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동포 류동성 선생과의 인터뷰는 11월 27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캐나다 동포 류동성(80) 선생은 지난 8월 평양과 백두산을 거쳐 사실상 고향이나 다름없는 북측 강원도 통천을 방문했다.

류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외가인 통천에는 지금도 전쟁 통에 헤어진 여섯 살 아래 누이동생 ‘동희’ 할머니가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또 전쟁 발발 직후 어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서울에서 이곳으로 넘어 왔다가 1950년 10월 28일 비행기 폭격으로 횡사한 아버지가 통천에 영면해 있다.

캐나다에서 해군 선박검사원으로 일하다 지난 2003년 퇴직한 류 선생은 10년 전인 2005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55년 만에 꿈속에도 그리던 ‘동희’를 만났고 이번에는 통천을 직접 방문해 누이동생의 자손들과 함께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류 선생은 지금도 10년 전 평양 고려호텔에서 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들끓던 심정이 잊히지 않는다.

서로 헤어지던 1950년 10월, 오빠는 15살 중학생이었고 누이는 9살짜리 초등학교 1, 2학년 나이였다.

55년 만에 만난 오누이는 처음엔 어색함에 데면데면했지만 인적사항과 헤어질 때 정황 같은 것을 맞추어 보고는 이내 서로를 알아봤다. 그리곤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류 선생은 그날 고려호텔에서 누이와 밤을 새워 옛 이야기를 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어린 시절 온몸으로 전쟁을 겪었던 세대이면서 남다른 총명함으로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졸업했고,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1970년대 스페인 현지 사무소 직원으로 파견근무를 하던 중 자유로운 공기를 쫓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그곳 해군에서 기술직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부정한 세태와 억압적인 상황을 못 견디는 정의감은 있었지만 1982년 캐나다 해군청 선박검사원으로 취직해 21년 동안 근무하다 2003년 은퇴할 때까지 비교적 풍족하게 가족들과 지낼 수 있었던 생활에 만족해하는 보통의 생활인이었다.

분단된 나라의 민족이 겪고 있는 고통을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운명으로 직접 확인한 그는 첫 방북이후 지금까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 밴쿠버 지역을 중심으로 마음 맞는 동포들과 함께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캐나다 밴쿠버 지회(천담회)’ 활동에 열성을 쏟고 있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에서 한 글자씩 모은 ‘천담회’ 활동으로 노년을 보내는 류 선생이 지난 11월 27일 통일뉴스를 방문, 캐나다 동포들의 성의를 모아 격려해 주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평양, 백두산, 강원도 통천을 거쳐 서울까지 종횡무진, 거침없이 노구를 이끌고 다니며 통일을 열망하는 그는 남과 북이 서로 편견을 걷고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강원도 통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외가 마을 어귀에서 누이동생과 함께. [사진제공-류동성]

   
55년만에 만난 누이동생...함께 찾은 통일의 길

□ 지난 8월 강원도 통천을 방문하셨는데.

■ 개인적으로 가기는 어렵고 단체로 가면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올해 광복 70돌 행사에 참가하는 인원들과 함께 방북했다. 여비가 많이 들기도 하고 장거리 여행이 힘들기도 하지만 여동생이나 나나 피차 나이가 많아서 몇 번이나 더 볼지 모르기 때문에 벼르다가 만나러 갔다.

□ 여동생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

■ 2005년 처음 만났을 때가 헤어진 지 55년만이었다. 이름은 류동희이다. 여동생은 이번에 다섯 번째 본다. 10년 전에 여동생의 소재를 처음 파악했는데 그때는 우리를 고향에 보내려면 북측 당국도 번잡하고 비용도 들고 하니까 가족을 모두 평양에 불러서 만나게 해주었다. 2005년 고려호텔 로비에서 처음 만났다. 이번에는 특별히 간청을 해서, 내가 더 올 수도 없을 것 같고 더구나 아버지 산소에 마지막으로 성묘를 해야 되겠으니 고향까지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특별히 배려해서 보내줬다. 평양에 도착해서 백두산에 갔다 돌아오는 (공식)일정은 그대로 다 따르고, 그 후에 차를 한 대 대절해서 운전기사와 안내원 동반으로 갔다 왔다. 혼자서는 안 보내니까.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고 하니까 아버지 묘소에서 성묘하면서 다 만나고 거기서 점심 먹고 그날 헤어졌다.

□ 처음에 누이동생은 오빠를 알아보던가.

