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  금강산에 도착해서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위에 서있는 금강산 가족호텔에 묵었다.[사진제공-정찬열]

 

새 아파트 분양은 부근에 직장이 있는 노동자부터 

10월 14일(화) 맑음. 오늘은 평양을 출발하여 원산을 거쳐 금강산까지 가는 일정이다. 9년 전, LA평통 방문단으로 평양에 왔을 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원산을 방문하지 못했다. 그 때, 원산 출신인 나이 드신 문 선생이 방문단 일원으로 함께 왔었는데, 그 분은 원산을 방문한다는 스케줄만 믿고 방북단에 합류하여 오신 분이었다. 원산에서 LSD를 타고 피난을 나왔다고 했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게 되었다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했었다. 그런데 방문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고향은 그런 곳인가 보다. 원산 가는 아침, 그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침밥을 먹고 잠깐 방에 올라가는 길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복도에서 만났다. 그동안 몇 번 마주쳐서 낯이 익은 분이다. 어디 사시냐고 물으니 이 부근이라고 대답한다. 아파트에서 사느냐고 다시 물으니 창전아파트에서 산다고 한다. 아니, 그 좋은 고급아파트에서 사시느냐고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우리 북조선에서는 노동자가 우선순위로 입주 하도록 되어있다며 당연하다는 듯 얘기를 한다. 전기세라든가 관리비는 많이 들지 않느냐고 재차 물었다. “일 없습네다” 웃으며 받아 넘긴다.  
 
운전사 방 동무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8시 출발. 자동차가 창전거리를 지나가는데 아침에 청소 아주머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파트를 새로 건립하면 분양은 어떤 식으로 하느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아파트 가까운 거리에 직장이 있는 노동자를 우선 입주시키고, 다음으로 군경 유자녀나 항일열사 가족 등이 입주한다고 한다. 유자녀를 배려하는 것은 뒷일 걱정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의미라고 덧붙인다.

▲ 창전아파트. 새 아파트는 부근에 직장 있는 노동자부터 분양된다고 한다. [사진제공-정찬열]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 남한에서 건설하면 윈윈이 될 텐데...

평양과학기술대학 표지판이 보인다. 멀리 건물 옥상에 붉은 글씨로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를 크게 써 놓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고속도로가 놓여있고, 거리는 220km라고 한다. 평양을 벗어나니 창밖으로 계단식 논이 보인다. 낮은 구릉은 밭을 일구어 놓았다. 민둥산이 많다. 주민들의 땔감 문제가 해결되면 민둥산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우리 어릴 적, 봄이면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나무를 심었지만 민둥산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농촌의 땔감 문제가 해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산이 푸르러 지는 걸 보았다. 나무 얘기가 화제에 오르자 김 참사가 황해남도에 과일군이 있다고 소개한다. 사과, 배,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군이라고 했다. 얘기를 하는 동안 오른쪽 산허리에 ‘애국림’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외 동포들이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이쪽 도로는 묘향산이나 판문점 가는 길에 비해 도로 사정이 더 좋지 않은 모양이다. 군데군데 패인 곳이 많고 도로를 고치고 있는 곳도 여러 곳이다. 4차선 정도의 넓이인데 차선이 없다. 중앙선도 없다. 그냥 운전사가 적당히 알아서 운전을 하면서 간다. 그래도 자동차가 많지 않아 통행이 가능한 모양이다.  
 
북한에 도로를 건설할 경우 비용은 얼마나 들까. 토지보상비 등을 제외한 공사비와 인건비 등을 추산해 보면, 남한의 70% 수준이 될 것이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나진선봉 지구, 개성공단 등 산업단지 개발도 중요하지만 낙후된 도로·항만·철도 등 기본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한에서 건설에 참여한다면 서로에게 윈윈이 될 것이다. 남한은 축적된 자본력과 공사경험이 있으니 도로나 항만 철도 건설을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고, 그 대가로 북한에 무진장 묻혀있는 각종 지하자원을 남쪽에서 가져가면 될 것이다.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이 중국이 그 일을 대행하면서 북한 경제를 잠식하고 있다지 않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남북 관계가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외국자본을 들여와 건설하는 방법은 없을까. 세계은행 김용 총재가 북한 경제건설에 관심을 보였다.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개방한다면 아낌없이 줄 겁니다"라고 말했다. 김 총재는 부모가 이북 출신이다. 그는 지금 막강한 힘을 가진 세계은행 총재다. 낙후된 인프라를 개발하는 데 그가 움직인다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당국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

