한다. 세상 떠난 분들이 조용한 곳에서 오순도순 보내시도록 배려하는 모양이다.
 
‘닭 공장’ 간판이 보인다. 개성 부근에서도 보았던 것이다. 닭을 기계적으로 기르는 곳이라는데 건물이 꽤 크다. 수만 마리 닭을 기르고 있을 거라고 한다. 머지 않는 곳에 ‘가금 전문학교’가 있다. 닭, 오리, 등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라고 했다.
  
벌판이 넓어 보이기에 무슨 평야냐고 물었다. ‘함주벌’이란다. 함경도에서는 알아주는 벌판이라고 한다. 주인 없는 달구지를 소가 혼자서 끄덕끄덕 끌고 간다. 신작로를 따라 곧장 가고 있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은데, 그런 걱정은 인간이 하는 게고 나는 그냥 가면 된다는 듯, 황소님이 느릿느릿 양반걸음으로 걸어가신다.
 
송촌강에 도달했다. 함흥시가 강 건너편에 보인다. 이 강을 동서로 가로질러 농장지대와 공장지대로 구분된다고 한다.
 
7시 반 함흥 도착. 신흥산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전기사정이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복도는 어둡고, 세면장에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함흥인구가 77만이라고 했다. 흥남이 여기서 8km인데 합하면 1백만 인구가 될 거라고 한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9달러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자 세면장에 뜨거운 물 두 바케스를 준비해 놓았다. 손님을 위한 정성이 느껴온다. 이렇게 작고 사소한 일이 사람을 감동시킨다. 내려가는 길에 호텔 로비에 들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없다.
  
호텔 앞에 매점이 두 군데 있다. 감이랑 밤, 그리고 몇 가지 먹거리를 팔고 있다. 평양의 노점상과는 달리 달러도 괜찮다고 한다. 홍시 감을 샀다. 1달러를 주니 말랑말랑한 홍시감이 10개가 넘는다.
 
오늘 하루, 꽉 찬 일정이었다. 내일은 흥남에 간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 간다. 

▲ 함경남도 고원군, 강원도 천내군 경계다. [사진제공-정찬열]

 

 ▲ 세면장에 더운물 두 바께스를 가져다 놓았다. [사진제공-정찬열]

 

<추가- 6일 오전 1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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