■ 그때 만났을 때는 한참 울었다. 인적사항 다 진술하고 헤어질 때 정황 이런 것 상세하게 써가지고 그 사람들이 다 확인하는데... 그 사람들이 처음에 데리고 와서 만나게 해 주는데 처음에 만나서는 얼굴도 전혀 기억이 없고 한데... 몇 마디 집안이야기, 고향 이야기하는데 틀림없지 뭐... 그날 한참 많이 울었어... 하룻밤 호텔에서 자고.... 우선 만나서 울음이 다 그친 다음에 분노가 폭발했어 내가...‘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되느냐’

□ 하룻밤 잠도 못자고 식사도 함께 못해서 섭섭했을 것 같다.

■ 뭐 거기에 호텔도 없고. 또 다들 아버지 묘소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 여동생은 지금은 금강산 가까운 곳에 살고 조카 둘은 원산에서 산다. 그래서 통천 묘소에 집합을 해서 가족을 다 만나게 한 것이다.

거기서 조카며느리, 조카사위도 다 만났다. 손자사위들은 군인도 있고 농장에서 근무하거나 학교 졸업 후 도시에서 임가공 공장에 다니기도 한다고 하더라. 만나면 서로 곤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저 지나온 이야기, 가족 이야기들만 한다.

□ 일정이 많이 고단했을 것 같은데.

■ 평양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원산을 거쳐 통천까지 당일로 가는 일정인데 왕복 600km이니까, 1천500리 아닌가. 당연히 힘들더라. (사진을 보며) 통천의 시중호 휴게소라고 하는 동해안의 이름난 해수욕장이다.

□ 고향은 기억하던 모습과 비슷했나.

■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릴 적 같이 학교 다니던 남자, 여자 동창들의 이름을 열대여섯 명 정도 기억한다. 이번에 갔을 때 살아있는 친구들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마을은 큰 국도변에 있었는데 폭격으로 다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산 밑으로 동네들이 자리 잡고 있더라. 내가 다니던 학교도 가봤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설 중학교를 세워서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다녔는데 지금은 조금 증축이 되어 있더라. 나중엔 학교도 폭격을 맞았지만 그때 학교 교실바닥을 뜯고 굴을 파서 학교 뒷산 방공호까지 연결했던 기억이 난다.

□ 10년 전 방북했을 때와 이번에 가보니 무엇이 달라졌던가.

■ 10년 전엔 그 사람들이 궁색한 것이 나타났는데, 갈 때마다 생활이 윤택해지는 게 보인다. 우선 얼굴색이 좋아지고 옷감이 좋아지고 가계용품도 많아지고...

▲ 65년만에 아버지께 올리는 절. [사진제공-류동성]

   
혈육이 이어준 '고향, 흙, 풀포기, 통일'

류 선생은 통천에 가족들이 와서 살던 무렵부터 전쟁을 겪으면서 ‘동희’ 누이만 그곳에 남게 된 사연을 때로 눈시울을 붉혀가며 설명했다.

일본 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고향이 통천인 유학생 친구의 소개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다. 해방 전 서울 용산 부근에서 일을 하다가 처가의 도움으로 통천 부근에 살림집도 짓고 수산물 가공공장을 운영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정어리가 한참 잡힐 때 정어리기름을 짜서 납품하는 일을 했었는데, 당시에 외지인이 조그마한 시골에서 사업을 크게 하니까 동네 사람들의 시기를 받기도 했던 것 같다.

해방 후에는 왜놈 치하에서 잘 살았다는 이유로 시설을 다 몰수하고 추방을 당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서울로 가고 어머니와 자식들은 통천에서 사오십리 떨어진 외가에 머물면서 사회질서가 안정되는 대로 생활기반을 서울로 옮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삼팔선은 아무나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등에 업은 젖먹이 동생만 데리고 안내원을 앞세워서 강원도 인제 쪽 산을 넘어 몰래 남쪽으로 내려왔고 통천에는 류 선생과 어린 누이만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와 함께 남아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있던 아버지는 틈을 보다가 자식들도 데려오고 공장과 재산을 수습하기 위해 1950년 전쟁이 발발한 후 그해 10월 초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통천으로 들어왔다.

당시 통천은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 후 퇴로가 끊긴 인민군 군단병력이 태백산맥을 따라서 본대와 합치기 위해 이동하면서 통천 항에 하역돼 있던 미군 보급품을 탈취하는 등 곳곳에 전투가 벌어지고 이에 미군의 비행기 폭격이 빈번했다.

그해 10월 초 통천을 떠나던 국군은 후퇴하면서 ‘동네 청년들과 한 일주일 피해있으면 다시 집에 들어갈 수 있으니 남자들은 우선 피난을 하라’고 했다. 머리맡에 벗어놓은 옷 그대로 입고, 신던 고무신 그대로 신고 그대로 바닷가로 피신한다고 나간 것이 통천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때 바닷가와 평지에는 함포사격 때문에 인민군이 근접을 하지 못했다.