신평 휴게소에서 러시아 교포를 만나다

앞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기름수송차가 언덕을 올라간다. “기름차가 송달 나간단 말입네다.” 운전사 방 동무가 한 마디 한다. 높은 산비탈에도 밭을 일구어 놓았다. 가능한 곳은 모두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한다고 김 참사가 설명한다. 보리와 밀은 2모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식량증산을 위해 저런 산기슭에 밭을 개간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홍수가 나면 속수무책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좀 쉬었다 가자며 휴게소에 차를 세운다. 신평 휴게소다. 휴게소 앞에 제법 넓은 호수가 있어 경치가 그만이다. 먹을 게 있는가 싶어 들어가 보았더니 간단한 과자류와 음료수를 팔고 있다. 이 지방에서 나오는 특산물도 몇 가지 놓여있다. 한쪽 구석에 ‘황구렁이 술’이라고 써 부쳐 놓았다. 큰 유리병에 황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있다. 한잔에 한 유로(1.3달러)라고 한다. 강냉이로 담근 술은 50도라고 한다. 추운 지역이라 독한 술을 담궈 마시는 모양이다. 

소형 밴차 한 대가 도착한다. 60대로 보이는 남자를 중심으로 대여섯 명 관광객이 차에서 내린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왔다고 한다. 남자가 한인 2세라 하는데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 사업가이자 작가라고 수행원이 소개를 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다. 예순넷 이라고 본인의 나이를 밝히며 블라디보스톡에 올 일이 있거든 꼭 연락하시라고 한다.
 
서로 외국에 사는 동포라는 사실이 금방 마음을 통하게 한다. 교포 2세나 3세가 되면 저렇게 한국말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진다.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고 한국말을 가르치긴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글을 내 아들 딸이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다는 게 참 아쉽다. 한국학교 교장을 하면서까지 나름 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현지에서 태어나 교육 받은 아이들에게는 한국어가 고국의 언어긴 해도 어차피 외국어다. 불편하지 않을 만큼 한국어를 구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 신평 휴게소에서 러시아 교포 2세를 만났다. [사진제공-정찬열]

 

종업원 책 읽는 모습에서 옛 일을 떠올리다 

종업원이 한 쪽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열 일고여덟 되어 보이는 여자종업원이다.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책 제목을 보여준다. ‘새봄’이라는 책이다. 여러 사람이 돌려 보았는지 책이 많이 닳았다.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인데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전에 ‘양지마을’이라는 제목으로 티비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고 했다. 지난번 묘향산에서는 여자 안내원이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책을 탐독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 안내원은 토지개혁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앳된 시골 여자 아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니 저맘때쯤의 내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중학을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못하고 농사를 짓고 있을 때였다. 책을 읽고 싶은데 책이 없었다. 책을 사볼 만한 처지는 못 되고, 이웃에게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시골동네라 읽을 만한 책이 많지 않았다. 이웃 마을은 물론 읍내 아는 집에서도 책을 빌려 왔지만 그것도 금방 동이 났다. 신문도 이장 집으로 배달되는 00신문 한 가지뿐이었다. 그조차도 며칠 분이 한꺼번에 오기 일쑤였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 등잔불 밑에서 읽을거리면 무엇이든 걸신들린 듯 읽었다. 읍내 선배가 빌려준 스무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던 것도 그때였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이장 집으로 배달되어 온 ‘농원’ 잡지에서 고등학교졸업자격 검정고시 통신강좌 광고를 보았다. 책을 주문했다. 표지가 밤색으로 된 열두 권짜리 한 질이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공부를 했다. 여름철이면,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해 파놓았던 굴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여름 굴속은 시원하고 조용했다. 촛불 한 자루면 굴 안이 환했다. 극성스럽던 모기도 굴속까지 쫒아 들어오지는 못했다. 작은 밥상을 펴놓고 책을 읽던 시절이 생각난다. 꼭 저 아가씨만한 시절이었다.   

다시 출발. 골짜기에서 소떼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 가지 않아 ‘솔재령굴’ 입구에 도착했다. 굴 이쪽은 황해북도 신평군이고, 굴을 지나면 강원도 법동군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길가 아주머니들이 머루와 다래를 팔고 있다. 남한에서도 휴게소 부근에는 물건이나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있는데 이쪽도 비슷하다.   
 
굴은 차 한 대가 비켜갈 수 있는 2차선 길이다. 깜깜하다. 전등을 달아놓지 않았을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길을 안내한다.
 