15살의 소년 류동성은 이때 아버지를 5년 만에 만났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1950년 10월 28일 아버지가 폭격에 횡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30리쯤 떨어진 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 바닷가에 가매장한 것을 직후에 내가 상주가 되어서 외가 뒷산에 간신히 임시로 매장하고 돌아왔다. 그때는 아무 준비가 없었으니까 관도 없이 매장을 하고 나무말뚝에 먹을 갈아 써넣어 박아놓은 정도였다. 봉분도 납작했었고...”

동네에 살던 소꿉친구는 뒷산의 임자 없는 묘가 친구 류동성 아버지의 묘라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통천에 남아있던 동희에게 알려줘서 봉분도 돋우고 콘크리트 비석도 세웠다. 류 선생은 그 이야기를 55년이 지난 2005년에 처음 들었다.

▲ 여동생 '동희'의 자식들과 함께 아버지 산소에서. [사진제공-류동성]

  
류 선생은 통천을 떠나오던 그날 동희가 외할머니 품에서 자는 걸 보고 외삼촌과 자정 무렵에 빠져나왔으니 오라비 가는 것도 못 봤던 것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여동생 동희는 거기 혼자 남아서 외할아버지·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해 시집을 가고 2남1녀를 낳았으며, 자식들은 다시 그 손자와 증손자로 번성해 대 가정을 이루었으니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증조 할머니가 되어 있다.

한편, 이때 어머니는 해방 직후에 통천의 수산물가공공장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해 30리 떨어진 친정으로 어린 동생들 데리고 와 있었다. 그러다 한밤에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피난, 당시 서울 용산 원효로3가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소년 류동성은 외삼촌과 함께 통천에서 나와 혼자 부산까지 흘러갔다가 해방 전 9살 때 잠시 가 보았던 기억을 더듬은 끝에 기적적으로 원효로3가의 어머니와 우편으로 연락이 닿았다. 한강다리가 파괴됐기 때문에 1952년 어머니가 부산으로 와서야 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와 통천에 남아있던 여동생 동희를 빼고 어머니 등에 업혀 삼팔선을 넘은 둘째 동생과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난 막내 여동생, 어머니와 장남 류동성의 고군분투 생활기가 시작된다.

▲ 이번 방문길에 통천의 명물 '시중호'휴게소 해수욕장을 들러 누이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제공-류동성]

   
타고난 수재도 벗어날 수 없었던 생계 고민

타고 난 두뇌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류동성은 함께 피난을 나온 외삼촌이 자리를 잡고 있던 춘천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195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보다는 호구지책이 더 급했던 당시 초급 공무원 임용을 위한 ‘보통고시’에 응시해 전국에서 18명밖에 안 되는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모교인 춘천고등학교 교장 선생이 대학 입학금을 내주어 대학생이 된 것.

□ 보통고시를 발판으로 고등고시를 볼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가족을 부양하면서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인데...

■ 대학생활을 할 때 가족 부양까지 하지는 않았다. 당시 고등학교 국비장학금이 있었다. 학비를 전액 면제해 주었는데 그때 돈으로 3천원을 현금으로 주었다. 학비뿐만 아니라 책도 사볼 수 있고 좀 여유 있게 쓸 수 있었다. 서울 와서는 과외도 하고 그랬다. 어머니는 당시 하숙을 했다. 그때는 학교 다니면서도 늘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동생들이 아직 어리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도 결혼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실은 서울대학교를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보통고시를 보러 갔던 것인데, 당시 구두시험을 감독하던 면접관이 ‘어려워도 대학을 꼭 가라’는 조언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후 류 선생은 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부산 대한조선공사(현재 한진중공업)에 취업을 했으나 매년 적자인 상태에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생계가 우선이었던 그는 1년 후에 한국전력 시험을 봐서 경남지점 관하로 동료 6명과 함께 합격했다.

한전 초기에는 그런대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의 보수가 지급됐으나 나중에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니까 국영기업도 공무원에 준해 임금을 동결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때의 경험이 류 선생에게는 아주 심란하고 유감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당시 한전 직원들에게 봉급은 용돈에 불과했으며 어디선가 별도로 생기는 가욋돈으로 생활을 하는 모습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은 떳떳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부정한 일이라고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이후 ‘수산개발공사’를 거쳐 그는 일생의 전기를 맞이할 한진의 스페인 주재 직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당시 베트남 전 특수로 막대한 현금자산을 비축한 한진은 대한항공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양어업 진출을 계획하고 스페인에 원양어선 7척을 건조하고 있었다.

30년 넘은 캐나다 이민 생활...'천(지와 백록)담회'

그는 1973년 늦가을부터 1975년까지 현지 연락업무를 하는 주재 직원으로 1년 반 정도 스페인에 체류한다. 10월 유신의 폭압이 거칠어지던 시절, 그는 아이들까지 평생 군홧발에 치여 사는 그런 상황에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현지에서 이민신청을 했다. 수출 실적에 따라 여권 개수를 지정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 현지에서 신청을 했나.

■ 그럼, 한국에 들어오면 못나가니까. 그땐 가족은 한국에 있었고 혼자 스페인에 있었으니까.

□ 스페인 현지에선 가능했었나.

■ 스페인에선 즉시 허락이 나와서 금방 갔다. 신원조회니 뭐니 해서 6개월 만에 끝났다. 애들은 초등학교 1학년, 3학년까지 마친 상태였다. 국내에 있던 아내와 어머니를 불러서 캐나다에서 다시 만나 이후 거기서 계속 살았다.

▲ 보통의 생활인인 류 선생은 남과 북을 향해 “서로를 두려워하지 말고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반정부 인사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나.

■ 그때도 어지간했으면 한국으로 들어왔을 거다. 그런데 이건 뭐 유신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하겠다고 했으니까... 내가 반정부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한 날부터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생래적으로 정의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도 불쌍한 애들 괴롭히는 애들과 많이 싸웠다. 차별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다. 군대에서도 그랬고...

□ 바로 밴쿠버로 갔나. 스페인에서 출발하면 캐나다 토론토가 더 가깝고 큰 도시 아닌가.

■ 토론토가 밴쿠버에 비해 가깝기는 한데 토론토에는 바다가 없고 오대호가 있긴 하지만 내륙이어서 조선공업이 없다. 그리고 밴쿠버가 고국과 가깝지 않나. 부산 앞 바다의 철썩이는 파도가 밴쿠버 해안에 부딪치잖나. 또 밴쿠버의 기후가 캐나다에서도 좋다.

□ 스페인에서 캐나다로 바로 갔다고는 해도 이민이 자유로운 시절도 아니었고,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 스페인 주재 직원이었을 때는 한진에서 파견한 ‘갑’이었는데, 캐나다에 도착해서는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한 6~7년간 맨바닥에서 시작하면서 고생 좀 했다. 당시에는 국내 학·경력이 인정되지도 않고 1975년 제1차 오일쇼크가 있을 때여서 밴쿠버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디젤엔진, 스팀보일러, 콤프레셔 등을 다루는 원동기 기술자 자격을 취득해서 6~7년 현장에서 일했다.

나중에 해군 선박검사원을 할 때도 쉽지 않았다. 공무원은 대민 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내가 읽고 쓰고 하는 것은 되지만 말하는 건 빨리 안 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면접하는데 떨어졌다. 오타와까지 가서 면접을 보러 갔는데 이 사람들이 실망하고 당황하더라. 이력서는 그럴듯한데 말이 안 되니까. 당시에는 후보자를 부를 때 비행기표 다 제공하고 숙박비 다 주고 했다.

캐나다 생활이 7년쯤 접어들던 1982년, 공무원 시험을 봐서 캐나다 해군에서 함정 검사하는 선박검사원으로 채용됐다. 그 뒤로 21년간 조금 편하게 일하고 생활하다가 2003년에 퇴직했는데, 그는 이때의 결정을 굉장히 잘한 것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2003년 은퇴한 이후 연금생활을 하는 그는 2008년부터 캐나다 서부 밴쿠버를 중심으로 ‘천담회’ 활동을 하고 있다.

‘천담회’는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에서 한 글자씩 가져 온 모임으로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 위원회 캐나다 지회 밴쿠버 분회’의 별칭이다.

류 선생은 2008년 창립한 천담회에서 통일운동에 뜻을 같이 하는 동포 10여명과 함께 1년에 4~5번 정도 모여 고국의 소식을 서로 나누는 친목모임을 갖다가 2010년 한상렬 목사의 방북 후 귀환에 즈음해 한 목사의 구명을 위한 신문광고 등 실천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여름에는 토론토에 와서 경기를 펼친 북측 여자축구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회원들과 함께 김치를 담가 3~4시간 비행기를 타고 경기장으로 가서 ‘onekorea’와 ‘한반도기’를 들고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보통의 생활인인 류 선생은 남과 북을 향해 “상대를 바로 알아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로를 두려워하지 말고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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