남한 땅을 걸어서 국토종단과 횡단을 할 때 보니 의외로 굴이 많았다. 빙빙 돌아 산을 넘어가던 길을 산허리에 굴을 뚫어 직선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강원도 지역을 휴선선 따라 걸어가면서도 몇 개의 굴을 통과했다. 4km 가까이 되는 것도 있었다. 세상에, 10리길을 굴속으로 걸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4차선 굴이었다. 굴은 양 옆으로 인도가 있고, 통풍장치와 전등, 그리고 군데군데 대피소와 공중전화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장비와 노하우를 가져와 북한에도 그런 굴을 뚫을 수 있을 텐데. 그 시절이 언제쯤일까.

▲ <솔재령굴>. 황해북도 신평군, 강원도 법동군 경계다. [사진제공-정찬열]

 

원산, 만경봉호는 부두에 기대어 졸고 있고, 원산 금강산 일대가 국제적 관광명소가 될 거란다

‘솔재령굴’을 지나니 원산이 금방이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로타리를 돌아가는데 원산우체국이 보인다. 6.25때 함포사격으로 시내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김 참사가 설명한다. 푸에블로호가 이 앞바다에서 나포되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지금은 강원도 소재지이고, 관광중심지로 변모 중이라고 한다. 여기서 멀지 않은 금강산, 그리고 마식령 스키장과 연계시킨다면 훌륭한 관광벨트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산 비행장도 건설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금년(2015년) 11월 원산 갈마비행장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반도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원산과 금강산 일대가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될 거라는 보도도 함께 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송도원 해수욕장 옆 식당을 찾았다. 모래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주위는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년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다. 오가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제복을 입은 대학생 몇이 지나가는 모습도 보인다.
 
창가에 앉아서도 송림원이 보인다. 일본식민지 시대에는 서울서 돈푼이나 있다는 사람들은 여름이면 경원선 기차로 여덟 시간이나 걸려 원산에 닿아 송도원 해수욕장에서 몸을 식히고, 동해선 기차로 금강산을 다녀가곤 했다고 식당 주인이 얘기해준다.  
 
매운탕을 주문했다. “밥이 찹쌀을 섞었는지 차분합네다.” 운전사 방 동무의 얘기다. 말들 듣고 보니 밥맛이 차지고 좋다. 햅쌀밥이어서 그런가, 싶다가 이 부근 안변평야에서 나는 쌀이 임금님이 드시는 진상 쌀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첫째 원산(元山), 둘째 전주(全州), 셋째 박천(博川)을 꼽았다고 한다. 이것이 언제부터 내려오는 속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밖에도 주택가로 가장 좋은 곳으로는 강릉(江陵)과 해주(海州), 그리고 함흥(咸興)을 친다고 했단다. 원산이 살기 좋은 곳 첫 번째로 꼽히는 이유는 이곳이 농산물·해산물이 풍부하여 인심이 좋았고 또 사람들의 품격이 그만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원산이 고향인 이호철 소설가가 어떤 글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항구 부근을 돌아보았다. 명사십리가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사실 원산에서 해수욕장으로 말하자면 명사십리가 송림원보다 훨씬 유명하다. 명사십리는 모윤숙의 시를 통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모윤숙은 본디 정주 출신인데 고모가 살고 있는 원산에 자주 놀러와 명사십리에 관한 시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정주라는 지명이 생각난 김에 그곳 출신 백석 시인을 아느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김일성 대학을 졸업했다는 그가 백석을 모른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한에서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못했던 시인이 한둘이 아니었고, 백석 시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한 지역이 그 지역 출신이 쓴 문학작품 혹은 노래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된 예는 많다. 명사십리가 모윤숙의 시로 유명해진 것처럼 강원도 평창지역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하고, 내 고향 전남 영암도 가수 하춘화가 부른 노래 ‘영암 아리랑’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만경봉호가 항구에 메여있다. 원산과 일본 니가타 사이를 오가며 북송 교포 및 재일 총련 대표단과 화물을 운송하던 9,600톤급 화물 여객선이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이 배에 응원단을 태우고 참석하여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그 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 유명해진 배이기도 하다. 길이가 162m라니 꽤 큰 배다. 지금은 할 일이 별로 없는지 한가히 부두에 기대어 졸고 있다. 

▲ 원산 송림해수욕장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 원산 시내에 “우리 당을 영원히 김일성 김정일동지의 당으로 강화발전시키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부두에 정박해 있는 만경봉호. [사진제공-정찬열]

 

동해바다 천혜의 해수욕장, 섯!, 사인을 보고 STOP 한다

오후 2시. 금강산을 향해 출발했다. 원산에서 100km 정도라고 한다. 시내 한길가에 세워놓은 “우리 당을 영원히 김일성 김정일동지의 당으로 강화발전시키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구호 앞에 한 여인이 물건을 이고 걸어가고, 남자 둘이 짐 실은 수레를 끌고 있다.
 
원산 시내를 벗어나자 사과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이곳 사과가 유명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는 동해바다, 푸른 물결이 보인다. 바닷가를 따라 철길이 놓여있다.
 
밭에는 무덤무덤 낟가리가 쌓여있다. 옥수수대 같기도 하고 콩대인지도 모르겠다. 금년에 가뭄이 들어 힘들었다지만, 가을 들판을 보니 저윽이 마음이 놓인다. 저렇게 밭을 꽉 채워 자라고 있는 남새를 보니 올 겨울 반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중호 부근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 휴게소 뒷문을 열고 바닷가로 나가니 모래사장이다.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넒은 모래밭을 5분정도 걸어가니 “섯!, STOP!” 사인이 서 있다. 둘러보아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소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푯말 하나가 발길을 붙들어 맨다. 저 푯말을 무시하고, 어쩌면 모르고 넘어갔던 여인이 총에 맞아 숨진 불행한 사건 때문에 금강산 관광이 무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휴게소 복도에 ‘녀자 샤와실(FEMALE SHOWER)"이라는 사인이 붙어있다. 남한과 북한이 표기법이 다르다.  
 
통천을 지나간다. 통천군은 현대그룹 (고)정주영 회장의 고향이다. 그는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호 ‘아산’은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 소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 사람.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집을 나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대왕국을 건설한 사람. 그가 태어난 마을은 어디쯤일까 궁금했었다. 도전과 응전으로 엮어지는 삶의 치열함을 몸소 가르쳐준 그 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겠지만. 나 역시 중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스물한 살에야 고등학교에 진학한, 쉽지 않았던 내 삶에서 그는 오랫동안 나의 멘토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방북 때 꼭 그의 고향마을을 방문하고 싶었다.   
 
방문 전부터 정주영 회장의 고향을 방문하고 싶다고 관계자에게 말해두었는데 금강산 가는 길에 통천을 지나게 되니 그 때 보자는 대답을 들었다. 소월의 고향 영변, 그리고 문선명 통일교 창시자의 고향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소월의 고향을 찾고 싶었고, 당대에 전 세계인을 아우르는 종교의 성을 이룩한 문선명 교주의 고향도 방문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변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통천군 소재지를 지나치는 것을 보고 나서 김 참사에게 정주영 회장의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생각난 듯 길가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길을 걸어가던 한 아주머니를 붙들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마을이 어디쯤 있냐고 묻는다. 그녀가 뭐라고 답변을 하는 모양인데 시간이 어중간하니 오는 길에 들리면 어떻겠냐고 내 의견을 묻는다.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이삭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을이면 저렇게 흘린 이삭을 줍는 일은 노인이나 아이들 몫이었다. 초등학생 때, 전체 학생들이 동원되어 들판에 나가 한 줄로 서서 이삭을 줍기도 했다. 사람이 줍고 남은 것은 새나 들짐승이 먹었다. 이를테면 상내림인 셈이다.
 
이삭 줍는 모습을 보니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도 생각나고 ‘만종’도 떠오른다. 해질녘 하루 일을 끝내고 부부가 작은 감자바구니를 놓고 교회당 종소리를 들으며 정중히 감사 기도를 올리는 그 모습.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그림 ‘만종’이, 사실은 바구니에 감자가 아니라 죽은 자식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래의 밑그림을 누군가 덧칠해 버렸다는 얘기다. 과학적 방법으로 규명된 사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식을 잃고 슬픔에 겨워 기도를 드리는 모습으로 그림의 의미가 대폭 달라진다.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기 마련이다. 

▲ 섯!, STOP! 사인이 서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시중호 부근 동해안 바닷가.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사진제공-정찬열]

 

▲ ‘녀자 샤와실(FEMALE SHOWER)". [사진제공-정찬열]

  

금강산 도착, 농사짓고 물 길러오고, 아이들 데려오고...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비슷하다 

금강산 입구 검문소에 도착했다. 주민들이 대기하고 있다. 휴전선이 멀지 않으니 DMZ안에서 농사를 짓는 주민들도 저렇게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모양이다. 남한에서도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농사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때마다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금강산 참관 접수 사무실에 도착했다. 김 참사가 접수하러 사무실로 들어간다. 금강산관광 안내표지를 보니 만물상 15달러, 만폭동 20달러, 삼일포 10달러, 해금강 10달러...로 관광 요금이 매겨져있다.
 
마을 아파트가 바로 앞에 보인다. 삼일포 9km 금강 37km라는 푯말이 서있다. 군인 두 명이 길가에 보초를 서고 있고, 아이들이 학교를 파했는지 엄마가 아이의 백팩을 대신 메고 작은 아이의 손목을 잡고 걸어가는데, 큰 녀석은 깡총거리며 내 앞을 지나간다.
 
몇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농사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가 보다. 자전거 뒤에 농사 수확물을 그득하게 실었다. 곡식이나 고구마 종류인 모양이다. 언덕이라 내려서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간다. 자루에 넣은 수확물이 무거워 바퀴가 터져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여자 세 명, 남자 한 명이다. 아주머니들의 억척은 알아주어야 한다. 한 명은 아가씨인지도 모르겠다. 한국 여인들, 여자 축구나 양궁 그리고 세계 여자골프를 장악하고 있는 한국 여인들을 보면 우리 여인들의 DNA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아주머니가 리어카에 물통을 싣고 간다. 물을 길러 가는 걸까, 제법 묵직하게 밀고 가는 모습을 보니 물을 길러 오는 모양이다. 옛날, 마을 공동 우물터에서 물을 길러다 먹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가씨는 샘에서 바가지로 물동이에 물을 퍼 담은 후, 바가지를 물동이에 엎었다. 그리고나서 머리를 흔들어 두 손으로 쓰다듬어 뒤로 넘긴 다음, 또아리를 머리 위에 얹고 줄을 입으로 물었다. 조심스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서 한 손은 동이를 잡고 한 손으로 흐르는 물방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모아 흩뿌리며 걸어가던 아가씨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둥, 두두둥” 바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지는 해를 뒤로 긴 그림자를 남기며 하늘하늘 물동이를 이고 가던 여인의 뒤태를 보며 가슴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 금강산 입구, 마을 아파트가 바로 앞에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자전거 뒤에 농사 수확물을 그득하게 실었다. [사진제공-정찬열]

 

▲ 아주머니가 리어카에 물통을 싣고 간다. 물을 길러 오는 모양이다. [사진제공-정찬열]

 

산천은 아름다운데 밤이 되니 깜깜하고 적막하다
 
오늘 저녁 숙소는 ‘금강산 가족호텔’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위에 서있는 건물이다. 현대에서 지었다는데 시설이 훌륭하다. 하룻밤 요금이 $150. 호텔 앞으로 호수처럼 항구가 자리 잡고, 오른쪽 저만치 현대에서 만들어 놓은 해상 호텔이 바다 위에 떠있다. 항구를 빙 둘러 마을이 자리하여 크고 작은 건물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가까이 보인다. 바다를 배경으로 해질녘 금강산 전경이 아름답다. 
 
방을 정한 다음 온천을 갔다. 금강산 온정리 온천이다. 2003년 속초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 관광을 왔었는데, 그 때 그 온천장이다. 목욕 요금은 개인탕 7달러, 공중탕은 5달러다.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손님은 많지 않다.
 
목욕을 끝내고 식당을 찾았다. 시내가 깜깜하다.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 몇이 선물가게 앞에 서성일 뿐, 식당도 개점휴업 상태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 속초에서 금강호가 출항함으로써 시작됐다. 금강호가 드나들던 장진항은 군항이었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 북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령으로 잠수함기지를 후방으로 옮겼다. 언급했듯이 개성공단도 건설이 시작되면서 군을 후방으로 이동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남북한 간 충돌을 방지하는 평화사업이 된 셈이다.
 
2003년 미국에서 금강산 관광을 위해 필자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도처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물가게나 식당, 서커스 장도 줄을 서서 사람들이 기다렸다. 지금은 적막하다.
 
금강산 관광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윈윈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의 동질성 회복이 급선무다. 왕래와 교류, 상호협력이 필수적이다. 금강산 관광이 그것을 위해 적잖은 기여를 해왔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금강산 관광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리고 통일을 대비한 좋은 선택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 된다면,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통일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정책도 그와 맞물려 시너지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별금강’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 끼 5달러. 깜깜한 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손님도 우리 일행을 비롯한 몇 사람뿐인 것 같다. 내일은 금강산을 오를 예정이다. 

▲  오른쪽 저 멀리 바다에 떠있는 현대 해상호텔이 하얗게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별금강’ 식당 앞 풍경. 깜깜하다.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사진제공-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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